─ 얘, 꼬마야.
어느 누가 그랬다.
─ 왕관을 썼으면, 그 무게를 견뎌야지.
왕관을 썼으면,
─ 그러지나 못할망정.
그 무게를 견디라고?
세상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게나 형식적인 추앙을 해주던 때는 언제고.
이 높고 황홀한 자리에 올라온 것만큼은 황송했으나, 어쩐지 정말 추대해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별생각 없었다. 누가 날 떠받들든 굽실거리든 간에. 아무 상관없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외로운 건가?'
외롭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스스로가 우스워 피식, 웃어본다. 그리고 새삼스레 왕관을 벗어 그 끄트머리에 새긴 내 이름 석 자를 읽어본다.
'즉위한 순간을 기억하며,'
'너른 1년,'
'이동해.'
이동해, 이동해, 이동해. 자꾸 움켜잡고, 자꾸 곱씹어 본다. 나는 증오하는 내 이름을 감히 잘근잘근 새겨서, 끝내 목뒤로 넘겨 삼킨다. 녹여버린다. 처음에만 기뻤을 먼지 같은 순간을 차마 기억하기는 싫어서. 하지만 소용없었다. 지독하게도 깊게 남은 이름 자국은 한 획도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나니 또 이상하다. 이런 내 이름을 불러주던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동해!"
... 그게 누구더라.
⁰ 즉위 이후 지난날의 기억은 잊고만 싶었다. 누가 중요했고, 무엇이 발목을 잡았고를 떠나서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추악해졌었는지를 생각하면, 날 바닥으로 떨군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내 어미와 아비는 이 더럽게도 교만스러운 제국의 터를 세운 거물들이었다. 자기들 뜻대로 창조하고 헐고, 백성들을 밟으며 놀아오던 그런 허울뿐인 거물들이었다.
그러다 장난스레 시작된 둘의 정사를 통해 내가 태어났다. 그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찢고 파고든 것은 둘의 귀찮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죽이지 못해 거둬들여야 한다는 끔찍한 눈빛. 왜 그런 날 몸속에서부터 죽이지 않았을까 싶어 누군가 물어본다면, 어떻게든 대는 이어야 했고, 다시 한 번 더러운 민심을 사고 싶어서─라고 답해도 충분할 것이다.
"이 아이는 장차 짐과 같은 거물이 될 걸세!"
그리고 나는, 그때에도 형식적인 축하를 받았다. 감축드립니다, 폐하. 앞으로 개척될 미래가 밝습니다, 폐하.
폐하, 폐하, 폐하.
"자네들도 기쁘지 않은가! 어서 잔을 드세!"
암요, 폐하. 그렇고말고요.
짜증 나게도, 갓난아이의 나는 어미라는 인간에게 안긴 채 뭣도 모르고 입 벌리며 웃고만 있었다.
그 뒤에 어미와 아비는 그들 딴에 격식을 차리고자 태어난 내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굳이 따지자면, 부르기 편하게끔 일시적으로 붙고 말 애정 없는 꼬리표였다. 이 제국은 지리 상 무한히 넓은 해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오늘날 식솔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그와 관련한 내 이름이 될 단어들이 차례대로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바다야, 너울아, 물치야.
그래서 어떤 날에는 바다로 불렸고, 어떤 날에는 너울로 불렸으며, 어떤 날에는 물치로 불렸다. 한 정신에 셋의 꼬리표가 붙은 셈이었다. 사실은 그것마저 입에 담기 싫었는지 꼬맹이로 불린 때가 더 많았다. 그럼 셋이 아니라, 넷.
그래서 나는 한동안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어제가 바다였다면 오늘은 너울이고, 오늘이 너울이라면 내일은 물치일 것이고, 내일이 물치라면 모레는 다시 바다일 테니까. 아아, 내 피가 더러운 것을 그때부터 탓해야 했는데.
그런데 더 끔찍하고 어이없는 건, 내 꼬리표가 너무 많아서 어미와 아비마저 내가 누구인지 쉽게 잊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이름들을 부르다 말고 꼬맹이라고 부르는 순간이 잦았다.
"꼬맹이 놈, 참 밉게도 생겼구나."
그리고 그 '꼬맹이' 앞에는 항상 파렴치하고 질 떨어지는 수식어가 같이 붙는 게 일상이었다. 더러운, 못난, 저주스러운─
음, 어쩐지 악몽을 꾼 기분이다.
