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조는 몇 달 전부터 있어 왔다. ‘그 날’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하루였다. 5시 50분에 알람이 울리고, 10분 간 모른 척 굴다가 6시에나 일어나서, 반쯤 감긴 눈으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고, 될 수 있는 한 최대로 늦장을 부리며 교복을 챙겨 입은 뒤, 부랴부랴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는 삶.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등교하는 학생들 틈에 껴서 버스 손잡이 하나 차지하는 일조차 어렵게 느껴지는 아침. 겨우겨우 내 자리를 꿰차고 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겨를도 없이 사람들이 만들어 낸 밀물에 밀리고 썰물에 쓸려갔다. 나의 몸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학교까지는 30분 정도. 다시 말해 최소 30분은 꼼짝 못하고 그러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 여기까진 평소와 같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곧 직장인들이 대거 하차하는 정류장이었다. 운이 좋으면 남은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편히 갈 수도 있었다. 내 시야에 들어온 양복 차림의 남자도 이번에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데, 어떤 장면 하나가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찰나였지만 너무도 뚜렷했다. 남자는 나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린다. 하차 태그를 하기 전에 우리는 어깨가 부딪힌다. 남자가 먼저 내게 ‘죄송합니다’하고 사과를 건넨다.
뭐지?
이상했다. 별 거 아닌 내용이래도 뜬금없이 그런 장면이 떠올랐다는 것 자체가 의아했다. 그리고 남자는 정말로 나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우리는 어깨가 부딪혔고, 남자는 나에게 사과했다. 모든 게 내가 떠올린 그대로였다. 조금 오싹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우연의 일치겠거니 하고 넘겼다.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그 날 하루종일 누군가의 미래들을 봤다.
B급 초능력자의 고충
그 날 내내 통 수업에 집중을 못했다. 당연히, 시도때도 없이 떠오르는 누군가의 미래들 때문이었다. 대상도 소재도 정말 다양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1교시 수학 시간. 수학쌤은 오늘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흘린다. 체크무늬 셔츠가 온통 더러워진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간다. 그 사이 애들은 잡담을 나눈다. 또는, 7교시 문학 시간. 반장은 오늘 교과서를 낭독한다. 소설 <광장>의 일부분이다. 선생님은 반장더러 목소리가 아나운서 같다고 칭찬한다. 그러면 그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이게 계속 반복되다 보니 더는 우연의 일치라고 여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한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나 보다, 하고. 히어로물에 등장하는 초능력자가 된 것만 같아 들뜨는 기분은 잠깐이었다. 나는 머지않아 내 능력이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라기엔 턱없이 모자람을 알았다.
왜냐하면,
예견할 수 있는 미래가 점점 더 앞당겨졌기 때문에. 처음엔 30분 뒤의 미래까지도 거뜬히 보였다. 근데 그 시간은 빠른 속도로 단축됐다. 30분에서 20분, 20분에서 15분, 15분에서 5분, 5분에서 1분. 그렇게 30초. 30초 뒤의 미래는 안 보느니만 못 했다. 머릿속의 상상이 끝남과 동시에 사건은 발생했다. 이게 내가 정말 예견을 한 게 맞는지, 아니면 그저 눈 앞에서 사건을 목격한 것에 불과한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예견과 실제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그렇게 내 능력은 보잘 것 없어졌고, 초능력자가 된 듯한 기분도 시들해졌다.
“동해, 코노 갈래?”
내일이 연휴라 단축 수업을 했다. 얼마만의 단축 수업인데,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운 영혼들끼리 모였다. 그 중 한 명이 혁재였다. 코노라는 말에 구미가 당겼다. 여름 방학 이후로 간 적이 없어서 오랜만에 가고 싶었다. 나랑 혁재랑, 또 몇몇 애들까지 더해서 총 다섯이서 코노로 향했다.
