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반복 재생 추천
*약수위 주의 요망
https://www.youtube.com/watch?v=PFEWbDdFl3M&feature=youtu.be
아빠는 말씀하셨다. 너무 작은 것들까지 사랑하지 말라고. 작은 것들은 하도 많아서 네가 사랑한 그 많은 것들이 언젠가는 모두 널 울게 할 테니까.
나는 나쁜 아이였다. 아빠가 귀에 박히도록 그 말을 읊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입었던 옷가지들을 같이 사용하던 소파에 올려놓던 너를 사랑했고, 네가 준 갈색 끈이 예뻤던 여름 슬리퍼를 사랑했고, 무작정 나에게 통보하듯 사랑한다는 말을 던지던 너를 사랑했으며, 네가 사랑하던 사소한 것들 전부를 사랑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같이 쓰던 소파가 아닌 네 런닝머신 위에 옷가지를 걸어두기 시작했을 때, 네가 준 갈색 샌들이 낡고 닳아 버려야했을 때,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멈추기 시작했을 때, 네가 사랑하던 사소한 것들이 더 이상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마다 난 울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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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변했어."
이혁재에게는 중증 고질병이 하나 있었다. 사람의 말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거였는데, 처음 만났을 적에는 뭐 하나 제대로 들어 처먹는 게 없어 대화 중에 여간 곤욕을 치르는 게 아니었다. 온갖 사람이 다 달라붙어 이 습관을 뜯어 고쳐보려 노력한 모양이었으나 아무도 이걸 못 고쳤다. 나 이제 변하려고. 연애 초반에 이혁재가 그랬다. 변한단다. 실제로 그는 그 빌어먹을 고질적 습관을 죄 뜯어 고쳐 주변인들의 의구심을 보기 좋게 짓밟았다. 그러나 근 15년만에 걔는 한 번 더 변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거기에 5년이나 더 지났으니 사람 하나 변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내심 속으로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응, 뭐라고? 못 들었어, 나."
"아냐, 별 말 안 했어. 하던 거 해."
내용물이 반쯤 남은 거품 빠진 콜라캔을 타고 물기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식탁 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아 타고 내리는 물방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것들을 손톱으로 살살 문질렀더니 차가운 냉기가 손 끝에서부터 손가락 전체에 흩어졌다. 한참을 떨어지는 물방울만 응시하다가 이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양팔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데 이런 답답한 기분은 뭔데....... 틀어둔 티비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 아이돌 그룹의 낭랑한 꾀꼬리 목소리가 어색한 적막의 틈을 파고들어 허공을 유유히 배회했다. 소파에 모로 누워 다리를 쭉 뻗고 내내 핸드폰만 응시하던 이혁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다.
"나 이제 잘 건데 너 안 자냐?"
"이따가. 뭐 생각 좀 하고."
"야, 넌 무슨 생각을 맨날 그렇게....... 됐다, 늦지 않게 자."
무심한 말이 귀에 박히자마자 문득 심장 한 켠을 쿡쿡 찌르는 듯한 따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심장에 얹고 허리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더니 뒤통수에 시선이 와닿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일까? 아니면 무심한 표정일까? 알 수 없었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살갗 위로 타인의 것임이 분명한 온기가 번졌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툭툭 건드리는 것마냥 불편한 정도였는데, 등팍 위로 손이 닿자마자 목구멍에서부터 내려온 커다란 추가 심장을 누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제발 그냥 가서 자."
헐떡이는 숨소리 너머로 주저하는 듯한 두 쌍의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조금 망설이다시피 뚝뚝 끊겨 들리던 발소리는, 곧이어 방문을 뒤로한 채 사라졌다. 어설프게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무어라 말 한 마디라도 더 하고 보낼 걸,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러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손톱이 여린 살결에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고서 눈가를 북북 문질러 닦았더니, 소금기 어린 눈가가 시리도록 쓰라렸다.
"잘 자, 혁재야."
목을 두어 번 가다듬고 조금 큰소리로 방을 향해 외쳐보았으나 방문 너머는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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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변했어."
"응, 뭐라고? 못 들었어, 나."
"아냐, 별 말 안 했어. 하던 거 해."