¹ 내가 태어나 이름 아닌 이름을 가진 지 육 년이 지나갈 때, 어미와 아비는 나를 교육했다. 내게 잠재된 황제의 자질을 깨워 아비의 대를 잇겠다는 목적으로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혹독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높은 언성이 귀에 박혔고, 어떻게든 따라오면 참 어설프기도 하다며 또 욕을 먹었다. 기대감은 무슨, 이 제국을 향한 모든 책임을 내게로 전가한 셈이었으나, 어린 나이의 나는 그저 어린 마음에 뭣도 모르고 배웠다. 배우고, 또 배웠다. 힘들었든 욕받이가 되었든 뭐든 간에 그런 과정 자체가 처음이었으니까. 예의는 어떻게 지켜야 하며, 황제로서의 품격과 덕목은 무엇이고, 장차 제국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같은. 지금 생각하면 전부 쓸모없는 배울 거리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어느 날, 어미가 나에게 말했다.
"얘, 꼬마야."
"... 네, 어머니."
"쯧, 이젠 네 입에서 나오는 그 호칭을 그만 듣고 싶구나."
"......"
"그건 무엇이니?"
"아버지께서 생각해보라고 하신, 황제로서 꿈꾸는 미래예요."
그 작은 갱지에 어린 글씨로 쓴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믿음 높은 힘 아래 평화롭게 다스림 받는 백성들의 삶', 이던가.
"... 또 네 아비가 엉망으로 가르친 모양이구나."
어미는 그 갱지를 보더니 바로 내쳐버렸다. 그리고 그 오만방자한 입을 다시 열었다.
"왕관을 썼으면, 그 무게를 견뎌야지."
왕관의 무게. 어린 나에게 그런 추상적인 말이란 너무도 어려웠다.
"그러지나 못할망정."
허튼 꿈이나 꾸고 있구나. 나는 바보같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갱지에 적은 그 꿈은 허튼 것에 불과했구나.
내 가슴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² 이듬해 어느 날부턴가 혹독하고 단단한 교육에 약간의 반항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개념이 잡히면서 처음으로 힘듦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창밖의 드넓은 산과 나무들을 보았다. 언젠간 도망 치리라. 나더러 오라고 부추기는 그 숲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래서 하루는 보는 눈을 피해 도망쳐 황실 밖을 멀리 뛰쳐나갔다. 아주 멀리, 잡히더라도 오래 걸려야 잡힐 정도로 멀리. 작지만 날랜 몸으로 잘도 뛰고 뛰어서 외진 숲에 몸을 숨겼다. 한낮이었지만 홀로 거니는 숲이 너무도 광활하고 두려워 몇 번 거닐다 만 채 금세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앞만 보고 뛰느라 감지 못한 눈에서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껴 대충 닦았는데, 닦은 자리가 따끔거렸다. 그제서야 보니 곳곳에 풀에 다친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안 그래도 흉하다고 폄하당하는 몸 더 욕먹게 생겼다. 하지만 돌아가기는 싫어 계속 그렇게 있었는데, 나뭇잎끼리 부딪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스럭부스럭, 산짐승인가? 도망치기엔 끌어안은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두려움에 떨며 슬금슬금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다만 그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다시 얼굴을 파묻어 눈을 질끈 감았다.
부스럭부스럭, 점점 가까워진다.
"... 저기,"
"...?"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니, 짐승의 소리가 아닌 웬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길... 잃은 거야?"
경계를 조금 풀어 고개를 들어보았다. 내 또래의 반반하게 생긴 아이가 바구니를 든 채 나와 눈높이를 맞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니, 놀러 온 거야."
그렇구나. 날 바라보는 눈이 곱게 접힌다. 이제 보니, 작은 점이 박힌 저 발그스름한 뺨이 참 예쁘게 생겼다.
"난 이 근처에 살아. 여기서 장작을 구하거나 열매를 따고는 해."
아이가 제 품에 안긴 바구니를 흔들어 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면 온통 나무 열매들뿐이었다.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나는 성의 안에 갇힌 듯이 살아가는데.
"난... 저기, 저 성에서 왔어."
숲에서도 보이는 저 먼 곳의 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헙, 정말? 그럼 저 성에 산다는 거네? 좋겠다!"
어쩐지, 입은 옷이 나보다 훨씬 멋지고 단정하네! 신기한 것을 본 듯이 그 둥그러진 눈으로 나를 다시 바라보는 아이였다. 그 놀란 얼굴이 예뻐서, 보석이 박힌 듯 빛나는 눈동자가 좋아서 나도 모르게 편안하게 웃었었다.
"저 성에서는 뭐 하면서 지내? 놀 거리가 많아? 맛있는 음식이 잔뜩 있으려나?"
"응. 잔뜩 있어. 근데 나는, 그거 다 못 건드린대."
"어라... 어째서? 저 성에 산다며!"
"... 그게..."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내가 나중에 황제가 될 거래. 그래서 황제가 되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러셨어."
"황제? 너 그러면, 지금 황제 폐하의 아들인 거야?"