첫 선곡은 내가 했다. 올 상반기 길거리에서 지겹도록 울려 퍼졌던 2인조 인디 그룹의 노래를 불렀다. 나머지 애들도 다 같이 떼창했다. 그 다음 곡은 혁재가 골랐다. 쇼미더머니 지난 시즌 노래였다. 힙합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나는 그냥 듣고만 있었다. 멜로디는 익숙했지만 따라 부를 만큼 잘 알진 못했다. 돌아가며 순서대로 한 곡씩 부르고 나니 이제 다들 마음대로 예약 버튼을 눌렀다. 2000년대 초 락 발라드, 어느 남자 아이돌 그룹 노래, 요즘 핫한 걸그룹 노래……. 다채롭기도 다채로웠다. 그때였다.
[ 동해랑 듀스 여름 안에서 부르고 싶다 ]
명백히 혁재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건너편에 앉은 혁재한테 “응? 뭐라고?” 했다. 일종의 확인이었다. 혁재는 역시나,
“뭐가?”
라고 되물었다. 의아해 하는 얼굴이다. 심지어는 “나 암말도 안 했는데?”라고 덧붙이기까지 한다. 내 예상이 맞았다. 방금 건 혁재의 속마음이었다. 어떻게 알았냐면, 이 시끌벅적한 노래방에선 절대 가능할 수 없는 또렷한 목소리가 내 바로 옆에서 들려왔기 때문에. 것도 귀라는 신체 기관을 통해 들려온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기 때문에. 이미 한 차례 초능력을 겪어본 바 있는 유경험자로서,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이제 나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이 들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혁재를 시작으로 다른 애들의 속마음이 하나 둘 들려왔다. 화장실에 갈까 말까 망설이는 애가 한 명, 저녁으로 치킨 먹으러 가자고 할 생각인 애가 한 명, 학원 숙제를 아직 못해 걱정인 애가 한 명. 꼭 저마다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아무튼 나는 천연덕스럽게 듀스 노래를 예약했다.
#3527 여름 안에서 - 듀스
기본적으론 나랑 다른 노래 취향을 가진 혁재인데, 우리가 통하는 구석이 있다면 바로 이런 면에서였다. 혁재나 나나 옛날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 중에서도 듀스는 우리의 최애 그룹이었다. 게다가 딱 남성 듀오인 덕에, 노래방에 오면 꼭 둘이서 듀스 흉내를 내곤 했다. 꼴에 춤까지 따라추면서.
딴 따 다 단. 익숙한 리듬의 경쾌한 멜로디가 시작되자, 혁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이크를 잡아들었다. 기대감에 한껏 신나하는 얼굴이 웃겼다. 파도 소리 섞인 전주가 흘러나오는 동안 혁재가 내게 한 마디 했다.
“와 대박. 나 방금 속으로 너랑 이 노래 부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혁재는 나와 텔레파시가 통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 들었거든, 하는 대신에 그냥 그랬느냐고 신기하다고만 했다. 이번 초능력은 꽤 쓸 만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앞으로도 종종 애들을 놀래켜줄 생각에 절로 신이 났다. 일단 좀 있다 치킨 먹으러 가자고 해야지. 아마 또 자기도 치킨 먹으러 가자 할 생각이었다며 놀랄 거다. 그 반응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났다. 애들을 내 손바닥 위에 두고 갖고 노는 신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문학 시간에나 듣던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게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내가 하나 간과한 게 있었다. 내 초능력은 A급이 되지 못한다는 점. 예견할 수 있는 미래가 짧아짐으로써 지난 번 초능력이 무의미해졌듯이, 이번 초능력도 머지않아 쓸모없어졌다. 처음엔 하나의 오롯한 문장으로 발화됐던 속마음이 점점 짧아지고 생략됐다. 고작 단어 하나만 들리거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는 식이었다. 꼭 지금처럼.
[ 동해 -------- ]
이번에도 혁재였다. 요근래 혁재가 자꾸만 내 이름을 불러댄다. (정확히는 혁재의 속마음이) 근데 문제는 대상이 나인 것까진 알겠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동해’ 외의 말은 전부 음소거 처리되어 들렸다. 아예 아무것도 안 들리면 차라리 속 편할 텐데 딱 내 이름까지만 들리니 더 답답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몇 차례 은근슬쩍 떠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야, 혁재야.”
