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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마니또가 첫 선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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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lash!
w. 블루
오늘이 발렌타인데이였던가? 동해는 제 사물함에 들어있던, 정갈한 글씨로 동해에게라고 적혀있는 초콜릿 세 개가 동봉되어있는 편지를 내려다보며 곰곰히 생각했다. 두 세달 전인가? 화이트데이 이후로 기념일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마니또?
웅, 우리 엊그제부터 시작했잖아.
엊그젠가 반장이 아침 조례전에 얘기했는데 너 또 안 듣고 잤지? 0해가 그러면 그렇지. 비웃는 의도가 분명한 조규현의 웃음소리에 동해는 동글동글하니 복슬복슬한 머리통에 망설임 없이 주먹을 쥐어박았다.
아니 아야야.... 인성 개 파탄났어 저새끼
그러게 누가 그딴식으로 입 털라디?
니 진짜 그러면 울고싶은거 알아?
울등가
친구 농사를 잘 못지었다느니 어쩌니 징징거리는 조규현을 뒤로하고 이동해는 분단 맨 앞자리에 앉아 친구와 떠들고 있는 반장, 이혁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 마니또도 저런 친구많은 애들이나 재밌어하지... 학교와서 대충 잠이나 자고 급식먹는게 낙인 애들은 좋아하지도 않아요. 초콜릿을 하나 까서 입에 넣기도 잠시 동해의 표정이 급격하게 구겨졌다. 아, 너무 단 건 좀 그런데. 작게 중얼거리던 찰나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이혁재와 눈이 마주쳤었던가.
니 내 말은 듣고 있냐? 배경음악처럼 들리는 조규현의 짜증어린 목소리에 이동해는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다. 미안 무슨 얘기했어? 조규현은 질렸다는 듯 손에 조그만 쪽지를 쥐어주고는 나간다.
이거 반장이 전해주라더라. 니 마니또라던데 걔도 나도 안 펼쳐봤으니까 걱정말고.
그럼 난 려욱이 보러간다 안녕~
퇴장까지 지랄맞은 새끼.... 곱게 치켜세운 중지로 규현을 배웅하며 곱게 접혀있는 쪽지를 펴 본 이동해의 표정은 급격히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쪽지에 적힌 세글자의 이름은 이혁재였다.
*
이동해와 이혁재의 사이를 정의하자면, 음. 음.....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짜. 농담 아니고 아무것도. 영어로 낫띵. 동해와 고등학교 3년을 내리 같은 반이었지만 노는 무리가 달라서 제대로 된 이야기 한 번 해 본적 없는. 공통점이라곤 같은 수험생 기간을 거치고 있는 고3이고 같은 독서실에 다니고 같은자리 짝꿍이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도 얘기를 나눠본적 없는. 미사어구가 옴팡지게도 존나게 긴데 요약하자면 하여튼 이동해와는 어울릴 일이 없는 부류였다는 뜻이다.
그런 애 마니또를 내가 하라고? 못해. 난 못해. 말도 안 섞어보고 어떻게 그,
마니또.
그래 그 마니또를 해줘?
그러면서 다들 친해지고 그러는거지.
그냥 몰래 챙겨주면 되는거지 대체 어려울게 뭐가 있냐? 눈썹하나 움직이지않고 희철의 입을 동해는 쥐어뜯을까도 생각을 했다. 아주 지 일 아니라고... 저를 뚫어져라 쏘아보던 동해의 눈빛을 알아챘는지 힐끔 동해를 쳐다본 희철이 입을 열었다.
걔 좋아한다며.
여섯 글자. 더도말고 덜도 말고 딱 여섯글자는 동해를 넉다운 시키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아니, 그 맞는데. 아니이.... 귓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동해를 보며 희철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이 생에 저 새끼 연애하는거 보기는 그른 것 같았다. 원래 그러면서 애들끼리 친해지기도하고 막 고백도하고 어쩌고하는거야 알았지? 알았으면 닥치고 나가 나 잘거임 ㅅㄱ. 아니 형! 그렇게 이동해는 희철의 반에서 쫓겨났다. 그러니까 그 몰래 챙겨주는걸 못하겠다니까....