그제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황실의 자제가 서민 아이와 어울리는 꼴이라니. 그러나 그것보다 심각한 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면 그때부터 내 존재가 이 제국에 파다하게 알려졌을 텐데, 그것마저 발설되지 않은 건지 내가 황실의 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의 나는 몰랐다.
"맞아. 우리 아버지는 황제셔. 어머니는 황비시고."
"신기하다... 근데 그러면, 너 여기에 와도 괜찮은 거야? 너랑 나랑은 신분이 엄청 다른데..."
"... 사실은 몰래 도망 나왔어.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여기도 처음 와 봐."
"그렇구나. 그럼... 급한 대로 우리 집에 잠깐 있을래? 아주 잠깐만! 점점 해도 떨어지는 것 같으니까."
"...... 정말? 그래도 돼...?"
순간 혹했다. 처음 만나는 서민 아이가 내 신분이 어쨌든 상관없이 나를 도와준다는 것에 감동해서. 그래서 처음엔 경계했다.
"나 때문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화 나시면 어떡해? 너도 큰일 나지 않을까...?"
"괜찮아. 들키기 전에 얼른 돌아가면 되잖아. 자, 가자!"
그러더니 내 손목을 잡고 앞서서 걷는 아이였다. 참 낙천적이고 친절하구나. 얼마나 기뻤는지 그 모습을 참 닮고 싶었다.
걷고 걷고 걸어서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 앞에 다다랐다. 먼저 문을 열고 나를 들여보내는 아이의 목소리가 그 작은 집에 울려 퍼진다.
"엄마, 친구 데려왔어! 잠깐 있다가 갈 거래. 괜찮지?"
휘황찬란한 성보다는 작고, 반듯한 성보다는 군데군데 해진 곳이 많았다. 하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매우 따뜻했다.
"정말로 친구를 불렀구나. 조금 기다렸다가 부르면 나오렴. 맛있는 스튜를 준비할게."
"응!"
신난다,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붕붕 뛰는 아이. 나도 이유 모르게 덩달아 신이 나서 같이 뛰었다. 성에 있을 땐 이런 것 하나도 할 수 없었는데. 이곳에 발을 들인 후부터 마음이 너무나도 편안했다. 어린 마음이었는지, 본능이었는지 모르지만,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느낌에 겨웠을지도.
그러나 한 가지 두려운 것은, 내가 황제가 될 사람이라는 걸 이 아이만 알고 있었으면 했다.
"... 저기, 있잖아."
"응?"
"내가... 성에 사는 거. 너희 어머니껜 말하지 말아 주라."
혹시라도 말이 퍼지고 퍼져서 내가 드러나게 되면, 다시는 이런 도피 따위는 할 수 없을 테니까.
"다 되었단다! 어서 나오렴!"
"네에─"
아이의 어머니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 나와 보니, 고소한 스튜 냄새가 훅 끼쳤다. 나와 아이는 그것의 발원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스푼을 들어 떠먹기를 한 번, 두 번 반복했다.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기분이 좋았다.
"반갑구나, 멋진 아이야. 얼굴이 참 귀엽게 생겼구나."
칭찬. 그것은 칭찬이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칭찬.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만 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 감, 감사합니다...!"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는 웃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 너무나도 행복했다.
"이 근방에서 사니?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엄마, 얘는 저기 성에서─"
아이는 나보다도 신이 나서 내가 사는 곳을 말하려고 했다. 나는 급하게 아이의 앉은 다리를 툭툭 건드려 저지시켰다.
"응? 뭐라고?"
"아, 아니! 저기 성에서 살아보는 게 꿈이래...! 하하, 그치?"
"응...! 맞아요. 여기서 좀 먼 곳에... 살아요."
"그렇구나. 누구나 그런 꿈을 꾸곤 하지. 나도 우리 아들도 한 번쯤은 상상해보았단다."
하지만, 역시 아직까진 성에 사는 것보단 여기에서 이렇게 단란하게 사는 것이 더 좋더구나! 아이의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나도 느껴보고 싶었다. 그 단란함을.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던 중, 바깥이 익숙한 소음으로 시끄러워진 것을 들었다.
"..."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써 듣지 않으려 해보았다.
"있지,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물어봐서..."
"아, 그러네!"
"네 이름은, 뭐야?"
"내 이름은 이─"
쿵 쿵 쿵, 벌컥. 여기 어린 꼬마 아이 못 보셨나요. 아, 역시나 내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가 버렸다. 아비가 어떻게 알고선 보낸 병사들이 나를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가 피해를 입을까, 억지로 먼저 모습을 드러내 버렸다.
"자, 잠깐...!"
나를 따라나오려는 그 아이의 목소리는 차마 막지 못했다.
... 나, 아직 네 이름 못 들었는데.
