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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이사] Apologize_로원

 

 

 "뭐? 옆집에 누가 이사 왔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말해줄래...?"


 동해를 보는 네 개의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동해는 약간 부담스러움을 느끼는지 잠시 둘의 눈을 피했지만 희철에 의해 제지되었다. 나 보고 똑바로 말해라. 희철의 손을 떼어낸 동해가 희철에게 잡혔던 턱을 잠시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그러니까, 이혁재가 내 옆에 이사 온 것도 맞아."


 아, 저 예쁜 얼굴로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희철의 얼굴을 본 동해가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무언가가 문득 생각난 건지 입에서 조금 이상한 소리를 낸 규현이 동해에게 말을 건네려는 찰나였다.


 "너 진짜구나."


 희철의 맥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에 희철을 바라본 동해와 규현이 희철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시선을 따라가본 곳에는, 저들이 얘기를 나누던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혁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


 어제저녁.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동해의 평화로운 생활은 지속될 것이라고 굳게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생활에 금이 가고, 그 믿음을 단번에 저버린 것은 동해의 집 밖에서 정체 모를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이, 씨발! 도대체 이 시간에 뭘 하는 거야!"


 전날 밤,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마저 쓰느라 밤을 꼬박 새운 것도 모자라 아침 즈음 거의 완성했던 원고를 날려 겨우 멘탈을 붙잡고 거의 오후 두 시까지 마무리를 해야 했던 동해가 귀에 잠을 방해하는 소음이 들어오자 이불을 머리 위까지 올려 뒤집어썼다. 그러나 그 원천을 알 수 없는 소음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동해의 이불은 그 시끄러운 소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화가 치밀어 오른 동해가 이불에 파묻혀있던 제 몸을 일으켜 현관까지 순식간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문을 여는 순간 동해의 잠은 확 깼다.

 동해의 눈앞에 있는 것은 제 옆집으로 짐을 옮기고 있는 혁재였고, 혁재의 눈이 동해의 눈과 마주쳤다. 동해는 몸이 얼어 마치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혁재는 그런 동해를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보다가 제 손에 들린 짐과 함께 동해의 옆집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동해는 생각했더랬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


 카페 안으로 들어온 혁재는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덕분에 잠시 혁재에게 고정되었던 시선들은 혹여나 들킬까 재빠르게 거두어졌다. 희철과 규현이 첩보영화라도 찍는 마냥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을 얼굴 옆에 바짝 붙였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무어라 속닥이기 시작했다. 그런 둘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동해가 다시 혁재가 있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순간 이상한 단말마를 외친 동해를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채로 희철과 규현이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큰 동해의 눈은 얼마나 놀란 건지 더욱 커져있었고 입은 소리를 내뱉은 후 닫지 않았는지 그대로 벌어져 있는 채였다. 왜 그러냐는 듯 동해를 보는 둘에게 알려라도 주려는 듯 동해가 입을 뗐다.


 "눈 마주쳤다...."


-


 혁재와 동해의 관계는 옛 연인,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희철과 규현이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던 이유는 그 둘의 관계가 절대로 좋지 않게 끝났기 때문이었다. 혁재와 동해는 6년 전쯤에 만났다. 정말 우연한 만남이었는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혁재와 편의점에 들어오던 동해가 눈을 마주친 순간, 그 순간이 둘의 첫 만남이자 사랑의 시작이었다.

 둘은 편의점에서 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말 걸고 싶다, 친해지고 싶다, 알아가고 싶다. 더 나아가서 손을 잡고 싶고, 품에 안고 싶고, 입을 맞추고 사랑을 하고 싶었더랬다. 그럼 생각을 하며 둘이 나눈 대화는


 "이만육천칠백 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네, 여기 카드로 결제해주세요."

 "현금 영수증 필요하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가 전부였다. 그 후 두 번째 만남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편의점 안이었고, 혁재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동해는 여전히 손님이었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혹시 애인 있으세요?"


 같은 뜬금없는 물음이 추가됐다는 정도?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이에 딱히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다만 동해의 물음에 혁재는 제법 성실히 대답했다. 애인 같은 거, 없다고. 그리고 동해는 그런 혁재의 대답이 이렇게 들렸더랬다. 애인 같은 거 없으니까 마음껏 다가와달라고.

