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은해 6월호 / 비행기
이혁재×이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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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넌 친구랑 이래?
우리는 같은 그룹의 멤버이기 이전에 인생의 절반을 함께해 온 친구사이다. 의좋은 친구라던가 각별한 사이라던가, 이러한 말들은 우리 둘 사이에 늘상 붙는 수식어 아닌 수식어였다. 개중에는 혹시 둘이 사귀는거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을때면 혁재나 나나 그냥 허허 웃었다. 그래, 우리가 좀 각별하냐. 이상할정도로 아주 각별한 사이지.
"아, 좀."
"뭐가."
"너 아까부터 자꾸."
내 입술에 쪽쪽거리잖아, 새끼야. 인상을 팍 구기고 얘기하니 오히려 더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거린다. 그 행동에 뭐라 할말을 잃은 내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이젠 아예 내 얼굴을 감싸곤 깊게 입을 맞춰온다. 밀어내는게 맞는건데 내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손도 부드럽고 다정하게 얽히는 그 느낌도 모든게 좋아 밀어낼수가 없었다.
우리는 종종 입을 맞추곤 했다. 처음 키스를 했던건 디앤이 첫 일본 투어가 끝나고 우리끼리 가졌던 술자리였다. 맥주 한캔을 깨끗이 비워내고 잔뜩 취기가 올랐던 내가 수고했다며 이혁재의 볼에 입을 맞췄고, 녀석은 그대로 날 잡고 키스했다. 처음 한번이 어려웠지 시작하고나니 한번이 두번이 되고, 두번이 세번이 되더니 나중에가선 이혁재는 내 의사도 묻지않고 대뜸 입술을 맞대왔다. 뭐, 사실 처음엔 별 생각없었다. 가볍게 내려앉는 포근한 느낌이 좋기도 했고, 때때론 진득하게 얽히는 혀가 달콤하게 느껴져 내가 먼저 입을 맞출때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혁재가 아닌 다른 친구랑도 키스할수 있는가. 서른 넘어서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특히 그 고민의 상대가 이혁재라는 것 자체가 웃겼지만 어쨌건간에. 하다못해 최시원이랑도 키스할수 있는가를 장장 한달동안이나 심각하게 생각해봤고, 끝내 도달한 내 결론은 이거였다. 아니, 절대 못 해.
혁재야, 너는 친구랑 키스해?
02. 묘한 경계선
"동해, 집에 있어?"
"알면서 온거 아냐?"
"맞아."
안그래도 싱숭생숭해 죽겠는 와중에 이혁재가 불쑥 집으로 찾아왔다. 익숙한듯 쇼파에 몸을 깊숙하게 기대어 앉는 이혁재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야, 나는 싱숭생숭해서 죽겠는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냐? 하고싶은 말이 가득찼지만 입 밖으론 꺼내지 않았다. 내가 그 얘기를 꺼냄으로서 잃게될 여러가지들이 생각났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것, 이혁재. 쉽게 떠나지 않을 녀석이지만 또 쉽게 곁을 내어주는 녀석이 아니란걸 알았기에 겁이 났다. 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기지개를 쭉 켜고 옆에 앉으니 혁재는 기다렸다는 듯 내 다리를 베고 누워 눈을 감는다. 얄미운 머리통을 밀어낼까 싶었지만 그냥 가만히 뒀다. 미워죽겠는데 안 미운게 이혁재다.
우리 둘이 있는 거실엔 적막이 흘렀다. 늘상 느끼는거지만 혁재와 나 사이의 침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근거없는 자신감을 준다. 돌려 얘기하면 괜찮지 않을까. 아직도 눈을 감고있는 혁재를 나지막히 부르니 왜,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진짜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야, 혁재야."
"응."
"내 친구 얘긴데.. 진짜 내 친구 얘기거든?"
"얘기해."
"내친구랑 걔친구랑 둘이 사귀는건 아닌데, 키스를 했대. 한번만 한게 아니고 얼마전에도 했대. 자주
하나봐."
"근데?"
"어.. 그러니까 내말은.."
너는 친구랑 키스 할수 있어? 내 물음에 혁재는 가만히 감겨있던 눈을 떴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내 물음은 안중에도 없는지 혁재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만보다 낮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못 해. "
라고. 그럼 우리는? 우리 친구 아니야?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그저 눈만 깜빡이다 웃어버렸다.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말을 돌리려고도 해봤지만 이혁재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굳은 표정을 하곤 다시금 대답해왔다.
"난 친구랑 키스 못 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3. 왜 네가 화를 내?
희철이 형이 꺼낸 말 한마디 때문에 콘서트 준비에 여념이 없던 연습실이 시끌벅적해졌다. 야, 이동해. 너 얘 알아? 형이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후배였다. 얘길 듣자하니 데뷔전부터 내 팬이였고, 형을 통해 나를 소개받길 원한다는 대충 그런 식의 말이었다. 아, 근데 나는 별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형들은 나를 빙 둘러싸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동해 여자친구 생기는거 아니냐? 새끼, 제대하더니."
"우리 동해 연애하는것 좀 보자."
"아니, 나는.."
