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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오늘이 지나고 나면] Who am i without you._바램






"동해야, 우리 헤어지자."



오늘은 우리가 2주 만에 밖에서 데이트를 하자고 미리 시간을 빼고 잡아놓은 주말이었다. 동해는 자신이 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저녁에 잠깐 서로의 몸을 나눌 때가 아니면 밝은 데서 혁재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는데, 오늘은 마음 먹고 요 근래 혁재에게 갖지 못한 관심도 좀 가져 봐야겠단 생각으로 전날의 야근으로 피곤한 몸을 주무르며 늦지 않게 카페로 향했다. 


사실 오랜만에 이렇게 혁재와 마주 앉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고, 서로를 너무 잘 아는 탓일까 평소 우리가 마시는 바닐라 라테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자리를 잡고 나니 딱히 혁재에게 할 말이 없어 혁재가 먼저 입을 열고 나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 하릴없이 휴대폰의 알람을 확인 하며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동해야, 점심시간 한참 지났는데 밥은 먹었어? 또 안 먹고 빈 속에 커피 붓는 건 아니지?"


"대강 때우긴 때웠어, 너는 밥 먹었어?"


"나도 샌드위치 하나 사서 끼니 때웠어, 오늘 작업 막바지 였잖아."


"아, 그랬었나? 하긴 나도 어제 야근하느라 새벽에 집에 들어갔다."


"그랬어? 잠도 못 자고 힘들었겠네."





형식적인 안부를 묻고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갈 화제가 없어 짧은 순간 우리 사이에 엉겁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혁재가 항상 대화 화제를 잘 이끌어 나갔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12년을 만난 연인인 혁재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순간 진동벨이 울려 커피가 다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고 혁재가 일어나 커피 두잔을 쟁반에 들고 가지고 왔다.





"넌 지금 이렇게 밖이 춥고 쌀쌀한데, 따뜻한 거 마시지."


"새삼스레 왜 그런 얘기를 하냐, 나 원래 얼죽아잖아."


"........"




무엇인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한 혁재의 표정, 혁재는 불안하거나 할 말이 있을 땐 저렇게 입술을 앞니로 짓이기는 버릇이 있다. 내가 12년을 아무리 말해도 고쳐지지 않는 습관






"동해야, 그게....나 사실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계속 머뭇거리는 혁재의 모습,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 애가 아까부터 내 눈도 제대로 안 쳐다보고 왜 그러는 거지?






"...동해, 우리 헤어지자."


"....그게, 무슨...소리야?"


".....나 다 알고 있어, 너 이제 나 사랑하지 않는 거."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우리, 최근 일 년간 제대로 눈 맞추고 서로에게 관심 가지면서 대화한 적 있었니?"


"....."


"....나도 사람이라 아무리 참고 참아도 이젠 지친다, 나 너 힘들고 시간 없는 거 잘 아니까 여태 바빠서 자주 못 만나고 제대로 데이트 못하는 거나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든 건 다 괜찮았어."


"....."


"그래 말마따나 우리가 뭐 일 이년 만난 것도 아니고, 내 인생에서 동해 너를 빼고 동해 인생에서 나를 빼면 할 얘기도 없을 만큼 오래 만나고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다 이해할 수 있었어 난."


"....혁아...그게,"


"근데, 너 그 잠깐 시간 나서 얼굴 보고, 몸달아서 사랑을 나누고 누워서 후희 남길 때도 넌 내 눈도 한번을 안 보더라."