“응?”
“너 방금 무슨 생각 했어?”
“나? 나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거짓말. 분명 내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그렇다고 혁재더러 나 네 속마음 다 들리니까 바른대로 말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 그렇게 말했다간 어떤 미친놈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예상했겠지만 요즘 내 최대 관심사는 바로 이거다. 이혁재의 속마음 알아내기. 아무래도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 좀 억울하다. 처음에는 내가 혁재를 내 손바닥 위에 두고 가지고 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혁재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느낌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개뿔, 이건 1인칭 관찰자 시점 밖에 안 되잖아. 오류투성이의 관찰. 이어지는 곡해와 오해들. 내가 보는 이혁재가 진짜 이혁재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내고 말 거야, 이혁재 네 속마음을.
오늘 하교는 혁재랑 둘이서 하게 됐다. 같은 방향인 애들이 원래는 세 명 더 있는데, 각자 학원이니 대회 참여니 하는 이유로 둘만 남았다. 야자가 끝난 뒤 어둑어둑한 밤거리를 둘이서 걸었다. 버스 정류장까진 10분 정도 걸렸다. 게임 얘기, 어느 먹방 유튜버 얘기, 요즘 즐겨듣는 신곡 얘기, 별 의미없는 이야기만 오고 갔다. 이제 이번 코너만 돌면 정류장이었다. 그런데 그때, 저 모퉁이에 길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아스팔트 위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쩍,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발이 그 쪽으로 향했다. 사람이 오건 말건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고양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말랑한 등을 쓸어주었다. 딱히 반겨주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계 어린 반응도 아니었다. 그래서 좀 더 용기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냐아, 하는 울음소리를 낸다.
[ 귀엽다 ]
혁재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래서 살짝 자리를 비켜줬다. 이리 앉으라고 손짓하는데 혁재가 마다했다. 자긴 괜찮단다. 방금 전 그 말이 고양이한테 하는 말이 아니었나? 근데 고양이가 아니면 여기 귀여울 게 또 뭐가 있다고.아, 고양이를 보는 것만 좋아하지 직접 만지는 건 별로 안 좋아하나부다.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녀엉. 빠빠.”
고양이한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마저 걸음을 옮겼다.
[ 귀여워 ]
또 귀엽다는 소리다. 힐끗 혁재를 쳐다봤다. 혁재의 시선은 암만 봐도 고양이를 향해 있진 않았다. 고양이가 아니라……
“어, 저기 버스 온다.”
내가 타야 하는 3417번 버스가 코앞에서 오고 있었다. 혹여나 놓칠까봐 서둘러 달려갔다. 혁재도 덩달아 나를 따라 뛴다. 어차피 혁재는 270번 버스를 타니까 굳이 뛸 필요가 없을 텐데.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에 헥헥 대며 버스에 올라 탔다. 삑, 승차 태그를 하고 뒤를 돌아 혁재에게 인사했다.
“내일 봐.”
“응. 잘 가, 동해.”
[ ----- 싫다 ]
여전히 알 수 없는 혁재의 속마음을 뒤로 하고 문이 닫혔다. 버스가 출발했다. 늦은 시간이라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아 차창에 머릴 기대었다. 고갤 돌리니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혁재가 보였다. 기분 탓일까. 꼭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길 고양이가 아니라 나를 쳐다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설마 귀엽다는 말이 나한테 하는 말이었을까. 그렇다면 싫다는 말도,
[ 헤어지기 싫다 ]
내지는 [ 보내기 싫다 ] 였을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간지러운 말 따위는 좋아할 때에야 가능한 거라고. 아무래도 B급 초능력의 폐해였다. 속마음이 전부 다 명확히 들리지 않으니 자꾸만 내 상상력을 덧붙이게 됐다. 이건 다 내 멋대로 왜곡하고 착각한 결과다. 이혁재가 설마.
나를 좋아할 리는 없다.
