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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종강] 종강, 그리고.._달빛바다

[은해] 종강, 그리고..
w. 달빛바다

#월간은해 #종강

 


조용한 방안에서 책상 위에 뒤집혀서 놓여있던 폰이 진동소리를 내다가 바닥으로 떨어져버린다. 꽤나 길게 울리고 있는데도 침대에 누워있는 이는 듣지 못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커튼이 쳐져있음에도 환한 방은 이불 속에 파묻혀 자고 있는 이를 제외한 세상이 한창 돌아가고 있는 시간임을 충분히 알게 했다.


여러 번 다시 진동알림이 와도 반응이 없던 그가 경기를 일으키듯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났다. 늦잠을 자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했는지 바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바닥에 떨어져있던 폰을 집어든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들어야할 강의가 세 개나 되는데 하나는 이미 끝나고 두 번째 강의가 진행중일 시각이었다.

대충 세수하고 아무 옷이나 입은 뒤에 집을 나서던 그가 부재중 알림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마지막으로 와있는 문자 내용을 보고는 자리에 굳은 듯 멈춰섰다. 그리고 약간의 버퍼링 뒤에 쏜쌀같이 집밖으로 나섰다.


[앞에 두 갠 그렇다치고 3시 반 강의도 한 시간 당겨진 거 알고 있는지?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동해~ -존잘선배님]

 

-

 

동해는 그 날 두시 반으로 시간이 당겨졌던 강의는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집이 학교에서 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인 거였다. 물론 그 강의마저 지각해서 눈칫밥 먹으며 겨우 강의실에 들어가 듣기는 했지만 아예 듣지도 못한 앞의 두 강의보다는 나았다. 축제도 끝나가고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어서 시험 힌트가 숨어있으니 꼭 참석하라는 강의들이었는데.. 축제 기간 내내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쯤 되니 동해는 시험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금 '그'에 대한 분노에 타올랐다. 친절히 문자를 보내 약올렸던, 스스로를 존잘선배라고 칭하는.

 

'그'라 함은 나이는 같으나 한 학년 선배인 혁재를 칭하는 말이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꼬여버려서  웬수같은 선배-물론 동해 입장에서였다-가 되어버렸다.
원하는 대학을 가겠다고 재수를 했던 동해는 원하는 과에 가게 되어 꿈에 부풀어있었고 처음 동기와 선배들을 만나게 되는 OT를 굉장히 기대했었다. 동갑인 선배들을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게 뭐 대수일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동갑이라고? 그래도 내가 선배인 거 알지? 말 놓을게. 놔도 되지, 동해?"
"...네."
"동해,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

 

동아리 가입 제안을 받아들인 것부터, 아니 이혁재랑 대화를 한 순간부터 잘못된 것이 틀림 없다는 게 동해의 생각이었다. 선배부심이 있는 것 같아도 일단은 같은 또래와도 동기들과도 두루두루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가입한 동아리는 동해의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수시로 부르는 것은 일상이고 술도 잘 못 마신다는데도-자기도 잘 못 마시면서-혼자 마시면 재미 없다면서 불러대는데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혁재랑 술 마시려고 재수한 게 아닌데!!!! 술을 같이 마셔도 혁재는 초반에만 좀 부추기다가 자신의 주량을 넘지 않는 선에서 마시는데 그 부추김과 약올림에 당하는 동해는 어느샌가 분에 못 이겨 주량을 넘어버리는 것이 또 문제였다.

 

"야, 이혁,째!!!!"
"동해 취했다."
"안 취했다고오! 너 내 말 들어보라고. 내가 너때문에 진짜"
"응응 그래, 동해- 네 맘 알아. 나한테 고마워하는 거 다 알아. 나같은 친구같은 선배가 어디있냐?"
"너같은 선배 필요 없다거!!!"
"네 맘 다 안다니까? 근데 동해, 너 말 놓는 거 취했으니까 봐주는 거야. 나 예의 중시하는 거 알지?"