"....아니...혁아 너도 알잖아 나 요즘 잘 시간도 없는 거"


"....나...좀 힘들었어, 같이 잘 때도 나 등지고 누운 네 뒷모습 어루만지면서 내가 널 사랑하기에 너의 마음이 식더라도 우리가 사랑이라고 자위하는 거"







눈에 고인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 혁의 얼굴을 보니까 내가 여태 편하다 여기며 혁재에게 해왔던 행동들이 생각나서 아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혁재는 안무가로 일하면서 시간이 자유롭기 때문에 항상 내 시간에 맞춰서 만날 시간이나 휴식을 가졌고 광고 회사에 입사해 일을 하느라 매번 야근을 하는 내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피곤함에 절어 잠에 빠져있고 잠에서 깨어있어도 내가 먼저 혁재에게 대화를 건다든지 먼저 혁재의 품 안에 안겨준 것도 하지 못했기에 그랬던 모습들이 오래 전 일처럼 흐리게 떠올랐다.







"....동해야. 나 없어도 따뜻하게 챙겨입고, 바빠도 건강 생각해서 밥시간에 꼬박꼬박 밥 잘 먹고, 커피도 좀 줄이고, 좋은 일 있으면 웃고, 슬프면 잠깐 울고 털어 내면서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나 이제 가볼게. 그리고 집에 있는 내 짐은 다 버려, 이제 너한테 연락 하지 않을 거야."







혁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의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뛰쳐 나가서 널 잡아야 하는데, 나 두고 가지 말라고 얘기하고 헤어질 수 없다고 내 생각을 말해야 하는데 몸은 굳어버려서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나는 혁재의 모습이 창밖에서 없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카페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지금 내가 이혁재하고 헤어진 건가? 눈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오늘 처음 혁재를 만났을 때를 다시 생각해봤다. 처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를 제대로 보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는 혁재의 시선, 동해라고 부르지 않는 혁재의 지쳐버린 목소리, 그리고 헤어지자고 통보를 하는 건 자신이면서 나보다 더 슬퍼 보이는 눈.


동해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가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집으로 향했다. 입고 있던 불편한 겉옷을 바닥에 대강 던져 벗어버리고 침대에 몸을 뉘어 천장을 보고 대자로 누워 버렸다.


방금 카페에서 혁재와 내가 이별을 한 거고 우린 이제는 헤어진 사이이기에 더 이상 볼 수 없는 걸까? 도저히 실감 나지 않는 12년 연애의 끝에 동해는 평소 눈물이 많다고 주변 지인이나 혁재에게 장난스런 놀림을 받곤 했지만 믿기지 않는 혁재와의 이별에 눈물이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난 그저 요근래 1년 정도의 우리가 열정적이게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오랜 연애에 서로 가족처럼 의지하면서 감정에 안정을 찾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혁재에겐 그게 아니었던 걸까? 아까 낮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함에 절어서 오늘 데이트는 대강하고 집에서 잠이나 자자고 하려는 마음으로 카페로 향했는데 동해는 이렇게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웠는데도 정신이 갈수록 또렷해지고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았다.


동해가 처음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전라도 목포에서 부모님의 일 때문에 서울로 전학 온 18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혁재와 동해가 나이의 숫자 앞자리를 두 번이나 바꾼 32살이 된 지금까지 서로를 빼곤 인생에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장담할 만큼 우리에게 이별이 찾아올 줄 몰랐는데


동해는 혁재가 집에 와서 잘 때마다 지정석처럼 누워있던 자신의 옆자리를 한 손을 뻗어 매만지며 이제는 정말 혁재가 옆에 누워 자신을 품에 안고 토닥이며 재워 줄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무리 곱씹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별을 한다고, 우리가. 아니 혁재하고 내가? 도합 15년의 시간들을 다 등지고 완전한 남인 거라고?"








-








동해가 갑작스러운 이별에 실감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있는 그 시각, 혁재는 동해와 자주 가던 포장마차에 가서 죽고 싶어 술을 마시는 것처럼 미친 듯이 깡소주를 위에 들이붓고 있었다.


동해에겐 정말 갑작스러운 이별통보, 하지만 혁재는 처음 동해가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지난 1년 전부터 정말 비참하리만치 처량한 기분을 가슴에 품고 3개월간 고민하고 또 고민해 결정한 이별이었다. 