당장 마니또 첫날부터 사흘이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해준게 없었으니 미칠지경이었다. 예전부터 숨기는건 죽어도 못하는 성격에 당장 들킬것부터 걱정을 하고 앉아있으니 무얼 할 수 있겠냐마는 - 어딘가의 조모씨는 이 사단을 지켜보며 쌩지랄을 떤다고 했다 - 지금 눈앞에 놓인 현실보다 닥쳐올 미래가 너무 컸기에 이동해는 그대로 ko하고말았다. 망했어.... 마니또 시작한지가 벌써 며칠짼데 지금쯤 속으로 마니또 개 욕하고 있는거 아니야? 난 쓰레기야.... 하고 이동해씨가 절찬리 땅굴을 파는 와중에도 저 멀리 발자국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이미 지구 내핵을 앞에 두고 있는 동해가 그 소리를 들을수 있을리는 없었다. 기어코 발자국 소리가 자기 앞에서 멈추고나서야 동해는 눈앞에 익숙한 나이키 슬리퍼 - 어라, 어디서 많이봤는데-를 발견했고 몇초가 지나고나서야 자기가 희철의 반문 앞에 앉아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희철이형 반 사람인가보다. 하고 급하게 일어서자 그곳엔
동해?
프린트물을 들고 있는 이혁재가 방긋 웃고 있었다. - 시발 왜 이렇게 잘생기고난리 <이동해의 속마음이었다> - 당연히 선배일줄 알았는데 반장이 서있단 사실에 벙쪄있었다. 아니 것보다 여기 니가 왜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이꼬라지로 만날줄은 몰랐는데, 당황스러운 마음보다 아무래도 쪽팔리는 마음이 더 컸던지라 호다닥 자리에서 일어난 동해가 무슨 일이냐 묻자 선생님 심부름이라며 웃는다. 그렇지, 심부름이겠지 당연히. 무안해진 동해가 자리를 피하려던 찰나 이혁재가 또 동해. 하고 부른다. 이거 마니또가 전해주래. 손에 쥐어진걸 보는데 매점 특제 소시지빵이 들려있다. 이거 사려면 줄서서 사야하는데.
저번에 초콜릿 별로 안 좋아하는거 같길래... 이번에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다더라. 맛있게 먹어! 고맙다는 말도 미처 덧붙이기 전에 이혁재는 사라졌고. 동해는 이혁재가 사라진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고맙다는 말도 못했는데..... 조금 상기된 귓가는 덤이고.
*
내 마니또 이혁재 친구인가봐 그치.
그렇게 부탁할정도면 되게 쫌 아니 많이 친하겠다 그치. 이혁재에게 -정확히는 마니또에게 부탁받은 이혁재에게- 받은 소시지빵을 오물거리며 옆자리에 앉아 쫑알거리는 동해의 말에 규현은 규칙적으로 어. 어. 고개를 끄덕이다 정수리에 시원한 죽빵을 갈기는 동해에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시발 이번엔 또 왜!
그냥 짜증나서.
시발....
규현이 눈물을 달고있거나 말거나 동해의 관심은 온통 분단 앞자리에 쏠려있었다. 쉬는시간이면 이혁재랑 이혁재 친구들이 모여서 얘기하고 있는 거기. 아무래도 미안한데 이혁재에 대해서 아는건 정말 하나도 -정말정말 미안하지만- 없기도하고... 뭐 간식거리라도 챙겨줄까싶어 귀를 기울이면 무슨 취향이라도 하나 떨어질까 싶어 귀를 기울이는데 영 시덥잖은 이야기들뿐인것이 허탕이었다. 뭐 이번에 게임이새로나왔는데 피씨방이나 가자던지, 새로생긴 떡볶이집이나 가자던지. 그나저나 내 마니또는 관심이 되게 많나보다. 어떻게 초콜릿 못먹는거 까지 알았대.