³ 어미와 아비는 당연히 화가 치밀어 있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어린 나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째서 멋대로 성을 빠져나온 게냐? 어린 것이 감히 미치기라도 했느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차라리 성 바깥이었어도 그 주변이었다면 봐주려고 했다. 그런데 하등 한 것들이 사는 숲 구덩이로 가 버리다니!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못할 짓이지."
쯧쯧, 혀 차는 소리. 어미와 아비가 무어라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린 나는 혼나는 것이 두려워 그저 주먹을 꼭 쥔 채 떨고만 있었다. 그들이 하등하다니. 절대 그렇지 않은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미가 나를 끌고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로, 철창 속으로 나를 들이밀어 가두었다.
"이딴 꼬맹이한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을 하다니."
그냥 굶든지 멍청해지든지 하거라. 앙칼진 목소리. 그렇게 나는 뭔갈 먹거나 마시지도, 배우거나 깨우치지도,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채 사나흘이나 되는 시간을 그 철창 속에서 보내야 했다.
꺼내주세요, 어머니.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어서 꺼내주세요. 죽기 싫어요. 멍청해지기 싫어요. 어머니. 제발.
소용없었다.
⁴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어찌어찌 풀려났다. 황제의 아들 주제에 풀려난 당시 받아먹은 건 빵 반 조각과 작은 접시에 담긴 물 몇 모금이 전부였다. 허겁지겁 받아먹었다. 자존심 따위 버려두고 막 먹어치웠다.
그리고 또다시 성을 빠져나와 그 숲으로 향했다.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다시 갇혀 아사를 하든 멍청해지든 걱정하지 않고 무작정 빠져나왔다. 또 숲을 걷다가 그루터기 같은 곳에 앉아 쉬고 있으면, 약속한 것처럼 그때 그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아이의, 여전히 그 붉게 물든 뺨이 참 예뻤다.
"... 응. 안녕..."
나도 손을 들어 흔들었는데, 그새 야윈 손목이 드러났는지 아이가 질겁을 하며 내 손목을 살폈다.
"너 손목이 왜 이래? 얼굴은 또 왜 그러고... 혹시, 그날 무슨 일 있었어...?"
"..."
"말해 봐. 응? 걱정되잖아..."
날 바라보는 보석 같은 눈이 안쓰럽게 내려앉으며, 짧고 차분하게 내린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슬슬 휘날렸다.
"혼났어, 몰래 나가서... 벌로 며칠 동안 굶었거든. 그래서 그런가 봐."
"맙소사..."
내 말을 듣자마자 아이는 바구니 속에 어떤 병을 꺼내더니 나에게 얼른 건네주었다. 건네받은 그 병은 따뜻했다. 뚜껑을 조심스레 열었는데, 낯익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엄마가 싸주신 스튜야. 너 다 먹어도 돼."
스튜였다. 그때 아이의 집에서 처음 먹었던 스튜.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랐다. 벅찬 감동에 울면서 스튜를 먹었다. 안에 든 덩어리까지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그러다 보니 스튜 병이 깨끗하게 비었다.
"... 이제 좀 나아졌어?"
"...... 으응. 고마워..."
내가 고개도 못 들고 울자 아이는 나를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왜 울어. 울지 마.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아아, 어쩌지. 이런 포옹을 더 원했던 것은 이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성에서는, 말 듣지 않으면 막 굶기고 그러는 거야?"
"... 잘 모르겠어. 그런데 나는 그랬어."
내가 황제가 될 자격이 없대. 다 닦지 못한 눈물이 느껴졌다. 내 눈빛이 금방 우수에 젖자, 아이는 계속 날 토닥여주기만 했다.
"너희 어머니는, 결국 아셨으려나?"
"... 뭘?"
"그때, 내가 병사들한테 잡혀갔을 때."
"... 아,"
"내가 저 성에서 사는 황실 사람이라는 거... 말이야."
"......"
"... 너희 어머니께서는 모르셨으면 했는데."
쓰게 웃었다. 이 땅이 나를 모르는 것처럼, 아이의 어머니도 나를 그저 지나가는 아이로만 생각하고 넘어가길 바랐는데. 그래야 이 아이를 만나는 시간이 끊기지 않을 테니까.
"괜찮아, 걱정하지 마."
"... 어?"
"내가 어떻게든 다 설명했거든. 성에서 왔지만 신분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순수하고 착한 친구라고!"
그러니까 내 친구, 그 이상으로는 다 잊어달라고. 그렇게 설명했어. 나 잘 했지?
아이의 순수한 배려에, 내 마음 한편에 큰 감동이 울리고 있음을 느꼈다. 날 정말 친구로 여겨줬구나. 이런 따뜻함이 너무나도, 절실히도 필요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그것을 충족해 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한없이 고마웠고, 한없이 벅차올랐다.