 

얼마 안 가 '쿵'소리를 내며 동해가 테이블로 쓰러지듯 잠들어버렸다. 그런 동해를 보며 씩 웃은 혁재가 익숙한듯 동해를 부축해 일으켰다. "동해,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라는 동해에겐 안 들릴 말을 건네며 일어선 혁재가 술집으로부터 빠져나왔다. 택시를 잡으려던 혁재가 방향을 틀어 자신의 집으로 향해 갔다. 늘 집에 데려다주고는 했지만 오늘은 왠지 안 그러고 자신의 집에 데려갔을 때의 반응이 궁금했다. 재밌는 반응이 나올 것 같았다. 아 근데..

 

"힘들다. 동해 반응 보려고 하는 짓인데 생각보다 힘드네. 후회된다. 동해, 생각보다 무겁네?"

 

취한 사람을 옮기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절대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취해서 늘어진 동해를 고쳐메며 걸어가는 건 꽤 힘이 드는 일이었다. 겨우 집에 도착한 혁재가 동해를 침대에 눕혀주고 그 옆에 털썩 앉아버렸다. 아, 힘들어. 숨을 고르던 혁재가 잠든 동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말없이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던 혁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지막히 한 마디를 남기고는 방을 나섰다.

 

"동해 너무 무방비해서 큰일이네."

 

*

 

확실히 축제기간이 끝나니 기말고사는 더 빠르게 다가왔다. 누구씨 때문에 중간고사는 망쳤으니 기말고사로 만회하겠다고 생각했건만 그마저 실패할 위기에 놓인 동해는 결단을 내렸다. 혁재와 마주치지 않고 도서관에서 살겠다고. 하지만 같이 듣는 수업이 많아서-사실 학년이 다른데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도 의문이었지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제발 부탁이니 공부를 방해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면 들어줄까 싶은 마음에 하지만 들어줄 것이란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말해봤는데 흔쾌히 "그래, 동해." 란 답을 얻었던 동해는 그 의미가 뭔지 오래 가지 않아 깨달았다.

 

"뭔데?"
"뭐가 뭐야. 나지, 동해. 근데 동해 너 자꾸 나한테 말 놓네. 선배한테?"
"...요."
"착하다, 동해. 공부 같이하면 더 잘될거야. 난 재수강이라 동해보다 한 번 더 들었으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말이나 시키지 마."
"동해."
"요."

 

요, 를 붙이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혁재를 보던 동해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방해나 안 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말끝에 '요'를 붙여서 존댓말로 바꾸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과의 분위기상 후배들은 선배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규칙처럼 되어있기도 하고 나이 많은-한 살뿐이지만- 후배가 선배에게 말놓는 것이 눈에 띄기 쉽다는 걸 아는 동해였기에 참았다. 애꿎은 노트에 화풀이하던 동해가 웬일로 조용한 옆을 바라보았다. 내내 괴롭힐 것 같더니 또 공부는 꽤 열심모드로 하는 모습을 보며 의외라고 생각했다. 좀.. 선배답네. 이런 모습 보고 1학년들이 좋아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동해, 공부한다며. 나는 그만 보고 책 봐야지."
"보,고 있거든!!"
"뭐를. 나를??"

 

분명히 책을 보고 있는 거 같은데 딱 들켜서 당황했던 동해는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혁재에 더 놀라버렸다. 옆에도 눈이 달렸나 봐. 동해가 작게 혼잣말하듯이 한 말인데도 그걸 또 캐치해낸 혁재가 웃음이 터졌다.

 

"난 진짜 공부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뭐가?"
"나가자, 동해."
"뭐래. 나 공부할 거라고!"
"나 본다며. 나 실컷 보게 해주려고."
"됐거든!!"
"저기요. 조용히 좀 해주세요."

 

발끈한 동해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키워서 말한 탓에 주위의 눈초리를 받는 상황이 되었다. 동해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지고 그 상황이 웃기고 즐거운 혁재는 웃음을 참느라 끅끅댈 뿐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가방을 챙겨 아직까지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동해를 데리고 도서관을 나갔다.