이혁재의 대화에 집중하기도 잠시 슬슬 지루해지려던 통에 그만 규현을 이끌고 매점이나 가려던 찰나
이혁재 넌 딸기우유만 먹냐 커피는 안마시고?
몰랐어? 얘 커피 안좋아해서 맨날 딸기우유만 먹잖아.
오호라, 딸기우유를 좋아한단 말이지?
*
6월 4일
첫 선물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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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일기장에 쓴게 어젠데. 7교시가 다 되어가도록 이동해는 선물을 주지 못했다.
이 똘추새끼.....
이혁재에게 남길 편지에 무슨말을 쓸지 고민하다가 전날 꼬박 밤을 샌지라 아침부터 헤롱헤롱하긴했는데 잠시 눈감는다는게 하루내리 잘줄은 몰랐지뭐야. 진짜 딱 5분만.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점심시간에 5분만 눈 붙이게 조규현한테 깨우라고 시켰던게 방금같은데 분침이 4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5교시부터 오후 내리 잤다는 얘기잖아? 아마 려욱이랑 문자질하느라 정신이팔려서 지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쳐자는지 안자는지도 모르고 있었겠지 이 의리없는 새끼.
벌써 마니또 시작한지 나흘인데.... 내일 얼굴을 보면 면상에 죽빵을 날려주리라 다짐하며 이동해는 이혁재 사물함을 열었다. 와.... 누구 사물함아니랄까봐 하나같이 단정한거봐. 어디 사는 정리안된 누구 사물함과는 영 딴판이라 이동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거에도 쫌 설렌다고하면 쳐웃으려나? 생각에 빠지기도 잠시 누가보면 오해할만한 그림에 동해가 딸기우유와함께 편지를 집어넣고 자리로 가려던 찰나였다.
뭐하고있어?
아시발 혁재야. 등 뒤에 서있는 혁재에 이동해는 딸꾹. 숨을 잘못 쉴뻔했다. 어. 어어. 아년. 아니 안녕!
응 안녕, 근데 여기서 뭐해?
정말 악의없는 물음에 동해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내가 니 마니또고 존나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3일동안 선물을 줄까말까 고민하면서 땅굴파다가 이제 니 사물함에 넣고 오던 참이야!라고 어떻게 말해 시발. 이동해는 이혁재의 사물함 위에 놓여있던 제 핸드폰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아니. 그. 아까 조규현이랑 장난치다가 여기 놔뒀, 놔둬서. 하하 여기 있는지도 까먹었지뭐야! 나 당황하면 말 많아지는데. 티났나? 허허 웃으며 눈치를 보는 동해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던 혁재는 사물함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든 넘어갔다.... 이사이에 대충 챙겨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동해가 가방을 챙기던 동해의 등뒤로 목소리가 들렸다.
어? 딸기우유.
혹시 동해 네가 이거 넣어놨어?
딸꾹.
이, 이런 전개는 생각 못했는데! 어어, 그거 누가 부탁했어. 니 마니또가. 응. 걔가 부탁해서. 이미 지구를 탈출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멘탈과는 달리 잘도 술술 나오는 말에 동해는 감탄했다. 나 의외로 임기응변에 강한가봐 예능이라도 하나 나갈까봐. 이번에는 이혁재는 동해를 빤히 쳐다봤고, 이동해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피했다. ..그래? 그렇구나.... 이런 전개도 상상못했고. 예상외로 순순히 넘어가는 이혁재에 이동해는 그 큰 눈을 꿈벅 감았다떴다. 알았어. 그친구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내일 보자. 어, 그래.... 제 대답도 듣기전에 교실을 빠져나가는 혁재에 동해는 바보처럼 손만 흔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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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조금 실망한거처럼 보였던건 기분탓일까?