동해와 혁재가 고등학교 2학년 이었던 18살, 자신과 같은 반으로 전학 온 동해를 보고 혁재는 첫 눈에 반해버려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살았는데 난생처음 어울리지도 않게 오지랖을 부려가며 동해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마침 혼자 앉아 비어있던 혁재의 옆자리에 짝꿍으로 앉게 된 동해, 1교시부터 피곤하다고 잠에 들었다가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의 기척에 깨어난 혁재는 갈색의 결좋은 머릿결을 휘날리며 그 예쁜 눈을 초승달 처럼 휘면서 자신에게 반갑다고 친해지고 싶다고 웃으며 인사를 걸던 동해의 얼굴을 거진 15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그 바다같이 맑았던 웃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친구였고, 점점 친해지면서 동해도 자신과 같은 감정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을 때 걱정은 됐지만 그래도 서로의 관계에 정확한 정의를 맺고 싶어 용기를 가지고 동해의 집 앞에서 서툴게 했던 고백, 서투른 고백에도 감동하며 눈물이 맺힌 눈으로 울면서 웃는 아주 이쁜 얼굴을 한 동해. 사귄 지 12년이 흘러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맞이 했지만, 혁재는 아직도 자신이 동해를 사랑하고 평생 동해를 잊지 못한다는 걸 장담할 수 있다.


혼자서 멀쩡한 꼴로 안주도 대강 시켜놓고 소주를 부어라 마셔라, 주변 사람들이 혁재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게 박혔지만 혁재는 무시한 채 12년의 사랑을 추억하고 있다.


혁재 자신은 댄스부를 하면서 춤을 전공하기 위해 실용무용을 지망하고 동해는 광고를 배우고 싶어서 언론정보를 지망하며 같은 대학을 가기 위해 노력하자는 동해의 말에 생전 하지도 않던 공부도 했던 혁재, 수시로 합격한 동해와 수능이 끝나고 정시로 실기까지 다 본 후 최종 합격을 한 혁재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졸업여행을 가자고 야살스럽게 웃던 동해의 귀여운 모습, 그리고 처음 서로의 몸을 매만지며 사랑을 나눴을 때 고통스럽고 아프면서도 혁재의 것을 온전히 받아드리려고 꾹 참으며 품에 안겼던 동해의 사랑스러워 마지않던 모습.


12년간의 연애사가 마치 영사기를 틀어 돌려놓는 거 처럼 취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혁의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비참해도 헤어지지 말걸 그랬나? 나만 참으면 됐을 텐데 차라리 내가 이별을 감내할 용기를 갖지 않았다면 동해는 나에게 오랜 시간 이별을 얘기 하지 않을 텐데 온갖 후회들이 떠올랐지만 혁재는 다시 생각해도 그 고통을 또 감내하고 다시 되돌릴 자신이 없어졌다.


동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을 때도, 섹스를 할 때는 자신을 바라봐주었지만 다 끝나고 나서는 혁재 자신을 등지고 잠든 모습을 보일 때도, 동해의 일이라던지 동해 본인에게 관련된 일이 생겼을 때 혁재에게 먼저 얘기 해주지 않아 제 3자인 남의 입에서 들었을 때도 혁재는 다 괜찮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참았던 것들이 쌓이고 종내에는 동해가 자신을 귀찮아 하는 게 눈에 보였을 때 그때는 혁재도 참을 수 없이 자신의 마음과 처지가 비참해졌다.







"총각, 이제 문 닫을 시간이야!! 얼른 일어나서 집에 가야지!!"







저녁 12시를 넘어 새벽이 다 지나가고 있는 시각, 가게를 닫으려는 사장님의 격양된 목소리에 혁재는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술값을 계산하고 포차를 빠져나왔다.


평소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지나다니는 거리는 주말의 새벽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갈 곳을 잃은 혁재의 다리, 발 길이 닿는 대로 걸어 택시를 잡아 뒷자리에 몸을 집어넣고 집 주소를 대강 얘기한 혁재는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몇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늘 아침. 동해와 이별을 하고 처음으로 맞는 하루구나. 그렇게 사색에 잠겨있는 혁재를 보고 있던 기사님이 말을 걸었다.







