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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우리에게] 개판ly ever after_호쥐

이혁재는 오랜만에 을이 된 기분을 느꼈다데뷔 9년 차에 사람들 다 알만한 곡 여럿 낸 가수가 된 이후로 빌빌 기는 건 끝이라 생각했었는데


제발부탁 좀 하자나 이번에는 그 사람 아니면 안 돼.


상대방한테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을 게 뻔한데도 혁재는 무릎을 꿇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그 위대하신 작곡가 하루에게 곡을 받기 위해평소의 혁재는 이렇지 않았다작곡가가 곡을 안 주겠다고 하면 이 세상에 널린 게 작곡가라며 빠른 포기를 외쳤다하지만 정규 3집이 차트 인도 못 할 정도로 망한 이후의 4집은 어떻게든 성적을 거두어야 했다길거리에서 맨날 들리고 음원 차트 1등 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못해도 중타는 쳐야 했다


연예계에 발 들이고 있는 가수들에게 이런 상황에 해결책은 무엇이냐고 조언을 구한다면 아마 모두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하루에게 청하여라찾아라너희가 답을 얻을 것이니


작곡가 하루에게 곡을 받은 가수들은 모두 음원 1위를 찍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하루가 만드는 노래는 좋았고하루의 곡을 받으면 히트를 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며 하루는 가요계의 신이 되어갔다하루는 유명했지만하루의 노래는 모두 성공한다.라는 공식과 활동명 빼고는 하루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었다활동명만 알려진 그 모호한 익명성으로 하루는 더욱 신성시되었다


종교에서 신에게 컨택할 수 있는 방법이 기도라면 가요계에서 하루에게 컨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메일뿐이었다


하루에게 곡을 받은 적 있는 친한 선배와의 비굴한 전화 20분 끝에 혁재는 나중에 발매할 노래에 피처링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겨우 메일 주소를 받아냈다harua1dai@gmail.com 이 열 몇 글자를 알아내겠다고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다시피 한 건가혁재는 허무함을 느꼈지만 자존심보다는 하루에게 곡을 받는 게 우선이기에 일단 곡을 부탁하는 메일부터 썼다.



하루는 바쁘지도 않은지 메일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일 창에 읽음’ 표시가 떴다하루가 메일을 읽었다는 걸 확인한 혁재는 미친 듯이 F5를 눌렀다아무리 새로고침을 해도 새로운 메일은 도착하지 않았다


까였다는 걸 직감한 혁재는 다른 작곡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애초에 작곡가로 하루를 생각했던 상황에서 다른 작곡가의 노래를 들으니 성에 차지 않았다혁재는 하루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고또 보냈다


3통의 메일을 보낸 끝에 하루는 혁재의 곡 의뢰를 받아들였다메일을 보고 신난 혁재는 맥북 화면에 입술을 갖다 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한참 행복을 맛본 뒤에야 혁재는 하루에게 원하는 템포분위기다이내믹컨셉 같은 여러 요구사항을 적어 바로 답장을 보냈다



하루는 메일로 가이드를 보내왔다기대감에 부풀어 가이드를 바로 재생한 혁재는 순간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들어본 듯한 노래는 아닌 것 같은데샘플링을 내가 아는 노래로 했나노래가 너무 좋아서 이상한 건가혼자 여러 추측을 하며 혁재는 다시 노래를 플레이했다가이드에 만족한 혁재는 이내 기시감을 잊고 이 노래를 어떤 식으로 수정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곡을 수정하고 픽싱하는 것까지는 수월하게 진행됐다곡의 녹음부터가 문제였다신상이 알려지는 걸 싫어하는 하루가 스튜디오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작곡가가 디렉팅을 봐주지 않으니 혁재는 알아서 녹음을 마쳐야 했다혁재의 프로듀싱 팀과 녹음을 진행했지만 도통 만족할만한 퀄리티가 나오질 않았다작곡가의 디렉팅 없는 녹음은 점점 방향을 잃었다



혁재는 작사로 얻은 글솜씨를 메일에 쏟아부었다곡을 의뢰할 때보다 훨씬 길게 구구절절 적어낸 말은 프로듀싱을 부탁드린다는 말이었다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이름도 안 알려진 작곡가가 얼굴을 까고 와서 프로듀싱을 해주지는 않을 테니


혁재의 구구절절한 노력에 신이 감동한 건지하루가 감동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루에게 메일이 왔다다른 사람 달고 오면 각오하라는 내용이 담긴 정중한 협박과 함께 주소와 시간이 날라왔다



작곡가 하루의 얼굴을 본 순간혁재는 가이드를 들었을 때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들어본 듯한 노래여서도 아니었고노래가 너무 좋아서도 아닌그냥 목소리가 익숙해서였다작곡가 하루는 혁재의 전 애인동해였다