-6월 5일
*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동해와 혁재가 딱히 마주칠 일은 없었다. 원체 맞닦뜨릴 일도 없기도 했고, 둘 다 동선이 안 맞기도 했던 이유도 이유였다. 그냥, 가끔씩 자다가 발표같은게 걸리면 깨워주고 몇페이지 몇줄인지 알려주는 정도? 대충 짝지가 그렇듯이 적당히 친절했고, 대개 반장이 그러하듯이 중요한 공지나 그런게 있으면 포스트잇에 적어서 책상에 올려두고 갔다. 대개 짝지나 반장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혁재가 그랬으니까 대충 그렇지 않을까? 그 동안 마니또에게서는 몇번의 선물이 도착했고 - 내가 생각나서 산 돌고래 모양 열쇠고리라던지 이번에 새로 매점에 들어온 빵이라던지 따위의 것들 - -돌고래 열쇠고리는 잘 달고다니고 있다- 나는 이혁재에게 고작 시그노펜 - 자주 쓰는거 같길래 그리고 필기할때 많이 쓴다길래- 이라거나 딸기맛 와퍼 - 매점에서 인기가 많다길래 - 를 남긴것 밖에 없었다. 미안한데, 나 정말 너에 대해서 아는게 없거든. 전날 밤이라도 샜는지 보기 드물게 엎드려자는 이혁재를 가만 바라보던 동해가 저도 책상에 몸을 기댔다.
.... 네가 내 마니또면 좋을텐데.
그럼,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언젠가 가볍게 물었떤 조규현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뭐가 달라지진 않는데 그냥. 그냥......
그럼 좋겠어서. 속으로 대답하고 동해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가방에서 딸기우유를 꺼내 혁재의 옆에 놔두고는 교실밖으로 나갔다.
*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서.
....근데 이혁재는 누구 마니또일까?
-6월 9일
*
6월 12일
오늘은 비가 왔다.
*
이걸 어쩐다. 아침 일찍 급하게 튀어나오는 바람에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어쩐지 소나기라도 내릴듯 시뿌옇던 하늘은 개기는 커녕 시원하게 비를 쏟아내리고 있었고 이미 밖은 어두워진지 오래였다. 장마는 다음주부터라더니 개 구라였어 시발. 며칠전만해도 해맑은 햇님 그림을 띄우며 맑은 한주를 그리던 일기예보를 떠올리며 속으로 개 쌍욕을 씹던 동해는 하복 상의를 벗었다. 우산도 없는데 하복이라도 벗어서 대신 들고 뛰면 덜 젖지 않을까 하는 심산이었다. 어차피 금요일인데 뭐... 젖는거 정도야 상관도 없었고. 가방도 앞으로 돌려매고 마친채 운동화까지 꺾어 신고 중앙현관을 튀어나가려던 찰나 옆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우산에 이동해는 심장을 뱉을뻔했다. 왜냐하면...
우산 안 가져왔나보네.
그건 이혁재 거였거든. 시발 반장인지도 모르고 육두문자 튀어나갈뻔. 어어, 그렇긴한데.... 아까부터 부담스럽게 제 옆에 펼쳐진 우산을 흘끔, 이혁재를 흘끔 보던 이동해의 눈빛을 알아챈 듯 아- 하고 덧붙인다. 너 쓰고 가라고.
꿈뻑. 나?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인다. 나?? 진짜?? 나한테 왜?? 믿기지 않는듯한 눈빛으로 다시금 두번 저를 가리키자 두번 고개를 끄덕인다. 왜???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인과관계가 납득 되지 않는 말에 이걸 왜 주냐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이혁재는 이동해가 좋아하는, - 그렇지만 본인은 알지 못하는 - 입꼬리를 올려 씩 웃는다.
" 짝꿍이잖아. "
이혁재는 정말 그 말만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그 뒤를 따라 뛰는데 정문에 다다랐을때 이미 이혁재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 집 가까운데... 아니 가까운건아니고 쪼끔 진짜 쪼오금 걸어서 한 30분정도 걸리긴하는데... 무심코 뺨을 따라 흐르는 땀을 훔치는데 스치는 뺨이 약간. 아, 혹시 나 얼굴 빨개졌나?