"고마워, 정말. 넌 정말 착하고 따뜻하구나..."
"아이, 쑥스럽게 뭘...!"
그마저도 좀 진정되고 나서, 나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렸다.
"저기, 나... 네 이름 아직 모르는데."
"어, 그러네! 저번에 얘기하려다가..."
"... 이름이, 뭐야?"
"난 이혁재라고 해. 너는?"
혁재. 넌 그 이름도 참 예쁘구나.
"난..."
잊고 있었다. 내 이름이 없다는 걸. 그래서 조금 머뭇거렸다.
"난... 이름이 없어."
"이름이 없다고...? 설마!"
이런 반응을 듣는 것은 당연했다.
"진짜야. 나... 나도 내 이름을 몰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럼, 뭐라고 불리기라도 한 건 없어...?"
"난 어떤 날엔 바다고, 어떤 날엔 너울이고, 어떤 날엔 물치래."
"바다... 너울... 물치...?"
"으응. 근데, 꼬맹이라고 불릴 때가 더 많아."
이유는 나도 몰라. 그냥 그런가 보다, 했거든.
"그러니까 혁재 너도 셋 중에 골라서 불러줘. 난 괜찮아."
"...... 아니야. 역시 못 고르겠어. 그건 진짜 이름이 아니잖아."
아이의, 혁재의 표정이 살짝 곤란한 듯이 구겨졌다. 역시나 나는 감동했다. 날 이해해 주는 저 눈빛.
그러다 혁재가 내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있지, 생각해 봤는데... 네 이름을 내가 지어주는 건 어때?"
그게 더 특별할 거야! 금방 해사하게 올라가는 분홍빛 입꼬리가 참 앙증맞았다.
"내 이름...? 뭘로 지어줄 건데...?"
"음... 이 나라는 동쪽 바다가 엄청 예쁘고, 또 네 이름들도 바다랑 관련된 단어들이니까..."
"..."
"동해 어때? 황제 폐하의 성씨를 따서, 이동해!"
그 순간,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어린 나를 휘감았다.
"... 동해..."
"...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엄청 좋아, 기뻐...! 나도 모르게 혁재를 부둥켜안고 고마워, 고마워, 하고 웅얼거렸다. 어쩐지 또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혁재는 조금 놀랐지만 곧 같이 나를 안아주며 기뻐해 주었다.
"그럼, 잘 부탁해. 동해!"
"응, 나도 잘 부탁해... 혁재야!"
내가 참 좋아하는 아이, 내가 참 의지하는 아이가, 오직 하나뿐인 혁재가 지어주고 불러주는 특별한 이름. 정말로 가지고 싶었다.
동해, 동해, 이동해.
그리고 그 이름은, 훗날 나에게 증오심을 가져올 이름이라는 것을, 내 왕관의 무게를 더 가중시킬 이름이라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⁵ 나에게 '이동해'라는 제대로 된 정체성이 생긴 이후부터, 나는 점점 날 옥죄어오는 시선과 압박에 겨워 숲에 놀러 가지 못했다. 혁재에게 가지 못했다. 그리고 성에 발을 들인 이상 나는 다시 바다, 너울, 물치로 돌아와야 했다. 내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면 서민 아이가 지어준 이름을 가지려 하다니, 하는 멸시만 더 받게 될 테니까. 하지만 나와 혁재는 각자의 위치에서 점점 더 성장했다. 나중에 만난 혁재는 그 보석 같은 눈과 예쁜 뺨, 좋은 말만 뱉는 입술까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 그대로 더 아름다워졌고, 내 어미와 아비, 혁재의 어머니는 세월의 바람을 맞아 더 늙어갔다.
웃기지도 않은 것은, 내 어미와 아비는 끝까지 허영심만 따라가다 그나마 남아있던 총명함마저 다 잃고 점점 둔해졌다. 그렇게 매번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시야가 빗겨나기 시작하자 나는 그리운 그곳으로, 혁재가 사는 숲으로 향했다.
자박자박, 걸을 때마다 바스러지는 낙엽이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고, 하늘 높이까지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 정겨운 거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한참을 걸으니 내가 혁재를 기다렸던 그 자리가 보였다. 저 자리에 앉아있으면 혁재가 오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 그곳에 얼른 앉아보았다. 예전보다 높아진 눈높이가 새로워 주위를 계속 돌아보았다. 내가 느끼고 싶었던 건 매번 성벽 아래 펼쳐진 같은 광경이 아닌, 날마다 달라지는 숲을 보는 새로운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보니, 또 그때처럼 덤불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좋아하고 의지하는 그의 목소리가.
"... 이동해...?"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니 정말이었다. 환청도 환상도 아닌, 정말 혁재였다.