"총각, 무슨 일 있어요? 젊은 양반이 왜 이렇게 우울해."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하고 헤어지기라도 했나보네."


"......."


"총각이 아주 많이 힘든가 보네"


"........"


"....사랑하는 사람한테 총각이 차인건가?"


"...아니요, 제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근데 왜 총각이 버림받은 얼굴을 하고있어?"


"....헤어지자고 한 건 제가 맞는데, 헤어지지만 않았지 버림받은 지는 꽤 됐거든요"


"....근데 후회되나보네, 총각은."


".....맘 굳게 먹어야지 하면서 고심 끝에 정한건데, 벌써 후회돼요..."


"총각, 내가 재밌는 거 들려줄까?"


"......뭔데요?"








백미러 넘어로 보이는 나이가 들어 중후하지만 인상이 좋아보이는 택시기사의 눈, 혁재는 주량을 넘기며 마신 깡소주에 속이 쓰려 가슴을 부여잡고 핸들을 잡고 있는 택시기사의 뒷 모습을 흘깃 보았다.








"만약 총각이 되돌리고 싶은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총각은 다시 돌아 갈텐가?"


"......다시 되돌리고 싶은 순간으로?"


"맞아, 그게 언제 어느 순간이던간에 돌아갈 수 있고, 되돌릴 수 있다면 말일세."








혁재는 평소에 들으면 실없는 택시기사의 농담이라고 치부하며 잠깐 웃고 넘겼겠지만 허무맹랑한 얘기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니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 돼어있는 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순 없겠지만, 돌아가서 다시 보고 느낄 수만 있다면 다시 가겠죠."


"만약,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


"그래도 총각은 다시 그 순간으로 그때를 되돌아 보고 오겠나?"












내게 되돌리고 싶은 순간, 혁재는 차창에 기댄 몸을 바로 세우고 생각에 빠졌다. 


첫번째 순간은 오늘 동해에게 이별을 통보한 순간...


그리고 제일 가고 싶은 두번째 순간은 처음 동해에게 나의 감정을 고백한 날.....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다면, 그냥 친구로서 라도 동해의 곁을 지킬 걸....


혁재는 많은 순간들을 떠올렸지만 지금 당장 되돌리고 싶은 순간으로 가장 머릿속을 괴롭히고 혁재를 후회하게 했던 순간을 되짚었다.












"생각을 좀 정리 해봤나, 총각?"


".........네, 저한테도 있네요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돌아 갈텐가? 갈 수 있다면."


".......네,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다해도 가고 싶어요"


"....그렇군, 그럼 총각의 목적지를 그 곳으로 향하여 보내줄테니 잘 다녀오게..그 순간의 결정을 막아내는 것도 그냥 그 순간을 흘려보내고 바꾸지 않는 것도 다 총각의 선택이니 신중하게 행동하길 바라네."








택시기사의 말이 끝나는 순간, 술에 취해 흐리던 혁재의 눈 앞이 태양을 맨 눈으로 바라보듯 찡그려졌다. 고통에 순간 눈을 감고 뜨니 새벽이라 어두컴컴했던 하늘이 마치 낮인것 처럼 해가 쨍쨍 떠 밝혀주고 있었다.












"....이....이게 뭐야?!?"






혁재가 눈을 한번 감았다 뜨니, 택시 안이었던 눈 앞의 풍경이 혁재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실 안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뭐지? 지금 내가 왜 학교에 있지? 혁재가 자신의 몸을 살피니 원래 혁재가 입고있던 블레이저 자켓에 청바지가 아닌 자신의 모교 교복이 입혀져 있었다.


진짜.....시간을 되돌려 준건가?......어떻게 된거지? 지금 꿈꾸는 건가?