또, 또 저런다. 들려오는 낯선 말에 이혁재는 짐짓 못 들은 체를 하고서는 다시 물었다. 변한 건 이동해겠지. 내가 아니라. 숨이 턱턱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동해는 자주 그랬다. 속상하다는 티란 티는 죄다 내놓고서 무엇이 문제냐 물으면 울먹이는 목소리로 됐다며 말을 자주 얼버무렸다. 쟤 저러는 건 절대 못 고쳐. 몇 년 전 술자리에서 최시원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당시에 거나하게 취했던 나는 두고 보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내가 쟤 꼭 사람 만들겠다고. 내가 쟤 어떻게든 바꿔놓겠다고. 그날 난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이동해 집 앞까지 가서 딱 두 마디 했다. 넌 나를 변하게 만들어. 너도 나 때문에 변했으면 좋겠어. 술김에 지나치듯 봤으므로 당시를 제대로 기억할 수는 없었으나, 영화 속 테이크 마냥 뚝뚝 끊겨 떠오르는 기억 속 이동해 얼굴은 불 타는 토마토처럼 시뻘겠다. 그 말 두 마디를 뱉자마자 제 큰 어깨를 이동해의 품 속에 마구잡이로 구겨넣고 그대로 잠들었었더랬다. 이동해는 맨날 그 말을 했다. 그때 자기는 심장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고. 심장 소리 때문에 내가 깰까 봐 그렇게 서서 한 동안 움직이지 못했단다. 등신. 심장은 그렇게 쉽게 안 터져. 이 소리를 할 때마다 이동해는 왼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는데, 난 그걸 퍽 좋아해 나중 가서는 시도때도 없이 그 말을 했다. 멍하게 소파에 누워 쨍하게 빛나는 핸드폰 액정만 하염없이 들여다 봤더니 눈이 영 침침한 것이 근래에 잠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이동해부터 찾았다. 식탁 위로 뵈이는 어깨가 유난히 작아보였다. 말을 고르고 골랐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이 그토록 많았는데, 근 1년만에 우물쭈물 서서 할 말을 고르는 제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나 이제 잘 건데 너 안 자냐?"
애처로운 눈빛을 보니 죽고 싶어졌다.
"이따가. 뭐 생각 좀 하고."
며칠 동안 잠을 설치던 것이 못내 신경이 쓰여 나름 고심해서 뱉었던 말이 대차게 까였다.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는 걸 억지로 달래 씻기고 재우고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쩜 얘는 한 번도 변하지를 않나, 싶었다. 이번에는 오기가 생겼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내리 눌렀더니 귓가가 화끈화끈했다.
"야, 넌 무슨 생각을 맨날 그렇게....... 됐다, 늦지 않게 자."
뒤돌아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등 뒤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뒷덜미가 빨갛게 달아 더운 숨을 뱉는 이동해를 보고 습관적으로 유난을 떨 뻔했다.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목구멍으로 삼켜 넘기고는 엉거주춤 손을 들어 미미하게 떨리는 등 위에 얹었다. 솔직히 말하건데, 사실 고민 많이 했다. 이동해는 아마 평생 모를 거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 못할 거다. 괜찮다며 손을 애써 뿌리치고 비틀비틀 일어서는 그 등을 보는 기분을, 그 뒤에 그림자 마냥 서서 함께 외줄을 타는 것을 온전히 목도하는 자신의 기분을 아마 이동해는 평생 모를 거다. 괜찮아? 상투적인 예사말을 던졌다. 뒤에 나올 답은 불 보듯 뻔하다.
"괜찮으니까 제발 그냥 가서 자."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눕고, 침대 위에 누워 어두운 천장 주위를 떠다니는 아지랑이를 한참이고 쳐다보다가, 이내 그 아지랑이가 다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잠은 오지 않았다. 밖에서 어렴풋이 잘 자, 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대답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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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알잖아....... 나 거기 못 나가."
오전부터 이혁재가 한창 통화 중이다. 나를 봤다가, 다시 정면을 봤다가. 발 밑을 보다가. 다시 나를 봤다가. 저 미안함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 아, 싫다. 이혁재가 나를 처치 곤란의 낡은 소파 마냥 쳐다 볼 때면 몸 반쪽이 죄 뜯겨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앞에 놓인 밥그릇 맨 위의 쌀 몇 톨을 보란듯이 깨작거리는데도 오는 말이 없다. 오는 말이 없으니 가는 말도 없는 것은 당연한 순리다. 밥이 차갑게 굳어 꼬들꼬들하다 못해 딱딱해질 즈음 사뭇 아쉬움이 남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전화를 끊은 이혁재가 식탁으로 다가온다.