"동해!"
"혁재야, 이혁재!"
눈을 채 비비기도 전부터 벅차오르는 가슴에 나와 혁재는 서로에게 달려들어 꼭 부둥켜안았다. 눈물이 차츰 차오르는 걸 느꼈다.
"진짜, 이게 얼마 만이야. 동해..."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혁재야..."
포옹을 살짝 풀고 보니, 혁재는 어릴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더 멋지게 자라 있었다.
검게 내려앉은 머리칼에, 보석을 담은 듯한 눈, 오뚝한 코와 예쁜 분홍빛으로 물든 뺨, 작게 박힌 점, 그리고 그 앙증맞은 입술까지.
"잘 지냈어...? 계속 기다렸는데 오지도 않고... 많이 바빴어?"
"... 으응. 황제가 되어야 하니까... 공부하느라."
"그랬구나... 꽤 열심히 지냈나 보다. 그치."
"뭐... 그럴지도 몰라. 너는 잘 지내고 있었어? 너희 어머니도?"
"나야 뭐, 변한 거 없이 똑같아. 우리 엄마도 쌩쌩하시고."
말 나온 김에, 우리 집으로 갈까? 오랜만에 스튜도 먹자. 엄마도 반가워하실 거야. 여전히 그 따뜻한 목소리도 토씨 하나 변한 게 없었다. 이 아이의 옆에, 혁재의 옆에 계속 있고 싶었다.
오랜만에 혁재를 따라 다시 온 아담한 오두막집.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대는 판자와 나무 냄새를 느끼다 보니 처음 여기로 도망 나왔던 그때가 생각났다. 어린 시선에 이것저것 다 신기해 보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때보다도 어딘가 낡기 시작했지만,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 공간에서 우러나오는 단란함. 그것 하나만은 식지 않았다.
내가 바랐던, 내가 그리워했던 이 포근함은.
"엄마, 동해 왔어!"
"동해...?"
혁재의 외침에, 또 다른 익숙한 인영이 눈앞에 나타났다. 혁재와 똑같이 낙관적이고 포근한 인상을 가진, 그의 어머니.
"어머, 예전에 네가 데리고 왔던 그 아이 말이니...?"
"응, 엄마. 엄청 오랜만이지?"
"그래, 어휴... 잘 지냈니? 그때 이후로 얼굴이 통 보이지 않더구나. 혁재가 얼마나 목을 빼고 기다리던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앙증맞게 잘 커 주었구나, 아가. 혁재의 어머니는 내 뺨을 고루 쓰다듬더니 날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마치, 자신이 낳은 혈육이라도 되는 것처럼.
"...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위화감은 전혀 없었다. 난 이 단란함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너무나도 겪고 싶었기에.
포옹을 풀고 나서는, 혁재를 다시 부둥켜안았다. 오랫동안, 오랫동안 부둥켜안았다. 그러고 싶었기에 그렇게 했다.
"고마워, 혁재야. 나 기다려줘서, 만났을 때부터 도와주고, 내가 의지할 곳을 만들어 줘서. 정말..."
"뭘, 우린 둘도 없는 친구인데. 당연한 거지. 나도 너에게 고마워, 동해. 무턱대고 다가갔는데도 곧잘 마음을 열어줘서. 신분이 어찌 됐든 같이 있어줘서."
편안하게 어깨를 쓰다듬듯 내려앉는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네가 좋았다. 이혁재, 그 이름 석 자가 내 가슴을 간질였다. 어쩌면 난, 정말로 너를 사랑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뒤로도 예전처럼 숲에, 너에게 자주 찾아갔다. 네 곁에 계속 있고 싶었고, 널 향한 내 마음을 끊고 싶지 않았다. 널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마음 또한 나에게로 향해 있었나 보다.
"좋아해, 이혁재."
"동해."
"널 안는 것도, 네 웃는 걸 보는 것도, 나한텐 전부 보물 같아. 네가 날 향해서 웃어줄 때면, 그 두 눈에서 보석이 떨어지는 것만 같아. 난 그게 좋아, 혁재야."
"나도 좋아. 아니, 사랑해. 네가 나로 인해서 그렇게 밝게 눈을 접고 웃어주는 게 너무 좋아. 그뿐이게? 네가 날 믿고 의지해 주는 게 나한테는 너무나도 감사해."
"혁재야."
"너는 내 선물이야, 동해. 언젠가 네 머리 위로 왕관이 쓰이겠지만, 그래서 어쩌면 얼굴 보는 게 다시 뜸해지겠지만, 난 변함없이 널 사랑하기로 결심했어."
"... 나, 나 있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아. 혁재야,"
"그러니까... 훗날 그 왕관이 무겁다고, 무섭다고 절대 포기하지는 마."