어리벙해진 혁재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넋이 빠진 채 눈앞의 칠판을 보았다.







'지금.......설마 아침조회 시간인거야?'






혁재가 고3이었을 적 담임 선생님이 애들 출석체크를 하고 있고, 선생님이 마침 고개를 든 혁재의 이름을 불렀다.






"이혁재, 넌 고삼이 잠이 잘도 오나보다."


"......"


"정신 차리고 수업 들어라, 아무리 예체능이라도 또 벌점 깍이지 말고."








이상 조회를 끝낸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고 애들이 떠드는 소리에 산만해진 교실, 혁재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아이들을 보고 자신이 돌아온 순간이 언제인지를 깨달았다.


그 날이구나, 내가 동해에게 고백한 날. 평소처럼 동해네 집에 데려다주고 내가 널 사랑한다고 누가봐도 멋없다 싶을 정도로 서툰 고백을 했던 그 날.....







'정말, 오늘 내가 동해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우린 친구로 남게되고 난 너의 곁을 우정이란 이름을 하더라도 지킬 수 있는 걸까?'










혁재는 1교시인 국어가 들어와 수업을 시작했을때 까지도 정신을 놓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곧 점심시간이 오면 동해네 반으로 가야하는데....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이혁재의 모습으로 평소처럼 동해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혁재는 많은 걱정이 됐지만 결국 정답은 동해에게 고백을 하지 않는 걸로 정하고 수업시간을 대강 때웠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드디어 겁을 내던 점심시간, 혁재는 느즈막히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의 반이던 5반에서 동해의 반인 3반으로 향했다.









"야! 이혁재, 오늘 왜케 늦게 와!! 애들 다 가서 오늘 점심 줄 엄청 길겠다"









해맑은 미소를 하고 혁재에게 어깨동무와 헤드락을 거는 동해, 혁재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어리지만 해사한 동해의 얼굴에 잠깐 넋을 놓았다가 답을 했다








".......아 잠깐 졸았다가 좀 늦게 깼어, 미안"


"으이그, 고삼이 잘하는 짓이다!! 나하고 같은 대학간다고 큰 소리 뻥뻥치던 이혁재 어디갔냐고요!!"








혁재 자신의 마음을 고백도 하기 전, 공부를 잘하는 동해와 어떻게든 같은 대학을 가겠다고 장담했던 혁재, 그때는 힘들어도 동해가 공부를 도와줘서 그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는데....









"빨리 가자!!나 배고파...오늘 수요일이라 점심 맛있는 거 나오잖아, 빨리 가야 하나라도 더 먹어"


"....응, 빨리 가자"








쏜살같이 혁재의 손을 붙잡고 식당으로 달려가는 동해, 혁재는 그 기묘한 택시기사 아저씨가 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지 가슴으로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던 동해와 자신, 혁재는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싶어 되돌아 온지 체감 몇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 동해와 이별한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다.


동해에게 이끌려 빠른 속도로 식당으로 달려가 줄을 서서 밥을 퍼와 친구였던 예전의 모습으로 밥을 먹고 있는 혁재와 동해, 서로 수업시간에 있었던 얘기를 하며 편안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동해의 표정, 내가 지금 있는 이 순간은 뭐지? 난 오늘이 지나고 나도 이 순간 이 시간대에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혁재는 동해가 웃는 것을 보니 현실의 동해가 저렇게 환하게 웃었던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 동해에게 향하는 마음이 사랑임을 인정했을땐 동해가 항상 행복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래서 동해가 나에게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참고 또 참아내며 동해에게 모든 걸 맞췄는데도 결국 난 동해가 계속 행복하게 웃게하지 못했네....


그렇게 혁재는 속으로 동해에게 미안함과 잘해주지 못했던 것에 후회를 가지며 밥을 다 먹고 소화를 시킬 겸 운동장에서 바람을 쐬고나니 점심시간이 끝나 5교시 수업이 시작됐다.