연애의 끝은 아름다울 수 없다아름다운 이별은 나쁜 놈이 되기 싫은 사람들이 지어낸 모순의 극치에 불과하다혁재와 동해의 끝도 진흙탕이었다둘은 개판으로 싸우고 헤어졌다개판의 끝마무리도 개판이었다치고받고 싸우고 난 뒤동해는 혁재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혁재는 어땠나동해의 일방적 무시에 보란 듯 군대로 떠나버렸다따지고 보면 둘은 헤어지잔 말도 제대로 하지 않았었다둘의 싸움이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가 서로 쌩깠으니 말이다


이 둘의 개판 같은 끝은 예상외의 것이 아니었다혁재와 동해는 처음부터 끝까지 맞지 않았다단골 식당도 달랐고 주량은 천지 차이였으며 성격은 모르는 사이로 지내는 게 둘에게 이득일 정도로 극과 극이었다식성부터 성격가치관까지 다 다른 둘은 하고많은 것 중에 딱 두 개만 맞았는데 그게 하필 음악 취향과 속궁합이었다


혁재와 동해는 동물의 왕국마냥 물고 뜯고 싸우다가 섹스했다둘의 연애는 싸움과 섹스 두 단어로 설명이 끝났다물론 가끔아주 가끔 사이가 좋을 때도 있었다혁재가 동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거나 동해가 혁재에게 작곡한 노래를 들려줄 때만은 서로에게 귀 기울였다혁재에게 동해는 피곤하지만 노래는 드럽게 잘 만드는 놈이었고동해에게 혁재는 빡치지만 목소리는 좋은 새끼였다



혁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앞에 서 있는 동해가 작곡가 하루라니혁재가 하루에게 가지고 있었던 온갖 신성한 이미지가 와장창 깨져버렸다혁재의 정신이 저 멀리 날아가 있는 동안 동해는 아무렇지 않게 스튜디오 테이블에 앉았다


이동해너 뭐야.

뭐긴 뭐야네가 그렇게 찾으시던 작곡가 하루지.

난 널 몰랐어도 넌 날 알았잖아미쳤다고 내 의뢰를 받아!

안 미쳤는데그리고 난 처음에 메일 씹었다니가 삼고초려를 하셨잖아요그래서 어차피 얼굴 안 보니까 그냥 받아줬더니만 또 기어이 얼굴을 보겠다며.


동해가 따지는 말에 혁재는 말문이 막혔다혁재가 동해에게 곡을 받겠다고 빌었던 것도프로듀싱해달라고 발목 잡았던 것도 다 맞는 말이었다


아니시발그럼 거절하지.



동해는 사실 혁재에게 처음 곡 의뢰를 받았을 때부터 딱히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이혁재가 요즘 뭘 하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니까딱 전 애인 인스타그램 찾아보는 수준의 궁금증이었다게다가 동해는 혁재의 목소리를 꽤 좋아했다동해도 자존심이 있으니 첫판부터 수락할 수는 없어 일부러 메일을 보고도 못 본 체했었다


프로듀싱 제안도 처음에나 고민했지동해는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해버렸다프로듀싱 해달라는 부탁이 다른 가수가 한 것이었다면 바로 메일 차단을 꾸욱 눌렀을 것이다혁재가 음반을 발매할 때마다 내가 프로듀싱하면 이거보다 훨씬 나을 텐데 생각하며 남모를 우월감을 느꼈던 동해였다그 우월감을 실현할 기회를 날리기는 아까웠다물론동해에게 이혁재한테 미련이 있다는 둥 이야기를 한다면 바로 주먹이 날아올 것이다이혁재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이혁재 목소리랑 노래에만 관심이 있는 거라는 외침과 함께 말이다



혁재의 충격은 뒤로 한 채노래의 녹음 작업은 잘 흘러갔다이틀 만에 녹음을 끝내고 바로 곡 믹싱 작업에 들어갔다혁재는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끝난 노래를 들으러 동해의 작업실에 갔다방음 잘되는 작업실에서 둘은 지 버릇 개 못 주고 또 섹을 떴다혁재와 동해의 끝나지 않았던 개판은 재회한 지 나흘 만에 다시 시작되었다



여전히 혁재와 동해는 동물의 왕국 한복판이다싸우고자고싸우고자고의 연속점심 메뉴를 정하다가 싸우고운전하다가 싸우고하다 하다 섹스 중에도 싸웠다그래도 전과는 달리 싸우고 절대 서로를 쌩까지는 않았고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도 않았다



TV를 보다가 연애편지가 언제 종영했는가?라는 검색만 하면 답이 나오는 한심한 논제를 가지고 동해와 싸우던 혁재는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


내 4집 타이틀.

내가 작곡한 거?

우리에게그거 우리 얘기지.

넌 그걸 이제 알았냐등신아닮은 게 하나 없던 하면 딱 알아차려야지.

그럼 나보고 니 멜로디 평생 불러달라는 거지니 노래 평생 준다는 거지이거 종신계약이다빠꾸 금지.

아오이걸뭐 이쁘다고 그 좋은 노래를 널 줬는지우리랑 어울리지도 않는데.

잘 어울리잖아어제보다 많은 내일을 함께할 거야~

쪼개지 마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