 그리고 두 사람이 세 번째로 만난 건 편의점이 아닌 길 한복판에서였다. 그날따라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 잔뜩 우울해졌던 동해는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이 우울하면 몸도 축 처진다고 동해 또한 고개를 땅바닥에 닿을 기세로 푹 숙이고 걸었던 탓에 앞에 있던 장애물을 보지 못하고 머리를 들이 박았다. 갑자기 전해진 충격에 놀란 것도 잠시 사과를 하고 그냥 지나치려는 동해를 정체 모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괜찮아요? 앞을 보고 걸어야죠, 고개를 그렇게 숙이고 걸으면 어떡해."

 "네...?"

 "저 기억 안 나세요? 저한테 애인 있냐고 물어보셨는데."

 "아."


 갑자기 저를 붙잡고 말을 걸어오는 탓에 당황한 동해가 적당한 반응을 찾지 못하고 있자 혁재가 동해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동해가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는 편의점에서 일하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저기..."

 "술 한잔하실래요?"

 "술이요?"

 "네, 안 좋은 일 있으신 거 같아 보이세요. 얼굴이 많이 안 좋네."


 동해가 별말 하지 않자 혁재가 다음으로 취한 행동은 제 손에 붙들고 있던 동해의 팔을 당겨 그를 이끄는 것이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조용히 저를 따라오는 동해가 귀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당장 저를 이끌고 함께 도망가 줄 사람을 찾고 있던 것 같아서, 아무라도 저를 위로해줄 사람을 원하고 있던 것 같아서. 그리고 그날 둘은 연애를 시작했다.


-


 "너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것까지야...."

 "그 자식, 너랑 눈 마주치고도 모른 척한 거 보면 그냥 쌩깔 작전인 거야. 너도 그냥 모르는 사람 마냥 대해!"

 "딱히 아는 척할 일도 없을 텐데, 별일 없으면 아마 그렇게 지낼 거야."

 "별일 있어도 그렇게 지내라는 거야, 내 말은!"

 "동해형이 알아서 잘 하겠지, 형이 무슨 엄마야?"

 "알아서 하긴, 그때도..."

 "형.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나 정말 괜찮아."


 꽤 단호한 동해의 말에 희철은 괜히 규현을 흘겨보았다. 내가 뭘 어쨌다고.... 중얼대는 규현에게서 시선을 돌린 희철이 다시 동해를 눈에 담았다. 희철에게 동해는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다. 규현이 제게 동해의 엄마냐고 물었을 때 하마터면 그렇다고 대답할 뻔한 것도 사실이었다. 동해도 성인이고 알아서 연애할 나이인데 제가 괜히 오버를 하나 싶다가도 동해의 눈망울을 보면 그게 또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 희철이 동해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동해는 그것이 저를 너무 걱정해서라고 여기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어찌 됐든 희철이 동해를 걱정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맞으니까. 겨우 희철을 진정시킨 동해가 희철과 규현에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


 집에 도착한 동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아직 부족한 잠을 자는 것이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씻고 옷을 갈아입은 동해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에는, 절대 찾아올 리 없을 것 같던 혁재가 찾아왔다. 동해의 꿈에 나온 혁재는 동해에게 말했다. 헤어지자고, 더 이상 널 감당하기 어렵다고, 네가 싫어졌다고. 그리고 동해가 눈을 떴을 때는 얼굴을 따라 흐른 눈물이 베개까지 적신 뒤었다.


-


 "우리 헤어지자."

 "어? 왜...?"

 "난 더 이상 너 감당 못 해. 힘들어."

 "뭐?"

 "네가 싫어졌어."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너한테 부담이라도 줬어? 네가 날 감당해야 할 일이 있었어? 뭐가 힘든데? 내가 왜 싫은데?"

 "너의 이런 점이 싫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받아들이려조차 하지 않고,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아야 직성이 풀리고. 넌 네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지?"

 "내가 뭐가 문젠데? 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 적 없어. 네 말에 꼬투리... 하, 그걸 꼬투리라고 표현할지는 몰랐는데 그건 그냥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네 말 하나하나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그게 알고 싶었던 거야."

 "그게 나에게는 스트레스였고 부담이었어. 미안, 우리 그만하자."


