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코앞으로 푸른 물결이 한가득 밀려든다.
하나, 둘, 셋.
두둥실 올라온 파도에 천천히 눈을 뜬 소년은 물살을 가르던 손을 거둔다. 사뿐히 몸을 일으키곤 곧바로 무릎을 굽혀 균형을 잡은 다음, 바다가 움직이는 흐름에 발을 맞춘다. 물 위를 오가는 몸짓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짠 내음 가득 묻은 바람이 젖은 머리칼을 스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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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날 있잖아요. 늘상 봐왔던 익숙한 풍경이 갑자기 낯설게 다가오는 그런 날 말이에요. 분명 평소와 같은데 하나도 이상한 점이 없는데 어딘가 묘한 구석이 든 적 있지 않아요?
그날의 바다가 제겐 그랬어요.
물론 불어오는 바람이나 밀려드는 파도는 조금씩 다르죠. 어떻게 그게 항상 같겠어요? 당연한 것 말고 분위기를 말한 거예요. 뭐랄까, 음. 그냥 딱 느껴졌어요. 미묘한 그 느낌이요.
막 심각한 건 아니었어요. 오늘은 정신 빠짝 차려야겠단 생각이 들 뿐이었죠. 파도를 좀 타다 보면 대충 감이 생겨요. 물살 딱 보고 지금 가면 되겠다, 세니까 나중에 가야겠다, 바로바로 나오거든요. 이건 감이 아니라 당연한가? 여하튼 그런 류인 줄만 알았어요. 파도가 약간 높으니 조심하라고 내가 나한테 주는 경고인갑다 싶었어요.
제대로 헛다리 짚었죠.
아니다. 반은 틀렸고 반은 맞았네요.
전 정말, 무지하게 신경 썼어요. 스쳐가는 생각이라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바다에선 까딱하면 큰일나는데. 작년이었나? 단체로 파도 타러 갔다가 한 선배가 휩쓸렸었어요. 보드만 둥둥 떠다니길래 진짜 식겁했다니깐요. 수영은 잘해서 다행이었지.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피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다 했어요. 사실 안 하는 게 제일 안전하지만 타는 재미를 아니까 포기가 안 되던걸요. 바람 방향, 파도 세기, 물 온도, 보드 상태까지 거듭 확인했어요.
•••.
정작 물속에 그런변수가 있을 거라곤 상상이라도 했겠어요? 그 누구든?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손에 닿기까지 했지만 정말 꿈인가 싶어요. 직접 보고 만진 저도 꿈만 같고 생경한데 말로만 듣는 사람들이 믿겠어요? 헛 걸 본 거라고 물귀신에 홀렸다고 그러지. 뻔하죠 뭐.
전 헛 걸 본 게 아니에요. 귀신에 홀리지도 않았어요. 차가운 바닷속에서 잡은 손이 따뜻했거든요. 이것만은 확신해요. 아니, 확실해요. 온기를 느꼈어요. 그 손에서.
자세히 말해달라고요?
파도 잡고 잘 가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보드가 기울었어요. 누가 건든 마냥 휘청하지 뭐예요. 거기다 물결도 급히 요동쳐서 못 따라가고 풍덩. 그대로 엎어졌어요. 황당했죠 참. 이랬던 적이 없건만. 느닷없이 빠진 탓에 당황해서 막 허우적대는데 그 애가 나타났어요.
나타났다기보단 시야에 들어왔다고 해야 맞겠네요. 가만히 서서 절 빤히 보더라고요. 그 애 짓이었나봐요. 양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눈은 웃고 있었거든요. 귀신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장난 치길 좋아하는 물귀신이구나, 이대로 걸려서 죽는구나 온갖 생각이 들던걸요.
몸은 뻣뻣하게 굳어서 말을 안 듣고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어요. 그런데 귀신인지 뭔지 모를 애가 팔을 불쑥 내밀더군요. 잡으면 확 끌어내려져서 영영 못 나올까봐 멀뚱히 보고만 있었죠.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그 애가 인상을 쓰면서 손을 콱 잡아챘어요. 따뜻한 손이었어요. 정말로. 비유가 아니라 진짜. 사람한테서 느껴지는 따스함 있잖아요. 그리고 요상하게 몸도 가벼워졌어요. 더 내려가지도 않았고요. 그제야 다리를 마음대로 가눌 수 있더라고요.
왠지 모르게 편안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서야 귀신은 아니겠거니 싶었어요. 귀신이었음 도와줄 리가 없죠. 내버려두거나 더 골렸음 골렸지.