 

"아 진짜 동해. 내가 동해때문에 웃는다."
"아, 몰라 너 때문이야!!!"
"근데 아까부터 계속..말이 짧네, 동해."
"...아닐걸?요? 아 몰라 배째. 시험이고 뭐고 존대고 뭐고. 다 망했다거!!!"
"..이동해."
"그렇게 목소리 깔고 부르면 내가...."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과는 다르게 굳은 표정을 하고 성까지 붙인 이름을 부르는 혁재는 꽤 무서웠다. 안 그럴 것 같지만 화나면 무섭다는 얘기도 들었었고 다른 사람한테 화내는 걸 우연히 본 적도 있었고. 화가 많이 난 건가. 동해는 괜한 객기를 부렸구나 싶어 후회했다.

 

"아니.. 그... 그니까. 잘못했는데...요."
"뭘?"
"아니.. 스트레스도 받고. 그.. 네."

 

마지막 자존심 아닌 자존심으로 '잘못했습니다'라는 직접적인 말은 못하겠고 눈치만 보면서 말을 흐리고 이 상황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동해는 아무 말이 없는 혁재에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뭐라도 말 좀 해줘. 근데 생각하다보니 또 억울한 거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싶고.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재수를 하면서 버틴 건 이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닌데. 땅굴을 파고들어갈 기세로 생각에 생각을 하던 동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걸로 창피하게 울 생각은 없었는데 그것도 이혁재 앞에서. 더 서러워진 동해였다.

 

"..동해, 울어?"
"몰라, 이 시끼야."

 

그 와중에 삑사리까지 나고 쪽팔려죽겠어서 더 서러워진 동해가 손등으로 눈가를 쓱쓱 닦아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도대체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을 했냐!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렇게 눈치 주는데! 선배같아야 선배 대접을 해주지. 매일 괴롭히기나 하고! 내가 너한테 괴롭힘 당하려고 그 힘든 수험생활 한 번 더 한 줄 아냐!!! 됐어. 다 필요 없어. 친구고 선배고 다 필요 없으니까 이제 아는 체 하지 마라."
"야, 이동ㅎ.."

 

동해는 제 할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고 싶었던 말을 해서 속이 시원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도 남는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바라본 혁재의 눈에서 느껴진 서운함 같은 감정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지가 잘못한 거면서 왜 서운하다는 표정이었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

 


요며칠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는데 너무 아무 일도 없었다. 불러서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고 공부한다는데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시험이 일주일 정도 남은 시점이라 못했던 시험 공부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잊고 있던 사람이 떠올랐다. 사실 잊고 있었다기보다 그가 사라진 것에 대해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인정하게된 것이었다. 같이 듣는 강의마다 옆자리에 앉아서 한 마디씩 툭툭 던지며 괴롭혔었는데 강의를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동해의 눈에 띄지 않았다. 도서관에서도 어딘가에 보일까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그럴 이유가 없는데.

 

"서운하게."

 

동해는 자기가 말해놓고 놀라 제 입을 막았다. 서운하다니. 말도 안 되는.. 되는 말인가? 같이 술 마셨던 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는데 파노라마처럼 그 날 일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울었었구나. 아는 체하지 말란 말까지 했다니. 근데 그렇다고 순순히 진짜 아는 체 안 하는 건지. 언제부터 자기 말을 잘 들어줬다고. 괜히 화까지 나는 동해였다. 공부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바라보지만 눈에 글씨가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덮어버린 동해가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어, 동해형. 어디가요? 아, 혁재형한테 가요?"
"어디 있다는데?"
"혁재형이 요새 동방에서 살면서 지저분해졌다고 동아리장 선배가 벼르고 있던데.."

 

동해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아리방들이 모여있는 건물로 향했다. 어디 멀리 숨은 것도 아니고 동아리방에 있었다니.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나 싶다가도 동해 자신은 동아리에 가입한 후로 동아리방에 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위치가 어디라고 들은 적은 있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지나가는 이에게 물어서 찾은 동해는 문앞에 서서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혁재를 찾으러 온 건지 이유를 몰랐다. 다시 돌아가기는 아쉽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간 동해는 오래지 않아 자고 있는 혁재를 발견했다.