'오늘 고백을 하지 않으면, 현실에선 동해와 그저 친구로 남는거 겠지....그래, 그래도 괜찮아, 그게 동해한테 더 좋은 거라면'









혁재가 마음을 정리하며 책상에 앉아있다보니 종례시간이 다가왔고 혁재는 마음을 다시 한번 굳게 먹고 종례가 끝이 나자마자 동해네 반 앞으로 갔다.








"어, 오늘 종례 일찍 끝났네? 빨리 와있는 거 보니까"


"어, 오늘은 왜인지 빨리 끝내주더라"


"그럼 빨리 가자, 아 근데 오늘 나한테 할말 있다며"


"내가, 그랬나?"


"뭐, 아님 말구"







툴툴 입이 살짝 내밀고 먼저 앞장 서 복도를 걷는 동해, 혁재는 빠른 속도로 뛰어가 동해의 옆에서 같이 교문을 통과했다.


항상 동해네 집에 가던 415번 버스, 품에서 교통카드를 꺼내 키패드에 찍으려는데 버스기사 아저씨가 혁재와 동해에게 인사를 걸었다.







"안녕, 총각?"








어딘가 익숙한 얼굴, 살갑게 웃으며 동해와 혁재에게 웃을 짓는 사람은 택시기사 아저씨였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구나, 오늘 내 마음을 고백 하지 않고 동해와의 관계를 마무리 지은 채.


혁재는 대강 눈짓으로 기사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옆에 동해를 앉혔다. 이렇게 항상 버스를 탈때마다 동해의 mp3를 켜서 같이 노래를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동해는 앉자마자 mp3를 꺼내 재생을 하고 혁재의 귀에 한쪽 이어폰을 꽂아 주었다.









-











그때 동해가 책이였다면 닳았을 정도로 자주 듣던 노래, 정말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흐릿할 정도인데 이런 순간에 이 노래를 진짜 오랜만에 듣게 되네.....


현실의 우리를 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슴 깊숙이 가시처럼 콕콕 박히는 가사, 이 노래 속 화자는 결국 그 사람을 잊고 나중에는 하늘에서 만나자고 하지만....난 그것조차 하지 못하고 잘하면 이젠 너와 친구로 남겠지.


넌 나와 연애를 하지 않았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은 둔 평범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 했는데, 친구가 되면 그걸 옆에서 온전히 지켜보게 되겠구나. 아직 눈 앞에서 일어난 일도 아닌데 혁재는 가슴이 쓰려 노래를 듣다가 피곤한지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시 졸고 있는 동해의 정수리에 동해가 깨지 않게 조심히 움직여 살포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도 살짝 기대었다.








'동해야, 난 니가 행복하면 다 괜찮아. 난 니가 내 옆에서 행복했으면 했지만....그게 아니라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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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과거의 동해와 잠시 그 순간에 흘러들어간 혁재가 버스를 감싼 햇볕에 잠시 졸고 있을 무렵,


현실의 동해는 이맘때쯔음 매년 동해를 괴롭히던 환절기의 몸살을 겪으며 혼자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집에서 앓고 있었다. 이번 몸살은 마음도 지쳐 이별의 후유증과 함께 찾아왔기 때문일까? 동해는 원래 아프던 것보다 심하게 앓고 약만 간신히 먹고 누워있었다.


이렇게 가을이 찾아와 일교차가 심해져 동해가 아플때쯤이 오면 항상 혁재는 동해보다 먼저 동해의 몸상태를 체크하고 자신의 스케줄을 다 빼서라도 옆에서 병간호를 해주었는데, 엊그제 토요일날 갑작스럽게 혁재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동해는 한숨자고 일어나자마자 아파서 월,화요일 다 연차를 쓴 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혁재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나쁜 새끼, 어떻게 날 카페에 두고 내 얘긴 들어주지도 않고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냐. 나 이맘때쯤 아플 거라는 건 까먹었냐'









아픔으로 정신이 흐릿한 동해는 그렇게 쉽게 매정히 떠난 것 처럼 보이는 혁재를 원망하고 있었다. 

