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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졸업] 늦겨울과 새봄_이랑

늦겨울과 새봄

#월간은해 #2월호 #졸업

이랑




0.


그 애는 항상 교실 맨 구석,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았다. 혼자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매년 학기 초에는 다른 아이들이 옆에 앉아 말을 걸며 나름 친해지려 노력했으나, 그 애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1.


어쩌다 보니 나는 그 애와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출석번호도 항상 앞뒤로 붙여서. 때문에 청소 주번이라던가, 각종 수행평가 따위를 할 때 나는 항상 그 애와 짝이 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히 그 애가 불편해할까 싶어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애는 항상 짧은 고갯짓, 혹은 응, 과 같은 단답으로 응했다. 

3년간 그 애와 나 사이에 세 마디를 넘어가는 대화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마저도 내가 말하면 그 애는 대답만 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사실 대화라기보단 통보에 가까웠다. 당연히 그 애가 웃는 걸 본 적도 없었다. 딱 한 번, '그때'를 제외하곤.



2.


그때란, 고2 때 가정 실습을 말한다. 연세가 지긋하신데도 할아버지같은 친근함으로 유독 학생들과 친했던 기술 선생님은 어느 날 갑자기 시커먼 남고생들을 데리고 어울리지도 않게 요리 실습을 하겠다고 선언하셨다. 

- 아 쌤! 무슨 실습이에요~ 그냥 《라따뚜이》나 한 번 봐요~ 


키득거리며 외치는 준우의 말에 선생님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 너희 같은 놈들이 나중에 요리도 혼자 못 해 먹고 굶어 죽는 거야! 잔말 말고 출석번호 순으로 두 명씩 한 조니까 알아서 재료 준비해라. 참고로 수행평가고, 주제는 식빵으로 만든 음식, 만점은 30점이다. 기본 점수 없음!

- 아아- 쌤 너무해요-



나는 내가 요리에 그다지 소질이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간단한 계란 샌드위치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애에게 다가갔다. 


음, 그러니까 난 요리를 진짜 못 하거든?

응.

그니깐 그냥 식빵에 햄 넣고 후라이 하나 부쳐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응.

그럼 재료는... 내가 식빵 사 올게. 너는 햄이랑 계란 2개 정도만 준비해줘.

응.


막상 수행평가 당일에 그 애는 내가 말한 재료에 양배추, 버터, 치즈 등의 재료를 더 가져왔고, 내가 넋 놓고 있는 사이 먹음직스러운 프렌치토스트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냈다. 선생님께 검사받을 것과 우리가 먹을 것 두 개를 순식간에 만들곤 그중 하나의 반을 갈라 내게 내밀었다. 얼떨떨하게 받아들고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었다. 그러니까, 너무 맛있어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맛있어?

어? 야, 진짜 맛있어! 너 요리 진짜 잘한다. 

다행이다.


학교생활에서 5월은 무언가 특별하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 공휴일도 많고 축제도 많은, 어쩌면 한 달 내내 즐거운 꿈인 것만 같은 달. 

그 애가 만든 샌드위치가 맛있다고 한 나에게 다행이라며 웃어준 그 날.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연분홍빛 꽃잎보다 달고, 파릇한 초록 잎사귀보다 싱그러운 미소였다. 어쩌면 봄날의 꿈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다시는 그 애가 웃는 걸 볼 수 없었다. 



3.


그 후로 나는 가끔 수업이 지겨울 때면, 딱히 할 것도 없는데 자습 시간이 주어질 때면, 옆 분단의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창가에 내리쬐는 햇빛이 따스한 봄에는 고양이인 양 졸기도 하고, 온통 어두워진 하늘이 종일 비를 쏟는 여름엔 그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기도 했다. 학교 담벼락이 빨갛게 물들던 가을엔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리기도 했으며, 하얀 첫눈이 오던 날에는, 다들 수업에 집중한 사이 혼자 미소짓기도 했다. 

가끔 그런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돌아볼 때, 나는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필기 하나 없는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척했다. 주변을 가득 메운 사각거리는 필기 소리에 나도 무언가 쓰려다 무의식중에 

이-동-해  

석 자를 쓰곤 누가 볼세라 얼른 지운 일도 있었다. 


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는 아마 내가 자길 보고 있단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4.


졸업식이랍시고 교실 한 구석에 달린 TV로 끝없이 이어지는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듣는 건 아주 지루한 일이었다. 교실 뒷 편엔 부모님들로 가득 차 친구와 잡담을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고, 내 시선은 언제나와 같이 창가를 향했다.

"오늘은 고등학교 3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래, 오늘이 그 애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3년 내내 같은 반에 출석번호도 세트. 그러나 말 섞은 횟수는 손에 꼽힘. 졸업 후 동창회를 한다 해도 그 애가 나올 확률은 제로. 오늘이 정말 '마지막'인 셈이었다. 

나는 그 애의 전화번호도, 사는 곳도, 하다못해 어느 대학에 붙었는지, 무슨 과에 지원했는지도 몰랐다. 그 애에 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 그보다는 끝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했다. 끝. The END.



END.


정신을 차려보니 졸업식은 끝나있었고, 멍하니 그 애를 쳐다보고 있던 나는 순간 돌아본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봐도 다들 부모님과, 담임선생님과, 각자의 친구들과 사진을 찍느라 어수선할 뿐이었다. 허둥지둥하는 사이 그 애가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이런 건 내 머릿속 수만 가지 시나리오 중에 없었는데, 뭐라고 변명하지? 나 완전 이상한 놈으로 보면 어떡하지 아 물론 좀 이상한 놈 같은 건 맞지만 그래도 번호는 따고 졸업해야 하는데


너.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어, 어? 아, 졸업 축하해.

그거 말고.

어?

할 말 있잖아. 해, 얼른.

뭘...,

오늘이 마지막이야


진짜 끝이라니까?

...좋아해


좋아해, 이동해.




아. 저질렀다.


AND…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몰라. 맨날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바보냐? 선생님들도 다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