 

"눈에 띄지 말라고 진짜 피하냐."
"..."
"진짜 자는 거 맞지? 근데 안 자도 자는 척해 그냥."
"..."
"..나 피하지마."

 

피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갑자기 울컥한 동해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이 말이 그렇게 울컥할 말이었나 싶지만 저번에 그 때처럼 눈물이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중이었다. 눈물이 메마르다고는 생각한 적 없지만 이렇게 같은 사람때문에 그것도 혁재때문에 운다는 것이 못내 억울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눈에 띄지 말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피하지 말라고 하는 건 말이 안되는 게 맞았다. 하지만 피하니까 마음이 좋지 않은 걸, 속상한 걸.

 

"너 또 나 피해다니면.. 안 피해다니면 안되냐? 말 안 맞는 거 아는데 너가 나 피하니까.."
"..."
"이건 진짜 말이 안 되는 건데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동해는 말을 끝내자마자 도망치듯이 동아리방에서 나왔다. 진짜 자고있는 건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별 말을 다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해버린 말을 쓸어담을 수도 없고. 말로 하고 나니 인정은 쉬웠다. 좋아하는 거 같은 게 아니고 좋아하는 게 맞았다.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단순히 친구가 피한다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속상하고 눈물이 날 이유가 없었다. 왜 좋아하게 된건지가 걸리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왜'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나오는 동해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하고 나서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 동아리방을 찾았었다. 혁재를 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간 것이었지만 볼 수 없었다. 같이 듣는 과목의 시험은 이미 끝나있거나 과제 대체라서 불가능했다. 자주 갔던 식당 같은 데도 지나가면서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토록 원했던 방학이 왔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 때 사실 깨어있었고 고백을 들으면서 거부감이 들었던 것일까? 동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숨만 내쉬면서 걷는 동해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지만 다른 생각하느라 듣지 못했는지 진동이 멈출 때까지 몰랐다.

 

"동해."

 

다른 건 다 못 들었는데 또렷이 들린 목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춰선 동해가 이어서 들리는 소리가 없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가 싶은 게 더 우울해졌다.

 

"동해, 앞을 봐야지."

 

익숙한 목소리가 일러주는 대로 앞을 바라본 동해가 웃고 있는 혁재를 발견했다. 어두웠던 얼굴이 밝아짐과 반대로 얼굴이 울상이 된 동해였다. 반가움과 더불어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섞인 동해가 뭐라고 말도 못한 채 가만히 서있을 때 혁재가 그에게 다가왔다.

 

"동해, 또 울려고? 나때문에 너무 우는데?"
"..안 울어."
"그래 울지 마. 내가 동해 소원 들어줄건데."
"소원?"
"나랑 사귀는 거?"
"그게 무슨 소원.."
"사실 내가 먼저였는데 누가 선수치는 바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동해에게 조금 더 다가온 혁재가 살짝 볼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상황 파악이 된 동해가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고 혁재가 이번에는 입술에 한 번 입을 맞췄다.

 

"내가 먼저 좋아했다고, 동해."

 

*

 

방학한 뒤로 아무걱정 없이 놀던 동해는 얼마 전부터 카페 알바를 시작했다. 1학기 성적표를 보고 노는 꼴을 못 보겠으니 뭐라도 하라는 어머니의 성화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꽤 재미있는 일이라 큰 불만은 없었다. 오늘 새로운 알바 한 명이 들어오기로 했다는데 같이 일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하던 동해의 눈에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혁재가 보였다. 동해가 카페 알바를 시작한 이후로 자주 카페에 와서 놀랍지는 않았지만 보통 찾아오던 시간보다 이른 시각이라 그 부분이 조금 의아했다.