B급 초능력자의 고충
하지만 얼마 뒤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혁재는 나를 좋아한다. 타인의 속마음까지 읽어낼 줄 아는 주제에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여태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틈만 나면 혁재가 나를 부른다고 느꼈던 이유가 다 있었다. 왜냐, 이혁재는 정말 하루종일 내 생각만 하니까. 한 번 자각하고 나니 모든 건 분명해졌다.
[ 동해 ------ ]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호명이었다. 대체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 내 생각을 유발하는 동기는 또 어쩜 저리 많은지. 나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혁재의 마음을 알게 됐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야 나는 혁재를,
안 좋아하니까.
혁재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혁재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다. 처음엔 꽤 쓸 만하다고 생각했던 초능력이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불편했다. 내가 원치 않는 상대의 속마음까지 듣게 되니 너무도 괴로웠다. 혁재가 하루 중에 나를 얼마나 많이 떠올리는지, 그러므로 혁재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런 것 따윈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았다. 말 그대로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었다.
[ 오늘은 꼭 ---- 해야지 ]
더욱이 이번 건 투 투 투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다. 내가 가진 건 어설픈 초능력이라, 자체적으로 음소거 처리가 되어 들린다고 해도 빈칸에 들어갈 말은 딱 하나였다. 2점 짜리 영어 괄호 넣기 문제를 푸는 것 같았다. 답은 명료했다. 단 한 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다. 수많은 예상 답안 중에,
① 고백
에다가 새까맣게 동그라미 칠을 했다.
혁재는 기어코 오늘 내게 고백을 할 작정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해야만 한다. 속마음을 엿듣는 것과, 당사자로부터 직접 고백을 듣는 건 천지 차이였다. 혁재가 정말 내게 고백을 해온다면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게 뻔했다. 고백을 거절해야 하는 입장에서 나는 차라리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좋게 에둘러 거절을 한대도 어쨌거나 그건 거절이었고, 그럼 나는 혁재를 ‘찬’ 셈이 된다. 혁재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남한테 상처 주는 일은 딱 질색이었다. 그게 나랑 친한 친구라면 더더욱.
하루종일 긴장의 끈을 꼭 붙들고 있었다. 저렇게 속으로 선언을 한 이상, 언제 어디서 불시에 고백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혁재에게 빈틈을 주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둘만 남겨지는 상황을 필사적으로 피했고, 혹시나라도 진지해질 법한 상황이 오면 바로 실 없는 장난을 쳐 그 분위기를 깨버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겐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능력까진 없었다. 기어코 그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운명의 장난인지,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또 나랑 혁재 둘이서 하교를 하게 됐다. 혁재가 아예 입을 못 떼게끔 별의 별 온갖 얘기를 다 주절댔지만, 그러면서도 이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내가……”
“동해.”
평소와는 다른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올 것이 왔구나 했다. 혁재는 나를 불러 놓고 한참 동안 침묵만을 유지했다. 우리 둘의 발걸음 소리만이 엇박으로 이어졌다.
“나 할 말 있어.”
“…….”
“나,”
꿀꺽.
내 것인지 혁재의 것인지, 아무튼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고백을 하기 전 잔뜩 긴장한 혁재와 고백을 거절할 수밖에 없으므로 잔뜩 긴장한 나.
“너 좋아해.”
이미 머릿속으로 수십 번은 더 시뮬레이션을 돌린 장면인데, 실제로 일어나니 더 당혹스러웠다. 나를 올곧이 쳐다보는 혁재의 두 눈동자가 단단했다.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얼굴. 그 앞에서 나는 더없이 초라해졌다. 일렁이는 미안함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차라리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B급 초능력자의,
그 후의 기억은 없다. 다시 눈을 뜨니 나는 아직 침대 위였다. 휴대폰에는 10월 11일 금요일 오전 6 : 00 라고 떠 있었다. 10월 11일이라 하면, 어제 같은 오늘이었다. 이미 나는 한 번 지나쳐온 시간. 바로 알아챘다. 이번 초능력은 타임 리프구나. 벌써 세 번째 맞이하는 초능력이라 이젠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안도감이 들 뿐이다. 이렇게 혁재의 고백은 못 들은 셈이 됐으니 다행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평소처럼 행동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2019년 10월 11일 아침을 시작하게 됐다.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챙겨 먹고, 교복을 갖춰 입고, 여기까진 대충 어제와 비슷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었으니 달라질 게 없었다.