내 생각 하면서. 알겠지? 한순간도 나를 향한 그 눈을 거두지 않는 혁재에, 난 정말 죽어버릴 것처럼 행복했다. 그래서 눈물이 흘렀고, 그래서 그를 더 끌어안았다.
"사랑해, 정말로. 언제까지나."
"나도."
마침내 스튜보다 따뜻하고, 숲보다 잔잔한 키스를 나누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기를 결심하는 입맞춤을.
그리고 나 역시, 혁재를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⁵ 내 부모라던 인간들이 겨우내 죽었다. 헛된 놀음만 하다 늙어 죽어버렸다. 그 후에야 내 머리 위에 왕관이 내려앉았다. 내 컴컴한 마음과는 달리 금빛으로 환하게 물든 빛이 나는 왕관이. 그리 내키진 않았다만, 그들의 허울 좋은 사상에서 벗어나 허튼 꿈이라 멸시받았던 평화적인 다스림을 이룩하고 싶었다.
마침내 내 정체성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준 이름을 펼쳐 보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곁에서 함께 축하하고 축하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의, 혁재의 넓은 마음을 새겨두고 또 기억하고 싶었다. 간직이라는 걸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 머리에 자리한 왕관 끄트머리에, 그와 나를 새겨 넣었다.
'즉위한 순간을 기억하며,'
'너른 1년,'
'이동해.'
⁶ 이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그 얄궂고 앙칼진 목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얘, 꼬마야."
그 목소리의 주인은 내게 이렇게 비수를 꽂았었다.
"왕관을 썼으면, 그 무게를 견뎌야지."
왕관을 썼으면,
"그러지나 못할망정."
그 무게를 견디라고?
"폐하, 어디 편치 않으십니까?"
"... 아니, 별것 아닙니다."
"의원을 부를까요?"
"괜찮습니다. 들어가 계세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 떠나간 인간 목소리는 왜 들리고 난리인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겨우 내보냈다. 그렇게 숨이 좀 골라지나 싶었는데, 어쩜 때도 참 안 맞지, 뒤이어 문 너머로 들려오는 어떠한 목소리를 들어 버렸다.
"이번에 즉위하신 폐하 말입니다. 어쩐지 제 기분에만 따라서 통치하려는 것 같지 않습니까?"
"동감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한들, 체통은 지키셔야 하는데 말이죠. 영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때 거물이셨던 폐하의 자제이신데, 저는 믿으렵니다."
"쯧, 왕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디라지요. 저대로 가다간 저 왕관을 쓴 채 홀로서기란 금방 무너지겠는데요."
"... 그만, 듣는 귀가 많습니다. 이만 물러가세요."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제발, 겨우 그 목소리를 지웠는데. 그 기억을 잠시나마 잊었는데. 왜 다시 들리는 거지, 어째서 떨어지지 않는 거지.
점점 울화가 치밀었다. 그들의 존재란 대체 무엇이길래, 내 왕관의 존재를 이토록 무섭게 하고, 내 왕관의 무게를 이토록 무겁게 만드는 것이지?
"...... 으,"
머리가 아팠다. 무서울 정도로, 깨져버릴 정도로 아팠다. 무서워. 무섭다. 난 그 인간들처럼 폄하 당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꿈 꿔오던 건 이게 아닌데. 잊어야 했다. 잊고 싶었다. 뜯어내고 싶었다.
그래, 너희들도 내가, 내 꿈이 헛되었고 부질없다고 생각하지. 결국은 다 똑같은 것들이지. 그런 거지.
나는 검을 들었다.
⁷ 성이 불타고 있다. 내 손에 사람들이 죽어간다. 귓가엔 빛을 잃고 타들어가는 성을 에워싸는 비명소리가 줄곧 맴돌았다.
살려주세요, 체통을 지키세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폐하, 폐하, 폐하.
듣기 싫어서, 내 앞을 막는 것들에게 검을 모조리 휘둘렀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제는 바람 가르는 소리마저도 추악한 비명인 것만 같았다.
저벅, 저벅, 저벅.
말라붙은 낙엽을 지르밟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¹⁰ 보고 싶었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어떻게 숲으로 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내 눈앞에 그가 있다.
"... 동해...?"
"혁재야."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서, 검의 끝과 옷자락을 질질 끈 채 그에게 다가간다. 두 팔을 벌렸다. 그를 너무나도 안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
"...... 잠깐만,"
"나 좀 안아주라. 응? 혁재야."
애써 웃으며 더 다가가면 제일 먼저 내 몸을 살펴주는 그였다. 시간이 얼마만큼 지나든 너의 마음은 정말 변치 않았구나.