 

"동해, 내가 새로운 알바야."
"뭐?"
"나라고. 신입. 완전 반갑지?"
"..별로."
"누구를 원했는데?"
"너만 빼고."
"와, 동해 이러기야?"
"두 분 아는 사이인가 봐요."

 

동해가 혁재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카페 사장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혁재는 급히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청했다.

 

"동해씨가 잘 가르쳐줄.. 아니다. 독학하시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아는 사이라고 농땡이 치면 두 분 다 잘리십니다. 알죠?"
"아, 사장님!!"
"동해, 이럴 땐 그냥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는 거야."

 

동해가 뭐라고 말을 붙이려는데 혁재가 달래듯이 손을 잡자 기분이 풀렸는지 잠잠해졌다. 그런 둘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사장은 카페에서 나갔다. 사장도 나가고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없을 시간이라 카페 안은 조용했다. 오픈 준비를 마저 하며 혁재에게 가르쳐주려고 몸을 돌리는데 혁재가 그런 동해를 돌려세웠다.

 

"동해, 아직 손님도 없는데 놀자."
"안돼. 너 하나도 모르는데 알려줘야지."
"나 카페알바 해봐서 알아. 안 알려줘도 돼. 오히려 내가 알려줘야될걸?"
"얼마나 해봤는데?"
"작년에 학기중에 했었지. 동해, 내가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내가 알아서 뭐해."
"그냥 뭐. 알아두라고."

 

인기가 많았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근처에 회사나 학원들이 좀 있어서 가장 바쁜 점심시간 카운터를 보는 혁재는 쉴 틈 없이 일했다. 동해는 자신이 혼자 할 때도 이렇게 바빴나 싶을 정도로 바빠진 점심시간이 적응되지 않았다. 카운터는 혁재 차지가 되어버렸고 자신이 하게된 일은 커피를 내리고 음료를 제조하는 일이었다. 메뉴가 간소해서 다행이지 브랜드커피처럼 메뉴가 다양했다면 아직 만들 수 없는 음료가 많아서 혼자 다 할 수가 없을 거였다. 음료를 제조하면서 동해는 계속 혁재 쪽을 힐끔거렸다. 왜 저렇게 잘 웃어주는 건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손님이 많은 건데? 등등등..

 

"주문하신 아이스 라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저기요. 저기 카운터 보시는 분 새로 오신 거죠?"
"..네, 그런데요."
"잘 아는 사이세요? 혹시 이름이.."
"동해! 뭐해? 손님 맛있게 드세요. 저희 카페가 브레이크 타임이라.."

 

웬 브레이크 타임인가 싶었지만 이름이 어쩌고 묻던 손님이 카페를 나가서 다행이다 싶었던 동해였다. 짠 것처럼 카페 안에  그 많던 손님들이 다 자리를 비운 것을 보고 동해가 혁재를 쳐다보며 다 내보낸 거냐며 따졌다.

 

"내가 진짜 그랬겠어? 아까 그 손님한테만 장난친 거야. 너가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너 인기 많더라?"
"뭐야 동해- 질투했어?"
"나는 너가 그렇게 잘 웃는지 처음 알았네."
"나 너한테 제일 많이 웃어주는데? 질투한 거 맞네."
"너 이러려고 여기 들어온거지?"
"그럼! 동해 감시하려고 들어왔지."

 

한 마디도 안 지는 혁재에 항복한 건 동해였다. 카운터 보면서 번호 주고 그런 건 아니겠지? 갑자기 불안해진 동해가 혁재의 손을 잡았다. 한 손으로는 안 되겠는지 다른 손까지 잡은 동해가 비장한 표정으로 혁재에게 말했다.

 

"너 누가 물어보면 핸드폰 없다고 해야돼. 알았지?"
"나 여기 주머니에 있는데?"
"아, 쫌!! 한 번 말하면 알아들어보라고."
"동해, 걱정하지마."

