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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개강] 고백 _ 로원

Keyword: 개강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던 방학이 끝나간다는 사실은 어느 학생들에게나 부정하고픈 소식임이 분명했다. 끝이 오지 않았으면, 영원했으면 하고 바랐던 길다면 긴, 짧다면 짧은 방학의 끝이 보인다.


 "후...."


 방학 동안 거의 집 안에만 죽치고 있었던 혁재는 휴대전화를 켜자 보이는 날짜에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개강일이 내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개강 전날 저기압인 것이 당연한 일 같겠지만, 혁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날 동해에게 받은 고백이 아직도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것이 내일 어떻게 동해를 마주해야 하나 싶었다. 제가 기억력이 비정상적이게 나빠서 동해의 고백을 다 잊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그건 동해에게 너무 잔인한 일일뿐더러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날 수도 없으니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방학 동안 집 밖에 나갈 일이 없었던 혁재는 집을 제외하고 들렸던 곳이라고는 오랜만에 가족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간 본가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장을 보러 찾아간 마트뿐이었다. 물론 귀찮음과 여름의 살인적인 더위도 한몫했지만 혹시라도 나갔다가 동해를 만나면 꽤나 곤란할 것 같아서였다. 같은 동네에, 같은 대학에, 그 덕에 친구들까지 서로 알고 있었다. 혁재와 친한 이들은 동해와도 친했고, 동해와 친한 이들은 혁재와도 친했다. 그러니 친구들을 만날 수도, 함께 놀 수도 없었다. 혹시나 동해와 마주칠까 봐. 아니,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제 친구가 눈치 없이 동해에게 연락이라도 한다면 낭패가 아닌가.

 

 

 아마 동해는 혁재가 손가락이라도 부러진 줄 알 수도 있다. 분명 방학 전에 고백을 했고, 그 후에 연락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저에게 오는 소식이라고는 전혀 없으니까. 그것이 혁재가 더더욱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이유였다. 동해의 고백도, 연락도 전부 피해놓고서 멀쩡히 집 밖에 나와 돌아다니거나 친구들과 논다는 것이 양심에 찔렸다. 또한 그런 사실이 저와 가장 친한 동해의 눈이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기에.

 

 

 동해를 원망도 해본 혁재였다. 그러나 곧 그것이 동해와 저를 도와준다거나 제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그조차 그만두었다. 그리고 동해의 고백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웠다기보다는, 지우려고 노력했다. 최대한 의식하지 않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개학하면 동해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고, 동해에게 답을 해줘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피하지 못한다.


-


 "동해? 오늘 학교 안 온 것 같던데."

 "아무 말 없었는데. 너한테는 연락 안 왔어? 너네 제일 친했잖아. 난 네가 이동해 안부를 우리한테 묻는다는 게 더 황당하다."


 어째서. 설마, 나 때문인가? 혁재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그럼 동해의 고백에 답해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 아니, 그걸 떠나서 어쩔 생각인 거야, 이동해. 영원히 학교에 나오지 않을 거야? 내가 피해서 영원히 도망간 건 아니겠지. 당장 동해의 집으로 가야 한다고 혁재는 생각했다. 뒤늦게 확인한 동해의 문자는 혁재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혁재야 나 피하지 마]

[내 고백 거절해도 좋으니까 전화받아]

[니가 이렇게 평생 나를 피한다면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

[미안해]


 그제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혁재는 깨달았다. 동해의 마지막 문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니, 사실 알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다. 미안하다는 그 글자가 가진 뜻이 생각보다 더 무거울 것 같아서. 그 세 글자에 파묻힌 채 깔려 죽기라도 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혁재는 무서웠다.

 

 

 동해를 찾으러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남은 수업을 들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수업에 들어가더라도 버티지 못하고 나올 것이다. 그걸 알기에, 알았기에 혁재는 먼저 동해의 집으로 향했다. 동해의 집으로 가는 길은 어쩌면 제 집으로 가는 길보다도 익숙했다. 항상 심심하면 동해의 집으로 갔고, 배고프면 동해의 집으로 갔고, 언제나 기분이 내킬 때면 동해의 집으로 갔다. 여태까지 동해의 집으로 향했던 발걸음 중 가장 무거웠다. 정체 모를 죄책감이 목을 죄여왔다. 제 이기적임에 저를 향한 실망감과 한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어느새 도착한 동해의 집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견고해 보였다. 마치 절대 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앞에 벽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문이 너무 높아 보였다. 내가 감히 들어갈 수 있을까. 숨을 가다듬은 혁재가 동해의 집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문을 두드렸던 손에 차갑고 딱딱한 금속 문의 느낌이 미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동해야."

 "이동해."


 침묵. 그보다 고요할 수 없었다. 앞에 굳건히 서있는 문이 혁재의 목소리를 막아서고 있는 것 같았다. 혁재의 부름은 문에 부딪혀 그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는 공기 중에 퍼져 다시는 듣지 못하도록 사라져버렸다. 동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가버린 채 내 앞에서 영영 사라져버리지는 않겠지. 마치 애초부터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없어져 버리지는 않겠지.