그러나 집을 나서면서부터 느꼈다. 어제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구나. 생각해보니 그럴 만했다.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 가던 시간을 내가 억지로 되돌렸으니, 그 여파로 인해 사소한 변화들이 연쇄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고 어제는 없었던 일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사소한 변화들은 더 큰 변화를 창조해냈다. 일종의 나비효과였다. 제일 먼저 이를 실감한 것은 점심시간 때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축구를 하긴 했다. 하지만 별 탈 없이 경기가 끝난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작은 사고가 있었다. 혁재가 다쳤다. 격렬한 몸싸움 중에 심하게 넘어졌다.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느라고 처음엔 그냥 부딪힌 줄만 알았는데, 혁재가 무릎을 껴안은 채로 계속 못 일어나길래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다. 서둘러 달려가니, 잔뜩 찌푸린 얼굴이 무척 괴로워 보였다. 나랑 다른 친구 한 명이 각각 양 쪽에서 부축해 보건실로 갔다. 혁재는 가는 내내 다리를 절뚝거렸다.
우리는 양호실 간이 침대에 걸터앉아 같이 양호쌤을 기다렸다. 다른 친구는 우리의 소지품―슬리퍼나 교복 셔츠 같은―을 대신 챙겨 오겠다며 다시 운동장으로 갔다. 어쩌다 보니 단둘이 남겨진 셈이다. 어제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이런 순간들을 피해 다녔는데, 방심한 사이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에이 설마, 싶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혁재가 또 고…백(아무리 생각해도 낯간지럽다. 우리 사이에 고백이라니)을 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괜히 둘뿐인 양호실에서 혁재 눈치만을 보고 있었는데, 혁재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동해.”
설마.
“있잖아 나.”
익숙한 기류였다. 머뭇거림과 뜸들임, 그 사이의 왠지 모를 설레임. 꿀꺽. 침을 삼켜내는 소리가 선명했다. 나는 내게로 와 닿는 혁재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아 제발.
“너 좋아해.”
결국, 두번째 고백이었다. 말릴 새도 준비할 틈도 없이 내 앞에 냅다 던져졌다. 문장의 끝맺음이 단호했다.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혁재에게로 고갤 돌리니 혁재는 어제와 다를 게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토록 확신에 찬 얼굴. 대체 네 마음의 근거는 어디 있길래 이렇게 당당한 건데.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나조차 이해 못하겠는데 도대체 너는 왜. 그런 혁재에게 뭐라 해줄 말이 없는 나에게 남겨진 선택지라곤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는 또 한 번 그 길을 택하기로 했다.
“…….”
시간은 다시 전으로 돌아갔다. 다만 그 간격이 몹시 짧아졌다. 깜빡 정신을 놓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내 방 침대 위가 아닌 소란스러운 교실이었다. 급히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하니 10월 11일 금요일 오전 9 : 52 라고 떠 있었다. 대강 1교시가 막 끝난 듯했다. 역시, 내 어설픈 초능력에 허점이 없을 리가. 이번 것도 지난 번 미래 예견 능력이랑 비슷했다. 볼 수 있는 미래가 갈수록 앞당겨졌던 것처럼,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밤에서 이른 아침. 오후에서 오전. 그렇게 가다 보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이 능력도 조만간 쓸모 없어지겠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기로 했다.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능력이니까.