"뭐야?"
"아, 뭐 그냥 별 거 아냐."
그리고 한참 동안 더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별 거 아니라는 말 한 마디에 애초에 존재치도 않았던 밥맛이 뚝 떨어졌다. 밥풀을 뒤적이던 젓가락을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는 물컵을 꺼내 정수기에 가져다 대었다. 불과 120mL 정도 될까 말까 한 극소량의 물이었는데, 정수기의 아른거리는 빨간 불이 꺼지기까지 엉겁의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았다. 쪼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물컵 속으로 떨어지는 투명한 물줄기를 쳐다 봤더니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졌다.
"나 15일에 잠깐 나갔다가 와도 돼?"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이혁재였다. 솔직히 나, 까지만 듣고 적잖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근 며칠 간 대화를 먼저 시작한 쪽은 이혁재가 아닌 제 쪽이었다. 그런데 그러고서 하는 말이 15일이 나갔다 오겠다는 말이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김이 팍 샜다. 어떤 말을 기대했는지 저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오려던 걸 어거지로 참았다. 시큰해진 코를 두어 번 훌쩍였다. 눈까지 문지르면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것만 같아 들릴 생각을 않는 고개를 애써 치켜들었다.
"....... 언제 올 건데."
"그냥. 저녁 먹기 전에."
미미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목소리도 한 번 가다듬을 걸, 싶었다. 우려와는 달리 고개를 들어 마주한 이혁재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걱정이라든가, 하다 못해 의심 또한 읽히지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영 좋지 않은 건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이번에는 말하기에 앞서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이번에는 꽤 청명한 목소리가 나왔다. 참 좋은 일이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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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번에는 좀 와라. 어떻게 얼굴 한 번을 안 보여?"
"야, 너 알잖아....... 나 거기 못 나가."
"알았어. 그래도 생각은 해 봐. 어차피 생일 전날이고, 그날 하루 나간다고 뭐, 대역죄인 되는 것도 아니고."
"알았다. 끊어, 어."
오전부터 연락이 왔다. 이동해는 식탁 한 켠에 꿋꿋하게 앉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한참이고 쳐다 봤다. 아, 귀찮아도 눈 딱 감고 나가서 전화 받을 걸 그랬다. 연애 초반에는 보란듯이 툴툴거리는 것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는데, 요새는 그게 여간 부담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하늘을 질주하는 비행기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한 자리에 머무르지 못한 시선이 이동해를 향했다가, 정면을 향했다가, 다시 발 끝으로 향했다. 근 15년 동안 연말의 개막을 장식하는 시월은 늘 이동해 차지였다. 그애가 딱 10월에 태어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토록 좋아하던 고교 시절 친구놈들과의 약속도 뒤로한 채로 난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자진해서 걜 여기저기 끼고 다녔다. 부러 전화가 끊긴 뒤에도 한참 그 자리에 서서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 있었다.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조금 돌려서 말해 볼까, 생각했다가 뭔가 억울한 심정이 들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마음 먹었다. 핸드폰을 어색하게 한 손에 들고 이동해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젓가락을 들 때까지 걘 말이 없었다. 딱딱해진 쌀알 몇 톨이 젓가락 밑단에 붙어있었다. 이동해는 그걸 입에 넣고 몇 번 빨더니, 이내 소리가 나도록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찬장에서 컵을 꺼내 물을 따라 마셨다.
"나 15일에 잠깐 나갔다가 와도 돼?"
찰나의 순간, 이동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드는 듯했다. 한 동안 대답이 없었다. 이동해는 고개를 수그린 채로 손톱 끄트머리의 거스러미를 한참이고 뜯더니,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언제 들어올 것이냐 물었다. 언젠가는 들어오겠지, 라고 대답하려다 아차 싶어 비교적 다정한 말로 대체했다.
"저녁 먹기 전에."