*
내일 뭐라도 줘야겠다.
...근데 짝지를 이렇게 챙겨주나 원래?
*
마니또 미션?
웅, 내일 마니또 마지막 날이잖아. 그래서 그거 기념으로 이벤트 하나 한다던데
너 또 안듣고 잤지? 역시 0해~ 왠지 모를 데자뷰가 느껴지는건 기분탓일까? 규현은 어김없이 정수리에 주먹을 맞았고 또 눈물을 눈꼬리에 매달았다.
학교 곳곳에 숨겨진 키링을 찾아서 마니또한테 갖다주라더라.
그러면 뭐가 좋은데?
몰라. 그냥 별 말 없던데?
뭐 마니또한테야 얘가 날 이정도로 생각해주는구나~ 이정도겠지 뭐. 그런 려욱의 말 하나에 아침부터 쉬는시간마다 뛰쳐나와 학교 곳곳을 헤집고 다니던 동해였다. 대체 뭐 일 처리는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이벤트에는 진심인 이유가 대체 뭐야? 속으로 학교에 쌍욕을 박으면서도 동해가 가장 열심인 이유는 안그래도 마니또 기간동안 이혁재 한테 뭘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이거라도 챙겨줘야지라는 마음에서 나온거였다. 아니면 내가 미안해서라도 뛰어내릴거같거든... 이미 몇몇 애들은 키링을 가지고 다니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눈에 띄는곳에 있었던 건 다른애들이 다 가져간 모양이었다. 걍 일찍부터 나와서 찾을걸. 아무리 둘러봐도 잘 보이지 않는게 허탕이었다.
남은 거라곤 학교 수영장인데... 나 수영못한단말이야. 딱히 수영장이라고 물에 빠질일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왠지 이런 전개에서는 꼭 물에 빠지는 일이 있단말이지. 왠지 모르게 소름이돋는듯한 기분에 동해가 양팔을 쓰다듬었다.
- 학교를 다 돌았는데 여즉 안보인다고?
- 개에바
-뭐, 혹시 몰라. 수영장 다이빙대에 걸려있다던가?
아주 지 일 아니라고 말 쉽게하는거봐. 려욱과 한창 문자를 주고받던 동해가 고개를 들던 찰나 와, 이게 정말 일어나네. 지금까지 수영장을 뺑뺑 돌던 이동해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반짝, 빛난 키링이 동해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찾던건, 비단 동해만이 아닌듯 했다.
키링이다!!!!
몇몇 애들이 수영장으로 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어, 잠시만. 그거 내건데! 얼떨결에 급박해진 동해는 바닥이 미끄러운 수영장이란것도 까먹고 뛰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사다리 밑에 도착하자 키링을 따려고 허우적대는 애들에 밀려 떨어질것만 같은 와중에도 동해는 악착같이 사다리를 올랐다. 그리고...
잡았다!
어라. 사다리를 짚고있던 동해의 몸이 휘청. 크게 흔들리더니.
이동해!
풍덩. 누군가 수영장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
이동해의 마니또 대소동은 결국 마지막 날까지 본전도 건지지 못하고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결국 개고생한 끝에 키링을 잃어버렸던것도 이유중 이유였고 그 다음날- 그러니까 오늘-마지막 교시를 빌어 대망의 마니또 발표가 있을 예정이었지만 지금 이동해에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물에 빠지기 직전 저를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고 원심력으로 동해는 가까스로 물밖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결과적으로 물에 빠지진 않았지만 대신 저를 낚아챘던 그애가 물에 빠졌다.
꽤 물을 많이 마신거 같더라고.
다행히도 정신은 빨리 차렸는데 혹시 몰라서 병원가보라고 조퇴증 끊어줬다.