반쯤 집중을 하는 둥 마는 둥 수업을 듣다 보니 금세 점심 시간이었다. 오늘도 애들은 축구를 하러 나갔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 오늘은 누구도 다치지 않고 경기가 끝났다. 점심 시간을 20분쯤 남겨두고 다 같이 급식실로 향했다. 열심히 뛴 탓에 제법 추운 가을 바람에도 땀이 뻘뻘 났다. 연신 손 부채질을 해대며 급식실 줄을 섰다. 우리처럼 축구에 환장하는 애들 말고, 제때 급식을 먹는 애들이 이미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급식실은 한산했다. 우리 무리랑 1학년 몇몇 무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식판을 받아 들고 사이좋게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나랑 혁재가 마주보고 앉았다. 이미 혁재에게 두 차례나 고백을 들은 입장으로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혁재는 알지 못하니까. 심지어 내가 자기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티가 난다고도 생각 못하겠지. 근데 그거야 상대의 속마음을 엿듣는 능력이 없었더라면 나도 몰랐을 거다. 전에는 꿈에도 몰랐다가 그 초능력을 계기로 유심히 지켜보면서 그제야 알게 됐다. 나름 티가 났다. 예를 들면 이럴 때.
“어, 땡큐.”
자기 몫의 물컵을 들고 오면서 내 것까지 챙겨온 혁재였다. 단순한 친구 간의 호의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호의들이 오직 나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게 너무도 명확했다. 더 이상한 건 그 누구도 이걸 의아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체 언제부터 이 특별 대우가 당연해진 건지, 그 출발점을 좇기에도 까마득했다. 중학교 시절 첫 만남부터 해서 혁재와의 역사를 모조리 다 훑고 나서야 알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 둘을 둘러싼 시간의 겹이 견고하리만치 두껍고 단단했다. 어쩌면 그래서. 나도 모르는 틈에 혁재가 자신의 마음을 키워 온 걸지도 모르겠다고, 혁재 자신도 눈치챌 겨를 없이 그렇게 마음이 커진 걸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남들보다 월등히 긴 만큼 우리 사이에 쓸 수 있는 서사도 그만큼 많아진 걸까. 이젠 속마음이 읽히지 않는 혁재를 빤히 쳐다 보면서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물음을 떠올렸다.
너는 내가 왜 좋아졌어?
내가 떠올리고서도 낯부끄러워서 금방 지워버렸지만. 이런 나를 알 리 없는 혁재는 열심히 국을 떠 먹고 있었다. 오물대는 입술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오늘은 나름 평화롭게 하루가 지나가나 싶더니 또 사고가 터졌다. 이번엔 8교시 이동수업 때였다. (사탐 선택 과목에 따라서 반을 옮겨 보충 수업을 듣는 건데, 나랑 혁재는 똑같이 사문반이다.) 문제집이랑 노트, 필통을 챙겨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애들이랑 사사로운 장난을 치느라고 늦장을 부리다 하마터면 지각할 위기에 처해 서둘러 뛰어간 게 화근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계단을 두 세 칸씩 뛰어 내려가다가 혁재가 발을 헛디뎠다. 그렇게 그대로 굴러 넘어졌다. 저 계단 밑에서 다리를 움켜잡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게, 영 심상찮아 보였다. 황급히 혁재에게로 가 부축을 해주었지만 혁재는 제대로 발을 딛고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운 듯했다. 아무래도 뼈가 부러졌거나 한 것 같았다.
“쌤 데리고 올게.”
혁재에게 말해두고서 교무실로 달려갔다. 달리는 걸음걸음이 다급했다. 커피를 타고 있던 쌤은 내 말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 쌤을 무작정 끌어 혁재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갔다. 잠시 당황하다가도, 쌤은 금세 침착하게 나더러 혁재랑 정형외과에 다녀오라 했다. (상태를 보아하니 혁재 혼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업만 없었어도 같이 가줄 텐데 미안하다면서 택시는 자기가 불러주겠다 했다. 막막했는데 일단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된 것 같아 다행이었다. 혁재는 여전히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내게 겨우 의지해 한 쪽 발을 절뚝이며 걷는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택시를 타고 제일 가까운 정형외과로 향했다. 괜히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차마 입을 못 떼고 있었는데, 혁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깁스 하라고 할 것 같아, 왠지.”