참 이상한 일이지, 제일 먼저 나를 놀렸어야 할 이혁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형들에게 대답을 해주면서도 내 눈은 혁재를 찾고 있었다. 먼발치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혁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소 굳은 표정을 하곤 연습실을 박차고 나갔다. 왁자지껄한 주변의 소음이 아득해지고 방금전 이혁재의 표정과 나를 보며 중얼거리던 그 입모양이 자꾸만 생각났다. 씨발, 열받네. 라고. 야, 왜 네가 화를 내?
4. 눈치는 밥 말아먹었냐
그 일이 있고나서 이혁재가 내 입술을 찾아드는 횟수가 잦아졌다. 집으로 들어가는 나를 붙잡아 입을 맞추기도 했고, 심지어는 연습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는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아무일 없다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혁재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저 대단한 새끼를 어쩌지. 내 머릿속은 그 생각들로 가득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형들에게 조언이라도 구하는게 낫지 않을까싶어 내 옆에 앉아있던 희철이형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왜. 형은 다소 신경질적인 말투로 대답했고 나는 형에게만 들릴법한 목소리로 얘길 꺼냈다.
"형, 내친구 얘긴데.. 걔가 자기 친구랑 키스를 했대. 그것도 여러번."
"네 얘기냐?"
"어, 어?"
"네 얘기냐고. 이혁재랑."
아, 이 형은 왜 이렇게 눈치가 빨라. 하는수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희철이형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묘한 미소를 띄고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묘하게 기분 나빠 왜 웃냐 목소리를 높여 따졌다.
"이동해 이새끼, 나이 허투루 먹었네. 야 임마, 잘 생각해봐라."
"뭐를.."
"뭐긴 뭐야. 네 마음이지."
"내 마음이 왜?"
"내가 보기엔 이미 답 나온지 한참인데. 하, 이 답답한 새끼."
혹시나했는데 역시나였네. 이혁재 그래서 그때 그렇게 화를 냈구만? 형이 우수수 쏟아내는 말들에 머리가 복잡했다. 왜 이혁재가 형에게 화를 냈으며, 이 형은 왜 다 알고 있는듯이 얘기하는건지 내 머리로는 도통 이해할수가 없었다. 아휴, 눈치 밥 말아먹은 새끼. 형이 혀를 끌끌 찼다.
5. 짜증나 너
라디오 녹음을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길, 휴대폰만 바라보던 혁재가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너, 그때 그 분 소개 받았냐?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예쁘던데. 뒤이어 들리는 말에 나도 모르게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예쁘던데."
확인사살을 시키려는건지 굳이 다시 한번 더 얘길해오는 그 행동에 기분이 상했다. 예쁘면 네가 소개 받던가! 버럭 소리를 내지른 나 때문에 차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왜 기분이 상하는거며, 이혁재는 왜 날 보며 웃고있는지. 어려운것들 투성이다.
결국 우리는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스탠바이 중에도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채 시간만 흘렀다. 다만 한가지 짜증나는건 아까부터 자꾸 이혁재가 신경쓰인다는 것 정도?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길 몇번, 그때마다 가슴 가득 얘길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찼지만 그게 무슨 얘기인지는 나도 도통 알수가 없어 입만 뻥긋거리다 말았다. 짜증나. 내가 왜 너때문에 이래야 돼?
6. 좋아한다 안한다
그 날 이후로 이혁재는 누가봐도 티날 정도로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까이가기만해도 자리를 피했고, 일과 관련된 얘기가 아니면 나와는 대화를 일절 하지 않았다. 나는 영문도 모른채 당하고 있어야만 했고. 오히려 멤버들이 우리 눈치를 봤다. 혹시 싸운거냐며, 이번엔 누가 잘못한건지 가려주겠다는 말에 나는 그냥 고개만 절레 저었다. 싸운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이혁재는 더이상 내게 키스하지 않았다. 처음엔 잘 된 일이다 싶었는데 날이 갈수록 어쩐지 서운하고 한편으론 조금 마음이 허하기도 한게..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려워.
"동해야, 너 그거 들었어?"
"뭐?"
"혁재 고백 받았다던데? 너 걔 알지 그.."
뒷통수를 망치로 맞은것 마냥 멍했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아득해지는것도 잠시,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황한 듯 나를 부르는 형을 뒤로한 채 무작정 이혁재의 집으로 향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니 부엌에 있던 녀석이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무슨 일이야. 차가운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무슨 일?
"야! 이 나쁜새끼야!"
"동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나한테 키스할땐 언제고 이제와서!"
"이동해."
왜 이렇게 화를 내.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쥔 혁재가 얘기했다. 오목조목 따져가며 묻고 싶은데 눈물부터 차올라 자꾸 목이 메였다.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지만 울음 섞인 목소리 때문에 또 자존심이 상했다.
"너 친구하곤 키스 안한댔지."
"..야."
"씨발, 친구 안할거니까 나랑 키스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혁재는 날 끌어당겨 입 맞췄다. 이 키스가 끝나면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될건지는 나도 아직 자신이 없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뭐가 되던간에 이혁재와 나의 사이가 변할것이란것 정도?
혁재야, 넌 친구랑 키스해?
아니.
그럼 우린 뭐야?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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