털고 일어나면 다시 얼굴 보자고 해야지, 자기 얘기만 하고 그렇게 가고, 난 이렇게 쉽게 헤어지는 거 인정 못해.


그때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동해의 휴대폰이 벨소리와 함께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뭐지? 회사인가? 하는 마음으로 휴대폰 화면을 봤을 때 휴대폰 화면에 혁재의 어머니 번호가 크게 떠있었다.








"....네, 어머니!"


-동해야~, 너 혹시 혁재하고 연락 되니?


".....왜요? 혁재, 혹시 연락 안돼요?"


-아니 토요일부터 애가 전화를 안받네, 근데 동해 지금 어디 아프니?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좋아?


"아...감기 몸살이 와서 좀 누워있었어요...."


-아이고 혁재, 이놈이 동해 아픈데 전화도 안받고 어딜 간건지. 알았다 일단 동해 몸조림 잘하고, 내가 서울가면 얼굴 보자~


".....네, 어머니."









동해는 혁재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아픔도 잊은 채 자리에서 털고 일어섰다. 이혁재가 딴건 몰라도 어머니 전화를 며칠동안 아무말도 없이 안받는다고? 


설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동해는 손을 덜덜 떨고 불안함을 느끼며 서둘러 자신과 혁재의 겹친구들에게 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아무도 혁재가 어디 갔는지 동해보다 자세히 아는 친구가 한명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안무팀에도 전화를 했는데 혁재가 며칠 쉰다는 얘기를 했다고만 말을 하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듣고 동해는 급하게 겉옷을 챙겨 입고 차키를 들어 집을 나섰다.









'이혁재, 잠깐 헤어졌다고 이상한 생각한건 아니겠지? 설마 무슨 일 생긴거야?'










악셀을 밟으며 급하게 도착한 혁재의 집, 요즘은 항상 혁재가 동해의 집에 와서 데이트를 했기 때문에 동해는 오랜만에 혁재의 집에 왔다. 1015번 집을 이사가더라도 항상 혁재의 집 비밀번호는 동해의 생일, 빠른 속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비번을 누르고 혁재의 집에 들어갔건만 마치 사람이 이젠 살지 않는 거 처럼 혁재의 집안에는 가구와 짐들만 그대로 있고 혁재는 없었다. 


멀뚱히 그 풍경을 보던 동해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을때 빈 소주병들이 여러 병 거실에 놓여있고 혹시 자고있나 싶어 동해가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도 침대위에도 혁재는 없었다.







'......어디....어디...간거지?......집에도, 친구한테도,직장에도 혁재가 없으면.....난 혁재를 어디서 찾아야 하지?'









동해는 정말 자신이 혁재에게 하나도 신경쓰지 못하고 정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는 걸 처절히 깨달았다. 요근래 혁재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 지, 어딜 자주 가는지 하나도 머리속에 떠오르는 게 없다니....내가 혁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가? 동해는 혁재를 원망했지만, 이젠 혁재의 얼굴을 다시 보아도 혁재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졌다. 경찰에 신고를 할까? 아니지 성인이라 가출신고 밖에 안될텐데....동해는 갈 곳을 잃은 채 침대위에 겉옷도 벗지 못하고 기운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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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이제 집에 다 왔네."








버스에서 잠시 졸고 일어난 둘은 원래와는 달리 두 정거장을 더 가서 깨어나고, 급히 일어나 천천히 동해의 집으로 걸어갔다. 원래의 기억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 순간. 종알종알 자신과 어울리는 귀여운 얘기들을 하며 언덕을 조금 넘어 동해의 집앞에 다다랐을때 그냥 뒤돌아 가려는 혁재를 동해가 갑자기 잡았다.







"....그냥, 가려고?"