“나 깁스 하면 그때도 동해 네가 옆에서 챙겨줘야 해.”
“아 당연하지.”
“이동해 맨날 부려 먹을 거야.”
“아프니까 봐준다.”
혁재가 픽 웃었다. 그 얼굴을 보자 나도 그제야 웃을 여유가 생겼다.
평일 오후인데도 병원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마 대형 병원이라 그런 것 같았다. 일단 접수를 하고 대기 의자에 기대 앉았다. 대기 명단에 혁재 앞으로 사람이 10명은 더 넘게 있었다. 한참 기다려야겠다. 내 말을 들은 혁재가 그러게, 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두 번째 부상이었다. 게다가 정도가 저번보다 더 심해졌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님 이것도 내 초능력이랑 연관이 있는 건지, 고갤 갸웃하게 됐다. 근데 이미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허점이 존재하는 걸 보면 아마 우연인 듯했다.
“동해.”
“왜?”
전광판 화면에 이름 하나가 사라지는 걸 보면서 답했다. 그래도 나름 금방 금방 줄어드네.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리겠다. 대충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나 너 좋아해.”
어떤 낌새도 없이 너무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벌써 세 번째 듣는 건데도 적응이 안 됐다. 다리까지 다친 애가 대체 뭔 정신으로 고백을 하는 건지, 그렇게 아파 죽으려고 했으면서. 너한텐 뼈가 부러지고 그런 것보다도 내게 고백을 하는 게 더 우선이냐고. 안 그래도 사고 났을 때부터 내내 정신 없었는데 이혁재의 고백 때문에 다시 얼이 빠졌다. 이 타이밍에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서 더 그랬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고갤 돌렸다. 그 변함없이 올곧은 눈과 마주치자마자 바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에는 또.
“…….”
시간을 되돌렸다. 바로 휴대폰을 먼저 확인했다. 10월 11일 금요일 오후 4 : 50 7교시가 끝나고 보충 수업을 들으러 이동할 때였다. 이제 내가 돌릴 수 있는 시간이 1시간도 채 안 됐다. 이 초능력도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시간이 단축되는 걸 보면 다음 번에는 겨우 1분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짧을지도 모른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기로 했다. 오늘은 정말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겠구나.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한 게 머쓱해질 정도로 혁재에게선 아무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혁재의 마음을 알게 되기 이전의 나날들처럼 평범한 하루가 흘러갔다. 그 어떤 크고 작은 사고도 없었다. (역시 사고가 났던 건 우연의 일치였던 것 같다.)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이제 이대로 하교만 잘 끝마치면 드디어 11일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첫 번째 11일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하교는 혁재와 나 둘이서 하게 됐다. 버스 정류장까지 절반쯤 왔을 때, 혁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세웠다. 설마 네 번째 고백인 건가 싶어서 지레 겁을 먹었다.
“아. 나 뭐 놓고 왔다.”
“뭐?”
“동해, 그냥 먼저 갈래? 나 다시 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지금 갈 수는 있고? 문 닫혀 있음 어떡해.”
“빨리 뛰어 갔다 오면 될 거야.”
“아, 알겠어. 기다릴 테니까 얼른 갔다 와.”
혁재의 등을 툭툭 밀면서 말했다. 그럼 나 가방 좀. 혁재가 내게 자기 가방을 건넸다. 그러더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성큼성큼 뛰어가는 발걸음에 혁재는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 3분 정도 걸리려나. 혁재의 가방을 껴안다시피 앞으로 메고서 생각했다. 근데 진짜 오늘은 고백 안 하네. 나한테 고백하려던 마음을 그냥 접은 걸까. 뭔가, 다행이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아쉬운 건 아닌데. 아마 늘상 있던 고백이었으니 없어서 허전한 건가 보다고 생각했다.