 

언제 손을 풀었는지 혁재의 두 손이 동해의 얼굴에 가있었다. 그리고 도장 찍듯이 한 번 입을 맞춘 혁재가 활짝 웃어보였다. 그 웃음에 불안한 마음이 사르르 녹은 동해가 혁재가 한 것처럼 한 번 입을 맞췄다. 먼저 입을 맞춘 적은 처음이라 갑자기 부끄러워진 동해가 돌아서려는데 혁재가 그런 동해를 놔주지 않았다. 주위를 두어 번 돌아본 혁재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동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동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동해, 키스할 때는 눈 감는 거야."

 

동해의 눈이 감기자마자 마주친 두 입술은 딱 들어맞았다. 잔뜩 긴장해있던 동해가 서툴지만 혁재의 리드에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맞닿은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

 

"그게 아니라니까? 오해라니까?"
"됐어, 동해. 그동안 고마웠어."
"아씨 아니라고. 나 못 믿냐고. 어?"
"내가 다 봤는데 뭘 믿으라는 거야?"
"못 준다고 그랬는데 자꾸 달라고 말이 안 먹히니까 그냥 아무 번호나 쓴 거야. 진짜야."
"그 말 믿어도 돼?"
"응! 믿어!!!"
"생각해볼게."

 

카운터를 돌아가면서 맡았었는데 오늘은 동해가 카운터를 보는 날이었다. 동해에게 꽂힌 듯 매일 카페에 출근도장을 찍던 사람이 오늘은 번호 좀 달라면서 조르는데 안 준다고 해도 말이 먹히지 않아서 동해가 대충 아무 번호나 적었는데 그 장면을 딱 혁재에게 걸린 거였다. 혁재의 굳은 표정을 본 동해가 아니라면서 해명하는데 혁재가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애가 탔던 동해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애교까지 부려가면서 혁재를 졸졸 따라다녔다. 사실 혁재는 화는 진작에 풀렸는데 바로 이걸 기다리느라 못 믿겠는 척 하는 중이었다. 화가 난 척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던 게 있었는데 이렇게 나오니 종종 이 방법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든 혁재였다.

 

"아, 혁재야- 어? 나한텐 너밖에 없지. 그럼! ㅅ, 사, 사랑한다니까?"
"말 더듬지 말고 말해줘."
"... 너 들었잖아."
"못 들었는데? 동해, 내가 못 들었으니까 다시 말해줘."

 

어느새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서 재촉하는 혁재에 동해는 저 입을 어떻게 막지, 하다가 한 방법을 택했다. 수줍은듯 먼저 입을 맞추고는 겨우 들릴만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라 말하는데 혁재는 그런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입이 귀에 걸렸다.

 

"나도 사랑해, 동해."

 


*
비하인드 스토리-동해는 기억 못하는 혁재와 동해의 첫만남

 

혁재는 곧 군대에 가는 동기들과의 저녁 약속 때문에 약속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여유를 부리다가 나왔더니 시간이 촉박해져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던 중에 학원 건물에서 막 나오고 있던 동해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나 붙었다니까?? 아, 네. 괜찮아요."

 

무슨 통화를 하는지 부딪힌지도 몰랐던 것 같은 동해가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는 가던 길을 가는데 혁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지 환하게 웃으면서 통화하는 모습이 오래도록 혁재의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동해가 나온 건물을 확인한 혁재는 재수학원 간판을 발견했다. 대학에 붙었다는 통화를 하고있던 모양이라고 추측한 혁재가 학원 간판이름을 되뇌었다. 지나가다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우연인 척 몇 번 지나가도 다시 그 건물 앞에서 동해를 볼 수는 없었다. 현수막에라도 이름이 걸릴까 계속 확인했었는데 합격자 명단 현수막을 본 순간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회에 속한 동기의 힘을 이용해서 봤던 신입생 명단에도 사진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한 번 더 보고싶어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의아했지만 보고싶은 걸 어떡해. 그렇게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따라간 ot에서 동해를 다시 볼 수 있었다. ot에서도 못 보면 마음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던 혁재는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동해,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

 

거절하는 답변이 돌아와도 회유를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겠다고 생각했던 혁재는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자 환하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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