다음 날이 이동해 생일이니까. 집 들어가기 전에 케잌을 하나 사고, 선물은 백화점 명품관에서 얼마 전에 봐두었던 향수를 사야지. 저녁에는 오랜만에 좋아하는 스테이크나 한 번 먹자고 할까. 아니면 회나 한 번 먹일까. 그간 나 때문에 한 번도 회를 먹지 못했으니까. 퍽 먹고 싶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걸까. 내 생각은 하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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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윽……
입술을 핏물이 배어나올 정도로 깨물었다. 아랫입술이 윗입술에 전부 먹혀 들어갔다. 양손에 단단히 붙들린 허벅다리가 하도 쓰라려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더니 커다란 손이 허리를 억세게 끌어당긴다. 쾌감이 전부 배제된 통증은 매번 겪는데도 영 익숙해질 생각을 않는다. 앞으로 푹 떨궈진 고개를 들어 흐린 눈으로 맞은 편을 응시했더니 뵈이는 것은 도처에 짙게 깔린 어둠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도 이랬다. 처음 몸을 섞었던 날에도 이랬다. 어린 마음에 시뻘게진 낯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통하지도 않을 변명을 빌미로 관계를 갖기에 앞서 방의 불을 전부 껐다. 딱 봐도 온통 티가 날 만큼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혁재는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그날은 나도 울고 이혁재도 울었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몸이 잔뜩 달아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온몸을 비틀던 나를 보고서 이혁재가 더 놀랐었더랬다. 어쩔 줄 몰라 연신 온몸을 쓸어대며 수줍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던 스무살의 이혁재를 기억한다.
"숨 쉬어."
통증을 느낄 때마다 숨을 참는 버릇이 있다. 숨이 막혀 뒤로 훅 넘어갈 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연애초에 섹스를 하다가 한 번 혼절한 뒤로 이혁재는 살을 섞을 때마다 매일 같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 보았다. 그 습관이 죄 고쳐졌을 무렵부터 이혁재는 내 등만 바라봤다. 얼굴을 맞대고 싶었는데도 그랬다. 걔는 참 나쁜 사람 되기는 죽기보다 싫어했다. 이혁재한테 등을 보이는 건 분명 난데, 난 늘 걔 등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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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어."
이동해가 또 숨을 참는다. 근 몇 년 동안 겨우 고쳐놨다 싶었더니, 요새 다시 그러기 시작했다. 온몸이 다 울긋불긋했다. 힘겹게 숨을 들이키며 연신 헐떡거리는 몸을 습관처럼 쓸어댔다. 뱃가죽에 착 달라붙은 팔을 거두었더니 큰 몸이 침대 시트 위에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축 늘어졌다. 이동해는 아무 말도 없었다. 계속 눈치만 보고 있기는 또 억울해서 유세 한 번 떨어 보겠다는 마음 심보로 볼멘 소리를 했다.
"내일 일찍 올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카톡으로 남겨놔."
큰 포부 선언에도 시종일관 침묵 유지다. 드라마 비련 여주인공도 아니고. 저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난 또 무슨 꼴이란 말인가. 모난 구석 없이 잘만 지나간 아홉수가 이제 와서 기승 한 번 부려 보고 싶은 모양이다. 아, 씨발. 담배 피우고 싶다. 끊은지 5년은 다 된 담배가 지금 와서야 떠오른다. 사람을 끊어도 이렇게 되는 걸까. 원래 헤어짐이라는 것이 다, 원래 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등신 같고 비참한 걸까. 간간히 뇌리를 스쳐서 이렇게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고, 헤집고. 참 잔인도 하다. 담배 연기는 속까지 삼키는 거라던데 이번에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연기가 쉼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문득 허기가 졌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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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왔냐?
"간만이네."
오랜만이라는 상투적인 인사라도 한 마디 뱉으려다가 말았다. 간만에 얻어낸 혼자만의 시간을 형식적인 절차로 낭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뱉지 못한 상투적 인사는 친구가 대신했다.
"야, 너. 너 되게 오랜만이다?"
"닥치고 술이나 따라."
이 새끼 왜 이렇게 저기압이냐며 킬킬 웃는 친구놈의 팔아먹은 눈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만도 못한 새끼. 언젠가는 바늘로 저 오만한 성대를 찔러버려야겠다. 눈을 제대로 한 번 흘겨 준 뒤 소주잔에 가득 채워진 투명한 액체를 목구멍으로 금세 흘러 넣었다. 식도가 화끈거렸다.