"...왜? 나도 집에 갈려고"


"좀 있다가 가지, 아니면 우리집에서 게임 한판 하고 가"


"...괜찮아, 내가 오늘 좀 피곤해서"


"........"


"동해, 나 갈게 잘 있어."


"....잠깐, 오늘 할말 있다고 했지않아?"


"아니야...나중에 할게."








혁재는 현재를 바꾸려고 살짝 매정하다싶이 동해를 두고 굳게 마음먹은 걸 되새기며 다시 뒤돌아 집으로 가는데, 어느정도 동해의 집과 멀어졌을 때 갑자기 동해가 뛰어와서 혁재의 등에 백허그를 하며 안겼다.







"....혁재야, 니가 할말 없어도....내가 할말 있어"


"......"


"사실....혁재야 나...."


"아니, 동해야....나중에 얘기하자 나...가야돼"






동해가 끌어앉은 허리춤의 손을 떼어내고 뛰어서라도 그 순간을 피하려고 한 혁재를 동해는 더 힘을 주어 놔주지 않으려고 더 꽉 혁재의 등에 안겼다.







"아니야, 듣고 가...오늘 꼭 이 감정에 대해 결말 짓고 싶었어"


"....."


"혁재야, 나 너 좋아해"










결국 혁재가 하지 않으려고 한 멋은 없어도 진심이 담긴 서툰 고백이 혁재의 입이 아닌 동해의 입에서 꼭 영화처럼 튀어 나왔다. 


결국 우리는 바뀌지 않는구나, 내가 널 놓아주어도 니가 나를 붙잡아 주는 구나....혁재는 자신의 등에 매달린 동해의 얼굴을 보고 그 고백을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을 알기에 이 순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고, 동해와 자신은 우정으로 남지 못한다는 걸 눈앞에 순간이 다 와서야 깨달았다.










"왜....대답 안해?...너도 나 좋아하잖아."


"......"


".....혁아....혁재야"








동해는 허리춤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혁재의 얼굴을 보기위해 혁재의 앞으로 걸어가는 순간, 혁재가 동해의 손목을 잡고 동해를 품 안에 꼬옥 껴 안았다.









"동해, 동해야, 나도 너 좋아해....아니 사랑해."


"...혁아?"


"너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난 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나봐, 힘들어도 비참해도 널 떠날수가 없을 거 같아..."


"....혁아, 혁재야...너 울어?"








동해의 입장에선 갑작스러웠지만, 혁재는 이 순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동해의 어깨를 적시며 사랑하다는 얘기만 하고 감정이 주체되지 않은 혁재를 동해가 혁재의 품에 안겨 목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위로 해주는 걸 느끼면서 둘은 한참 그 길목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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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 그 순간은 잘 되돌아보고 왔나?"







한참을 동해를 품에 안고 울고, 사랑한다고 동해의 귓속에 속삭여 준 혁재는 동해를 다시 집에 데려다 주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왔다. 동해는 혁재를 보내주기 전 환하게 웃으며 오늘이 지나고 나면 우린 친구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다시 마주 보겠다고 설레하며 집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되돌아 오는 길. 혁재는 다시 현재로 되돌아 간다면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동해에게 용서를 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조금 있다 들어오는, 그때 당시 동해의 집과 반대편이었던 혁재의 집으로 가는 718번 버스, 카드를 찍고 버스기사님을 보니 자신을 이 곳으로 향하게 한 반가운 얼굴이 인사를 했다.









"이제 총각은 현실로 다시 돌아가면 어쩔건가?"


"빌어야죠, 때리면 때리는대로 맞고, 무릎도 꿇고...그렇게 해서라도 다시 사랑하자고 해야죠."


"결국 바꿀 수 없는 순간이란 걸 깨달았고만."


"네"


"그럼 목적지는 말 안해도 알겠네, 자리에 가서 앉게나"








아무도 없이 하나의 목적지로만 향하는 텅 비어있는 버스, 혁재는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동해와 항상 앉던 뒷문 앞 자리로 가 창가 쪽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