그리고 그 애가 이혁재였고. 이동해는 어제 오늘 내내 비워져있던 제 옆자리를 떠올렸다. 수영장 사건 이후로 내내 자리가 비워져있던 탓에 의아해 참고참고, 참다가 결국 담임에게 얻은 답이 그거였다. ...신경쓰이냐? 조금은 무심하지만 그렇게 퉁명스럽지도 않던 담임의 목소리를 동해는 떠올린다.
손에 쥐어진 악필인 글씨-죄송합니다 선생님하지만 진짜 알아보기힘들었어요-로 쓰여진 메모를 다시 내려다보았고. 반장 주소다. 안그래도 인감도장 - 쓸일이 있었다 - 안받아간거 전해줘라. 가서 고맙다고도 꼭 하고.
왜 걔가 거기 있었는데. 그리고 또 왜 나 대신...
뭐 자기도 마니또에게 주고싶었나보지 내지는 반장이니까. 라고 려욱과 규현은 말했지만 왠지 미심쩍은 부분이있었다. 물론 혁재가 다정하고 착하고 반장으로써 모범적이고 그렇긴하지 아니. 주접은 아니고 하.... 맞는 말인데. 맞는말이야 그런데 그거랑은 다른거 같단 말이야...
뭔가. 뭔가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것 같은 느낌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걷기도 잠시. 이미 혁재의 집앞이었다. 짧은 찰나 이혁재 얼굴 보면 어떻게 말하지부터 뭘 물어볼까에 이르기까지 많은 질문이 스쳤지만 ....결국 그 답도 직접 물어봐야 아는걸거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다. 심호흡을 들이쉬고 초인종을 누르지만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집에 없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해?
이혁재가 눈앞에 있다. 편의점이라도 다녀왔는지 사복차림에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지를 들고 있는데. 편한 옷인것 같으면서도 나름 센스있는게 잘 어울렸다.
...안녕. 몸은 좀 괜찮고?
초인종이 고장나서... 많이 기다렸지. 연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이혁재다웠다. 다정하고, 친절하고. 또.... 상냥한 그 말투. 이혁재다운. 그런. 웃으며 작게 도리질친다. 아니, 혁재야. 할말이 있어서 왔어. 물어보고 싶은것도 있고.
그. 내 말이 좀 존나 개 궁예같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혁재야. 내 마니또가 너인거 같거든?
개 근거없고 그런건 아는데... 근데.
니가 내 마니또였으면 좋겠어.
그리고....
어떤것 같애?
어?
어떤 것 같냐고.
가만히 듣다가 저를 향해 묻는 말에 동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곧 제게 저벅저벅 다가오는 이혁재에 화들짝 놀라는데 제손에 뭔가를 쥐어주기만하곤 봐. 하는 말에 천천히 손을 펴보자 그곳엔
...키링?
이거 너 주려고 찾아다녔었는데. 네가 없는거야.
그래서 돌아다니다가 수영장까지 갔는데. 네가 물에 빠지려고해서.
근데 , 그거 네가 내 마니또라서 그랬던거만은 아냐.
...... 그게 무슨 뜻이야?
혁재는 말 없이 웃는다. 한동안 이해를 못해서 멍하니 서있다가 뒤늦게 이해하자마자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 아 어떻게해....뭘 말해야할지 몰라서 입만 뻐끔.뻐금 하는데 시야에 들어온 그 애의 멋쩍게 웃는 귓가가 새빨개서. 아. 미치겠네. 어느새 제 귓가도 달아오르는게 느껴져서. 다시 땅으로 고개를 쳐박는다. 그런 제 머리위로 푸슬푸슬 낮게웃는 그애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녁 먹고 갈래? 마침 저녁 시간이었는데.
아이스크림도 먹고 가도 좋고.
그리고 혁재는 제 손을 잡아온다. 저보다 한마디 정도 더 큰 손이 제 손을 잡아온다.
...응. 좋아.
*
6월 14일
그리고 너도 ( 지우개로 지워져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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