"얘 간만에 붓네."
그래서 혁재야, 너 진짜 소개팅은 생각 없냐? 좆이나 까라, 씹새야. 건너에서 손바닥이 날아왔다. 눈치 없는 새끼야. 혁재 호모잖아. 얘 걔랑 아직도 사귀어? 어언 15년이시란다. 얼마 못 가 근본 없는 쌍욕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혼자 삼 보 쯤 떨어져 소주 홀짝이며 관전만 하려니까 저딴 것들을 친구라고 데리고 있는 나 자신에게 속된 말로 야마가 돌았다. 잠자코 무게만 잡고 있었더니 조금 쫄렸는지 호탕한 웃음 속에 어색한 기운이 섞여들었다.
"쫄았냐! 눈치 챙겨, 새끼야."
"아, 씨이발. 야, 존나 쫄았잖아, 나."
"빨리 마셔. 자, 한 잔 따라 보시오."
예, 전하. 받으시지요. 금세 좋다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충신의 모습을 답습하는 저 단순함을 보아라. 오냐, 짐이 한 잔 받으마. 한 잔 더 받으마. 이번에는 소맥으로 말아 보아라. 10시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망했다. 저녁 시간 다 지났다. 그래도 우선 내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로.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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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야?'
노란 말풍선 옆에 찍힌 숫자 1은 한 시간 째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띠띠, 띠. 자포자기한 채 핸드폰을 머리맡 선반에 내려놓을 때 쯤 현관에서 익숙한 기계음이 들렸다.
"아, 씨."
현관문이 열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진한 소주향이 훅 끼쳤다. 열이 머리끝까지 뻗칠 줄 알았는데, 우습게 화도 안 났다. 말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비틀거리는 제 모습을 빤히 응시하는 것에 못내 마음이 걸렸는지 이혁재가 짜증 섞인 소리를 뱉는다.
"너 왜 화를 내냐."
"혁재야."
"뭐."
"나 기다렸어."
"……."
"나 기다렸다고."
"……."
싸울 때마다 뚫린 입이 있으면 말이나 해 보라던 이혁재. 벙어리가 되다. 우리의 길고 긴 연애사를 여러 챕터로 나눈 후, 가제를 하나 붙여보라고 하면 이런 이름을 지어 줬을 것이다. 만약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모든 것을 잊고 넘어간다면. 모든 것을 그냥, 그냥 나 하나 악몽 꾼 것으로 치부하고 넘겨버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다음 날부터 새로운 챕터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모른 척 용서하고 넘어가 주는 것만이 진정한 승리라고. 그 사람이 진정한 승자라고. 난 늘 그 말을 인생의 길잡이로 삼아왔다. 이혁재는 그 말이 헛소리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왜 여지껏 몰랐을까. 승리를 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단다. 공고든 철수든 아작을 내버리는 것. 시체를 세멘통에 넣어 황해 바다 어딘가에 버려 줄 청부업자 수소문하기. 지나가다가 벽돌이나 맞으라고 절대신께 기도하기. 기타 등등. 이혁재가 말한 승리라는 것들은 그런 것이었다. 뭐가 있든 간에 이제 다 소용이 없긴 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참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싶었다.
"너와 함께 있는 내가 난 너무 싫어. 못하겠다, 이제. 나 지친다."
"너 왜 그렇게 말을 아프게 해."
"우리 좀 더 솔직해지자, 혁재야. 넌 내 말 때문에 아픈 게 아니야."
"……."
"나도 알아. 이건 비단 네 탓만은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 사과는 하지 말자. 좋았잖아, 괜찮았잖아."
이혁재는 많이 지쳐 보였다. 이런 애를 붙잡고 내가 무슨 말을 더해야 할까. 나도 지쳤고, 이혁재도 지쳤다. 알고 있다. 우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피곤해 보인다. 빨리 자."
벌게진 얼굴로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음을 참는 그애를 뒤로한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아, 우리는 여기까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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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더니 방 안이 푸르스름했다. 날씨를 가늠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커튼을 살짝 걷었더니 창문 틀에 서려있던 물기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더 누워있을 수는 없겠다 싶어 담요를 두르고 거실 밖으로 나갔다. 소파 위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인영 하나가 보였다. 어제 좋지 않은 말을 들은 게 퍽 마음에 걸렸나 보다. 어깨에 두른 이불을 벗어 몸에 덮어 줬더니 이혁재는 낮은 신음을 내며 담요를 끌어올렸다.