"... 동해, 무슨 일이야. 온몸에 피가 잔뜩이잖아. 응?"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을 쏟아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울었다. 그제야 그가 나를 껴안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품에 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단란함을.
"혁재야, 다들 나더러 왕관을 쓴 걸 후회하래."
"......"
"나 따위는 이런 뭣 같은 왕관의 무게를 견딜 자격이 없대."
"......"
"... 너도 그렇게 생각해?"
"......"
"말해 줘, 응? 혁재야,"
"......"
들리지 않는다.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겨우 네 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네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보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들리지 않아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나에겐 그 누구도, 작은 터럭 끝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던 거지?
⁸ 누군가가 내게 안겨 잠들어 있다. 붉게 물든 채로. 다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누구지, 어째서 내게 안겨 죽어있는 거지. 분명 내가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던 사람인 것 같은데.
애썼다. 기억을 더듬으려고 애썼다.
⁹ "... 동해?"
누군가 내 앞에 서 있었고,
"... 비켜."
누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고,
"동해, 잠깐만...!"
그 눈을 마주한 나는 검을 고쳐 잡았고,
"비키라니까!"
자꾸만 나를 붙잡는 그 목소리를 베었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사랑하던 누군가를 꼭 닮았는데.
"...... 윽, 흐으..."
어쩐지 마음이 아프고 이상해져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붉어지고 차가워진 몸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울었다.
사랑해. 사랑했는데, 네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아. 이 손의 피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겠어.
¹⁰ 내 머리를 억세게 조이는 왕관을 벗어 그 끄트머리를 보면 변함없는 그 자리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이동해."
이동해, 이동해, 이동해. 이 이름을 곱씹어 보면 곱씹어 볼수록, 어쩐지 내 마음 한 쪽이 이상하게 일렁였다. 이질감이 들었다. 내 이름이 맞는 걸까, 내가 사랑하는 이름인가.
더 생각하고 있자니 역겨워지는 기분이 들어 그만두었다. 가증스러웠다. 나를 착잡하게 만드는 이 이름이.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증오해 오기를 수백 번, 수천 번. 그렇게 지나올 때 즈음에, 내 귓가에 굉장히 낯이 익으면서도 흐릿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너는 내 선물이야, 동해."
그 목소리는 내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른다.
"언젠가 네 머리 위로 왕관이 쓰이겠지만,"
나의 마음을 얼싸안아 그 품에 넣는다.
"난 변함없이 널 사랑하기로 결심했어."
다시 마음이 이상해진다. 누구의 목소리였던가.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목소리와도 같은데. 도대체 누구지.
"그러니까... 훗날 그 왕관이 무겁다고, 무섭다고 절대 포기하지는 마."
... 안다. 알 것 같았다.
"사랑해, 정말로. 언제까지나."
"나도."
나는 이제야 기억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을 그토록 이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 혁재야."
내 이름을 불러주던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 너였구나. 너였어. 혁재야, 너였구나."
외로웠다. 외로운 것이었다. 이 공허하고 넓은 곳을 아무리 많은 사람이 꿰차고 들어온다고 해도, 나는 절대 외로움을 끝맺을 수 없었다.
"네가 날 믿고 의지해 주는 게 나한테는 너무나도 감사해."
네가, 혁재가, 사랑하는 그 아이가 내 곁에 없었으니까.
"... 이혁재..."
그의 검게 내려앉은 머리칼과 보석처럼 밝은 눈, 오뚝한 코, 발그스름한 두 뺨, 앙증맞은 입꼬리. 이 모든 것들이 나라는 어둠으로 인해 피에 젖어 뚝뚝 녹아내리던 모습이 기억났다.
이혁재, 철없을 때도 먼저 다가와 준 구원자 같은 아이.
이혁재, 상처받아 닫힌 마음을 열게 도와준 착한 소년.
이혁재, 혈통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서 변함없이 날 사랑하기로 결심해 준 따뜻한 사람.
내가 그토록 너를 기억 속에 담아두지 못한 것은, 그 무겁고 무서운 왕관을 견디지 못하고 벗어 버렸기 때문에.
내가 그토록 나의 이름을 증오한 것은, 내 손으로 너를 떠나보낸 그날의 고통스러워하던 네 표정을 잊고 싶었기 때문에.
너를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저버렸기 때문에.
"훗날 그 왕관이 무겁다고, 무섭다고 절대 포기하지는 마."
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동해, 두 인간의 장난으로 태어난 상처투성이 아이.
이동해, 그저 따뜻함과 단란함을 염원하던 순수한 소년.
이동해, 지독하게 무거운 왕관에 얽매인 신분을 초월해서라도 사랑을 이루고 싶었던 비굴한 사람.
그래서 견딜 수 없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무서웠다. 왕관의 무게가, 너의 비명이,
"동해!"
너의 미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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