 

 

 혁재는 알았다.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동해는 충분한 시간을 줬고, 그동안 동해를 무시한 채 그 시간을 아무런 의미 없이 흘려보낸 것은 바로 혁재 자신이었다. 방학 동안 동해는 끊임없이 기회를 줬다. 그걸 몰랐었다, 바보같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동해의 얼굴을 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넘어가고,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그에 익숙해지고, 동해의 고백을 잊어버린 채 없던 것처럼, 고백 따위 받은 적도 없었던 것처럼. 동해가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런 혁재 뻔뻔함에 상처받고,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결국 혼자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지쳐 혁재를 떠나고. 오늘 혁재가 동해를 만났어도 동해는 결국 혁재를 떠났을 것이다. 혁재는 이기적일 테니까. 동해의 마음을 모른 척할 테니까.

 

 

 동해가 집에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집에 없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집에 있어주길 간절히 바랐을 정도니까. 동해의 집문을 십수 번도 넘게 두드린 혁재가 지치기 시작했다. 동해가 집에 없는 것 같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동해라면, 이혁재가 아는 이동해라면 이렇게 내가 문을 두드리는데 나오지 않을 리가, 대답 한 번 하지 않을 리가 없다. 곧바로 혁재는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동해를 찾으러 가기로 결심했다. 지금 동해가 어디 있는지, 그걸 아는 것이 혁재에게는 우선이었다. 그러나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동해의 행방을 알만한 사람이나 있을만한 곳을 일일이 찾는 수밖에.


-


 먼저 혁재는 혁재나 동해와 가장 친한 친구들로만 구성된 단체 채팅방에 동해의 행방을 아는지 질문하는 글을 남겼다. 대부분은 아직 읽지도 않았으나 읽은 몇몇에게 들을 수 있는 답은 '모른다.' 뿐이었다. 동해의 본가에 전화를 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혁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후 혁재가 가장 먼저 가본 곳은 동해와 자주 놀러 가던 만화방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만화와 영화를 좋어하던 동해는 줄곧 혁재와 함께 만화방이나 DVD방을 찾아가곤 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동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저와 동해가 처음 만났던 장소인 혁재와 동해가 나온 중학교였다. 비슷한 시기에 낯선 곳으로 전학을 왔던 둘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서로에게 의지했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다. 그렇게 이혁재와 이동해는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지금은 전부 틀어져 버렸지만. 혁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지 동해가 저를 추억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지금 당장 볼 수 없는 동해를 이곳에서라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도 동해는 없었다.

 

 

 막막했다. 당장 생각나는 장소도 없었다. 혁재는 제가 동해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착각이자 자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해가 저에게 고백을 해오기 전까지만 해도 혁재는 동해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만 해도 동해가 어디 있는지 자신의 힘으로는 찾을 수 없으니까. 힘들었다. 금방 무너질 것 같았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다. 동해를 찾아야만 한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혁재의 전화가 울렸다. 혁재가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자 들리는 목소리는 동해의 것이었다.


 "혁재야."

 "이동해? 너 지금 어디야, 당장 말해."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난 지금 너의 고백을 무시한 게, 너에게 대답을 해주지 않은 게 미치도록 후회스러운데. 이토록 미안한데. 너는 도대체 왜. 혁재의 목소리가 떨렸다. 동해가 말했다. 고백해서, 못 참고 내 마음 너한테 전해서. 미안해. 동해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어디야. 혁재가 물었다. 동해의 대답에 혁재는 당장 뛰었다.


 "너희 집 앞이야."


-


 "이동해!"


 혁재의 시야에 동해가 들어서자 혁재는 동해의 이름을 불렀다. 최대한 큰 목소리로, 더 이상 제 말이 동해에게 닿지 못하는 건 싫었다. 참을 수 없었다. 동해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동해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제야 알았다. 멍청하게도.


 "늦어서 미안."

 "늦지 않았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

 "기다린 만큼 보람은 있네."

 "힘들게 해서... 미안."

 "...나 힘들었어. 정말로."


 혁재가 동해를 안았다. 동해가 혁재를 안았다. 서로가 서로를 안았고, 서로의 품에 안겼다.


 "좋아해. 좋아해, 혁재야."

 "나도. 나도 좋아해, 동해."


 그전까지만 해도 동해의 좋아한다는 말이 무서웠다. 마치 저와 동해의 사이를 갈라놓을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혁재도 같은 말을 해줄 수 없었다. 그게 둘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동해의 마음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전에 제 마음조차 감당해낼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동해의 좋아한다는 말이 달달하게 느껴졌고 그에 수백 번, 수천 번이라도 대답할 수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로. 동해와 같은 마음으로. 더는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 동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을 외면한다는 것이 더 힘들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

 

 

 동해는 혁재에게 고백을 했고, 혁재는 동해의 고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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