밤새 밀린 설거지를 끝내고 막 씻어 물기가 촉촉하게 남은 컵에 이온 음료를 반쯤 따라 휴지로 덮어두었다. 남은 빵이 없어 베이글을 굽고 두툼한 스팸 몇 조각을 썰어 계란 하나와 함께 오래오래 익혔다. 연애 초반에는 늘 먹던대로 베이글 위에 훈제 연어를 같이 얹어 자주 먹였는데, 이혁재는 그걸 좋다고 먹었다. 그 애가 해산물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연애를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서였다. 접시 위에 계란과 스팸, 그리고 베이글을 차례로 옮겨 담았다. 이혁재는 여즉 잠결을 헤매고 있는 채였다. 이렇게 마냥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겠다 싶어 소파로 향했다. 마른 몸을 살짝 흔들어 깨웠더니 이혁재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혁재."
"응."
"나 가."
"어, 어……. 다녀와."
"나 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 줘. 어서."
"이리 와."
눈물도 여러번 참아 보니까 사람 마음대로 되나 보다. 별 것 아닌 일에도 헤프게 물을 흘리던 눈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애석하기도 하지. 이번이 마지막일 텐데. 슬프기보다 후련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알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혁재가 많이 떠오를 것이다. 지워진 단축번호 1번을 하염 없이 누르며 제 선택을 후회할 것이고, 술을 마시고 나면 늘 보이던 너른 등팍을 그리워할 것이다. 횟집 앞을 지날 때에는 콧잔등을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린 채로 웃던 낯이 떠오를 것이다. 자주 가던 돈까스 집에서도, 즐겨 듣는 노래에서, 모든 로맨스 영화를 보며, 적막 속에서도, 심지어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늘, 언제나. 오랜 시간 동안. 아마 운이 좋지 않다면 평생토록.
"고마워, 빨리 다시 자."
"……."
"잘있어."
잠에 취해 정신을 통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몸이 안쓰러워 금방 다시 소파에 눕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적막이다. 집의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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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 사이에 얼핏 들려온 도어락 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 눈을 떴다. 꿈이라도 꾼 건가, 싶었다. 몸을 살짝 일으키자 보일러라도 틀어두었는지 뜨끈한 열기가 훅 끼쳤다. 종일 숨통 하나 없이 꽁꽁 닫혀 있던 집 안에 온기가 가득했다. 더운 공기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창문을 열고 공기청정기를 틀었다. 습한 기운이 다 가시고 약간은 건조한 시원함이 도처에 흐르기 시작하자 허기가 졌다. 식탁 위에는 베이글 두 쪽, 계란 후라이, 그리고 스팸이 담긴 접시와 입구를 휴지로 덮어둔 컵 하나가 얌전히 올려진 채였다. 주말이라 어디 나가기라도 한 건지. 술이 깨니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러고서 어떻게 이동해의 화를 누그러트려야 되는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이온 음료를 들이켰던 것이다. 툭. 메모지 하나가 발 밑으로 떨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걸 읽고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일까. 한참 동안 떨어진 종이 쪽지를 주울 생각도 않고 그렇게 있었다. 약 30초 가량 흘렀을까. 굳어있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트머리가 조금 구겨진 메모지를 완전히 펴내는 데에는 야속하게도 5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침이 다 밝아오고 있었다.
네 덕에 많이 울었다. 그래도 우리 헤어질 때 안아 줘서 고마워. 난 이제 그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려고 해. 너를 아주 미워하려고 했는데 함께한 그 시간들이 너무 예쁘네. 오늘 날씨가 참 좋더라, 혁재야. 좋은 하루 보내. 자고 일어나면 다시 최고의 사랑을 해.
- 이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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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말이 맞다.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들은 언젠가 나를 울게 만든다.
*가장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으로는 피천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 나온 글귀를 차용하였습니다.
*권태기의 과정 속에서 두 인물의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변해가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읽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내용 속 일부분은 필자가 실제로 겪은 경험에 기반하여 충분한 각색 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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