 혁재가 동해에게 이별을 말했던 날은 비가 쏟아져내렸고 덕분에 동해는 길을 걸으면서 마음껏 울 수 있었다. 눈물은 비에 가려졌고 울음소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그렇게 걷다 도착한 곳이 희철의 가게였고 희철은 그날 이후로 거의 일주일을 꼼짝없이 동해의 병간호를 해야 했다.


-


 잠시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동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물먹은 솜같이 천근만근한 게 몸살이라도 올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 반갑지 않기보다는 예상치도 못했던 얼굴. 그 정도가 적당한 표현인 것 같다.


 "오랜만이네, 동해."

 "이혁재? 웬일이야."

 "알아봐 주네, 고맙게."

 "당연하지, 우리가 몇 년을 같이 지냈는데.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데. 당연히 기억하지."

 "동해야,"

 "미안한데 가줄래? 지금 좀 피곤해서."


 동해의 손에 의해 닫히려는 문을 혁재가 잡아 열었다. 무슨 짓이냐는 듯 혁재를 쏘아보자 그런 동해를 혁재는 무작정 품에 안았다. 동해가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혁재의 한 마디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보고 싶었어, 동해."


 -


 "왜 하필 여기야?"

 "어? 뭐가?"

 "왜 여기로 이사를 왔냐고."

 "동해 네 집이 여기니까."

 "그러니까, 내 집이 여긴 걸 뻔히 아는데 왜 여기로 온 거야?"

 "말했잖아, 보고 싶었다고."


 말이 통하는 듯, 통하지 않는 듯. 동해는 답답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혁재가 동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인상 쓰지 마. 예쁜 얼굴 구겨진다."

 "... 너 진짜 죽여버리고 싶은 거 알아?"

 "몰라. 나 죽이고 싶어?"

 "어, 죽이고 싶어. 너 그날 그렇게 매몰차게 날 차버려놓고 이제 와서 뭐? 보고 싶었다고? 나랑 장난하냐?"

 "장난이라니. 진심으로 보고 싶었어. 동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동해는 혁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가 헤어지자고 말해놓고 이제 와서 옆집으로 이사까지 와서는 보고 싶었다니. 그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너무 보고 싶었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대체 본인이 싫다고 찬 애인이 다시 보고 싶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 동해는 그럴 기력도 없었다. 모든 것이 피곤하고 귀찮았고 몸은 점점 아파왔다. 아무래도 몸살은 확정인 듯 했다. 자꾸만 쿡쿡 쑤셔오는 게 당장 잠이 들지 않으면 더욱 아파져서 잘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때문에 일단 혁재를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야, 너 나가. 너네 집으로 가."

 "너무하네, 동해. 냉정해졌어."

 "내가 날 찬 전 애인한테 실실 웃으면서 너네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쉬다가라고 말할 것 같은 호구로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

 "그치? 그럼 가, 빨리."


-


 어둠이 내려앉아 빛 하나 들지 않는 동해의 방 안은 열기가 후끈했다. 간간이 동해의 기침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몸살감기에 심하게 걸린 것 같다고 느낀 동해가 이불을 둘러쓰고는 몸을 떨었다. 한기가 가시질 않는 것이 열도 꽤 높은 것 같았다. 정신이 몽롱한 채로 너무 아파 제대로 잠에 들지도 못하고 간헐적으로 앓던 동해의 귀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에 뒤따른 소리는 분명 혁재의 목소리였다.


 "동해! 나 할 말 있어! 문 좀 열어줘!"

 "골 아파...."


 머릿속에서 종이라도 치는 듯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동해가 일어났다. 바닥에 두 발을 맞대고 일어서는 동시에 띵하고 아파져오는 머리가 짜증 났다. 열이 끓는 탓에 눈알까지 뜨거워져 뽑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고 걸음을 옮기면서 몸에 오는 자그마한 충격들이 전부 고통이었다. 계속해서 들리는 혁재의 목소리와 문을 두드리며 나는 소리는 동해의 머릿속을 꿰뚫을 것처럼 찔러왔다.


 "너 시끄러...."


 열심히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던 혁재가 문이 열리자 행동을 멈추고 문틈 사이로 보이는 동해를 바라보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발개진 얼굴이 누가 봐도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동해, 너 어디 아파?"

 "알 거 없잖아. 가, 제발."

 "너 아프잖아!"

 "머리 울리니까 소리치지 마...."