할 일 없이 인터넷 서핑도 좀 하고, 인스타그램도 들어가보고 했는데 3분을 훌쩍 넘긴 시간에도 혁재는 오지 않았다. 이쯤이면 올 때가 됐는데 뭔가 이상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무튼 혁재가 놓고 왔다는 무언가를 찾고 챙기는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시간이 늦었다. 혁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학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인적이 드문 밤 거리에 난데없이 익숙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뽀― 삐뽀―
응급차였다. 새빨간 싸이렌이 요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어디서 사고라도 났나 보다, 하고 넘겼을 텐데 오늘따라 좋지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왠지 그 사고의 대상이.
혁재일 것만 같았다.
나는 응급차를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아니길 간절히 바랐지만 응급차는 정말로 우리 학교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학교 앞 거리엔 교통사고의 흔적이 선연했다. 하얀색 승용차 한 대가 깜빡이를 켠 채로 멈춰 있었고, 그 앞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서둘러 그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가까워질수록 실루엣은 선명해졌고 그곳엔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혁재였다. 피 범벅이 된 혁재가, 의식을 잃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에 손이 벌벌 떨렸다. 어느 틈엔가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입을 틀어막고 혁재의 옆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다리의 힘이 풀려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모든 게 다 나 때문이라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혁재에게 사고가 났던 건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매번 혁재의 고백을 무시하고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린 대가였다. 혁재는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나는 벌써 혁재를 세 번이나 거절했다. 말로써 거절하진 않았으므로 실연의 상처는 고스란히 혁재의 몸에 새겨졌다. 첫번째로 다리에 남은 상처가 그랬고, 두번째로 부러진 뼈가 그랬다. 그리고 지금 혁재는,
차마 뒷말을 이을 수가 없다. 그럴 용기가 나질 않는다.
두 눈이 감긴 채로 굳어있는 혁재를 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제발 이번 한 번만요. 제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제발, 제발요…….
매번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나의 B급 초능력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두 번 다시는 초능력 따위 내게 생기지 않아도 좋으니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되길 절절하게 기도했다. 머리가 아프도록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긴 눈 틈새로 눈물이 계속해서 줄줄 흘렀다. 그리고.
“…….”
정말로 시간이 돌아갔다. 우리는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불과 30분 전의 순간이었다.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혁재를 보자마자 눈물이 다시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나는 혁재를 덥석 껴안았다. 한 쪽 어깨에 매달려 있던 가방이 툭 떨어졌다.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내 앞에 눈을 뜨고, 숨을 쉬고,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혁재가 존재한다는 게. 나한테는 그게 가장 중요했다.
네 번의 오늘을 겪으면서 알았어 혁재야.
“너 울어?”
“좋아해. 나 너 좋아해 이혁재. 정말로, 정말로 좋아해.”
나 역시 너를 좋아한다는 걸. 네가 내 곁에서 영영 사라질 뻔한 순간을 겪으니까, 그 찰나의 순간에 난 내 세상 전부를 잃는 것만 같았어. 널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너의 사랑이, 내겐 너무 과분하게 느껴졌던 거야. 그 확신에 찬 단단한 눈동자에, 그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에 나는 덜컥 겁이 났던 거야. 난 아직 내 마음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근데 왜 울어…….”
혁재가 나의 뺨을 안쓰러이 훑으며 말했다. 서럽도록 우는 나 때문인지 혁재도 울컥한 것 같았다. 혁재가 나를 다시 조심스레 안았다. 그 포근한 품 안에서 안도감이 들었다. 영원히 내 옆에 있어줘 이렇게. 나도 영원히 네 옆에 있을게.
“나도 좋아해, 동해.”
바야흐로 네 번째 고백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번에야 말로 진짜 첫 번째 고백이다. 나는 네 번의 10월 11일을 겪었지만 내 달력엔 오늘만을 기록해둘 거니까. 우리의 역사 속에서 오늘 10월 11일은 새로운 분기점이 될 거야.
어느 날 내게 난데없이 생겼던 그 B급 초능력들은, 모두 다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한 여정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을 끝으로 나는 이제 어설픈 초능력자의 처지는 벗어날 거란 직감이 들었다. 내겐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능력이 생겼으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혁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깟 초능력에 비하면 단연코 A급이다. 나를 진정한 히어로가 되게 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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