그동안에 그 애는 저를 계속 보고 있었어요. 손 잡은 그대로 한 마디도 않고 쳐다보길래 좀 어색하더라고요. 말을 먼저 붙여야 하나 고맙다 인사를 해야 하나 싶어서 고개를 딱 들었는데, 그 애와 시선이 맞닿았어요.
바다를 느꼈어요. 그 눈에서.
파란 바다 말고요. 밑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빛이 닿지 않아 어둡잖아요. 그 애 눈이 그랬어요. 깜깜한 바다를 옮겨놓은, 아주 새카맣고 깊은 눈이었어요. 진짜 빨려들어갈 것 같았어요. 다른 걸 할 수가 없었어요. 그 애 눈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밖에는.
귓가에 물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시간이 멈춘 듯 했어요. 저랑 그 애 둘만 이곳에 존재하는 것처럼요. 이 정도면 물귀신에 홀렸다 해도 할 말이 없네요. 그치만 누구라도 바다 한가운데서 그 애 눈을 마주한다면 저처럼 됐을걸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문득 숨을 못 쉬고 있단 걸 깨달았어요. 그 애도 저도. 그 애는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전 아니었어요.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고 눈 앞이 핑글 돌았어요. 시야가 점차 흐려지는 중에 그 애가 다가오는 게 보였어요.
뭘 말했는데 안녕, 이었나? 말소리가 안 들려서 입모양을 읽어야 했어요. 입술에 뭐가 닿았던 거 같기도 하고. 멀어지던 모습은 얼핏 기억나요.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어요. 웃는 얼굴이었는데 슬퍼 보이더라고요. 처음과는 달리.
눈 깜빡하고 정신 차려보니 모래밭에 누워있었어요. 파도에 떠밀려서 왔겠죠. 누가 신고했는지 구급차가 와서 지금 이렇게 병원에 있고.
여기까지예요 제게 있었던 일은. 믿어지세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정말 일어난 그대로, 보고 느낀 그대로 다 얘기했어요.
뭐, 믿지 않아도 상관 없어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
사실 자꾸 그 애가 생각나요. 대체 정체가 뭘까요?
왜 그곳에 있었고 왜 나한테 그런 장난을 쳤을까요? 어떻게 바닷속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움직일 수가 있죠? 그냥 물에서 태어나서 쭉 산 사람 같았어요. 혹시 인어를 본 걸까요? 겉모습은 저랑 똑같았는데.
그 눈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깊은 어둠을 닮은 두 눈이요. 실은 전부 다 생각나요. 작지만 따뜻한 손도, 옅게 웃던 미소도. 닿을 듯 말 듯 그려져요.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걸까요?
거기 그대로 있다면, 아직 안 떠났다면 또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저 가봐야겠어요. 가야겠어요. 그 바다로.
심신 안정이요? 저 정말 괜찮아요. 에이, 물에 잠깐 빠진 그거? 트라우마 남을 정도도 아닌걸요. 이제 가봐도 되죠?
못 들어가요? 수색 중이라고요?
같이 온 사람 없어요. 전 혼자 왔는데요?
•••.
잠깐만요. 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마지막 모습이라뇨. 아니. 제가 본 건 뭔데요 그럼.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 애가 저랑 같이 온 그 사람이라고요?
•••.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저 지금 꿈속인가요? 아님 몰래카메라예요? 뭐야. 하나도 재미없어. 아닌 거 다 알아요. 장난치지 마세요.
기억 회피? 뭐라는 거야. 그만해요 진짜. 놀리는 것도 정도껏이지. 저 갈래요. 이상한 말 하지 마시고 좀 비켜주세요.
모른다고요. 몰라요. 뭔 경위 파악을 한다고. 저 빨리 가야해요. 나와요. 그 애 사라지면 어쩔건데요. 왜 못 가게 막아요? 비키라고요. 아, 진짜. 내가 봤다고요. 내가. 좀, 놔보라고 이거ㅡ
.
.
.
일순간 물살이 변덕을 부린다. 소년은 차마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갸우뚱 몸이 기울고 균형을 잡으려 팔을 휘두르지만 몸은 이미 바다에 닿은 후다.
하얀 물거품이 잘게 인다. 깊은 바다는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소년은 이내 눈을 감는다. 맞아. 그래. 그랬었지. 짙게 자리했던 어둠을 마지막으로 생각한다.
하나, 둘, 셋.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파도는 잠잠하다. 푸른 물결이 눈부시도록 쏟아진다. 짠 내음 가득 묻은 바람이 시린 손끝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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