 동해의 상태가 꽤 나빠 보였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혁재가 문을 잡아 열자 문에 기대고 있던 동해가 휘청였다. 당장 쓰러질 뻔한 동해를 잡아 끌어안은 혁재가 동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왜 아프고 그래, 마음 아프게."


-


 "으으..."

 "어? 동해, 일어났어? 좀 괜찮아?"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제 집의 천장, 그리고 저를 내려다보는 혁재의 얼굴이었다. 동해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박이는 동안 혁재는 빠르게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떠 가져왔다. 그리고 동해를 일으키고는 마시라는 듯 동해의 입가에 물이 담긴 컵을 가져다 댔다. 몇 모금 물을 마신 동해가 혁재에게 질문했다.


 "너 왜 여기 있어?"

 "기억 안 나? 너 내 품에서 쓰러졌었어."

 "어?"

 "너 열 엄청 났어. 지금은 좀 내린 것 같네. 너는 아프면 병원을 가던가 해야지 왜 미련하게 끙끙 앓고만 있냐?"

 "...."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동해야."


 혁재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럴 리 없는데도 혁재의 그 한 마디에 무언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휘청이는 저를 잡아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해가 혁재를 바라보았고 혁재는 동해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는 눈이 올곧았다.


 "넌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주고, 지금에야 와서 보고 싶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너랑 헤어지고 생각 많이 했어. 너랑 헤어지는 그 순간이 한순간도 빠짐없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고, 내 머릿속에서는 하루에도 수백수천 번씩 그 순간이 재생됐어. 네가 한 말 하나하나가 뇌리 속에 박혀서 잊히지가 않았어. 사실 내가 이기적이었어. 널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지쳤었고, 그런 나에게 실망하는 널 바라보는 게 힘들었어. 그러니까 동해야, 이동해."


 혁재의 손이 동해의 얼굴로 다가갔다. 동해는 구태여 피하지 않았고 혁재의 손은 동해의 볼을 쓸었다. 꼬박 하루를 앓은 탓에 생기를 잃은 얼굴이 혁재의 마음을 헤집어놓았다.


 "내가 너무, 너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사랑해. 너 진짜 사랑해."

 "혁재야...."

 "사랑해. 내가 미안했어, 정말. 널 사랑했는데 그걸 말하는 게 어려웠나 봐. 처음 느꼈던 그 설렘이 사라지는 게 무서웠나 봐. 네가 내 진짜 모습을 보고 떠나버릴까 두려웠나 봐."

 "사랑해."


 동해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흐느끼 듯 말하던 혁재가 눈을 크게 뜨고 동해를 바라봤다. 무언가 할 말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동해의 사랑한다는 한 마디에 혁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없었다. 그저 동해였다. 제 눈앞에 있는 것도 동해였고, 제 머릿속에 채워진 것도 동해였고, 제 손에 만져지는 것도, 제게 사랑한다고 말해온 것도, 전부 동해였다.


 "사랑한다고, 이혁재."


 동해가 말을 끝맺기 무섭게 혁재가 동해를 끌어안고는 입을 맞췄다. 제 잘못을 반성하려는 듯, 동해에게 사과하려는 듯. 동해가 혁재를 받아들였고 동해의 방 안은 다시 열기로 가득 찼다. 동해의 것만이 아닌, 혁재와 동해 둘의 것으로.


-


 "진짜 짜증 난다, 너네."

 "좀 재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희철과 규현의 따가운 시선이 닿자 옆으로 얼굴을 돌려 둘의 시선을 피한 동해가 멋쩍게 웃었다. 그런 동해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는 혁재를 바라보는 희철과 규현만 괴로울 뿐이었다.


 "내가 이런 거 뭐 예쁘다고 걱정을 했는지."

 "그러게 내가 동해형 걱정하지 말랬잖아. 알아서 잘 한다고."

 "뭐가 예쁘긴, 전부 예쁜데."


 혁재의 말에 충격받은 듯 희철과 규현은 차마 욕도 뱉어내지 못한 채 입을 벌렸다. 동해는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줬지만 혁재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예쁜 건 사실이었으니까. 희철은 제 목덜미를 잡고 규현은 토를 하는 시늉을 하자 동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동해를 보며 혁재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너무나 예뻐서, 사랑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그 웃음은 영원히 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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