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스치듯 본 말이 있다. 음식을 먹는 애인을 볼 때 '참 잘 먹는구나' 생각이 들면 사랑한다는 것이고, '왜 저렇게 처먹나' 생각이 들면 사랑이 식은 거라고. 상대방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어도 내가 변하면 인식도 변함을 뜻하는구나 하고 이해했던 말이다.
아침 뉴스에선 매일같이 '오늘이 제일'이라는 더위 예보가 계속됐고 저녁 뉴스에선 뒤를 따르듯 열대야 소식이 전해졌다. 이게 어제 뉴스인지 오늘 뉴스인지 가늠이 안 갈 만큼 똑같은 말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런 지독한 열대야에 내 옆에 꼭 붙어있는 혁재도 어제랑 똑같았다.
오늘과 비교할 내일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 똑같은 뉴스도, 똑같은 혁재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한 건 나뿐이다. 더위 때문일까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왜냐면 뉴스에는 화가 나지 않는데 혁재에겐 화가 나니까.
혁재가 잘못한 게 있냐고? 아니다. 달달 돌아가는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날리고 있으면서도 '동해 몸이 시원해' 라며 나를 꼭 껴안고 자려고 하고, 불쾌지수 상승으로 짜증을 낼 법도 한데 나에겐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혁재였다. 이런 혁재에게 잘못이 있을 리가 없다.
문제는 나다. 잘 알고 있다. 하염없이 사랑만 주는 내 애인에게 이유 없이 화가 나는 게 정상은 아닐 테니까. 근데 왜 자꾸 짜증이 날까. 자기 몸 뜨거우면서 껴안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고 내 짜증에 기분 상한 게 눈에 보이는데 티 안내는 것도 짜증 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더위 때문은 아니다. 작년 여름에는 안 그랬거든.
쉽게 잠에 들 수 없는 밤이었다. 홀로 뒤척이다 내가 앉아있는 걸 눈치챈 혁재가 왜 안 자냐고 물어서 열대야 탓을 했다. 너무, 너무 더워서 못 자겠어. 그러자 혁재는 벌떡 일어나서 회전하던 선풍기 헤드를 내 쪽으로 고정시켜줬다. 너만 쐐 나는 괜찮아. 뜨거운 몸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이었다. 선풍기 쪽엔 내가 앉아있고 자기는 내 옆에 누워있어서 사실상 바람 오지도 않으면서, 살짝 가는 바람조차도 내게 양보한 것이다.
그러나 감동받지 않았다. 부담스러웠다.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내가 싫었다. 이런저런 감정에 한동안 하염없이 앉아있다가, 살짝 졸았다가 하니 이내 날이 밝아왔다. 여름은 해도 참 일찍 뜨는구나. 야속했다. 깊이 생각할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더니 그 소리에 혁재가 깼다. 안 잤어?
아침부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지 마. 턱끝까지 차오르는 속마음을 애써 숨겼다. 아냐 잤어. 더워서 일찍 일어난 거야. 그래 좀 더 자 아직 새벽이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곧바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혁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혁재는 오늘도 나를 사랑할까?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오늘 약속 있다던 혁재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고 나는 앉아서 잠든 척을 했다. 몇 번 잠투정을 부리다 일어나는 듯한 혁재는 내 모습을 확인한 건지 알람을 끄고도 몇십 초가 지나서야 침대에서 자리를 떴고 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바로 씻기라도 하는지 물소리가 이어졌다. 샤워기의 물소리와 함께 내 마음도 쏟아지는 것 같다. 더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다고 느껴졌다. 끝인가 보다. 끝이다. 그 생각만 머릿속에 돌기 시작했다. 이제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 타이밍만 노리면 된다.
일찍 눈을 떴던 내가, 다시 곤히 잠든 것이라 생각했는지 혁재는 화장실에서 나와서도 침실로 오지 않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니 혼자 아침을 준비하고 나갈 건가 보다 생각할 뿐. 끝까지 (나에게만 이지만.) 다정한 혁재였다.
그렇게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혁재는 집을 나갔고 나는 밤새 쌓인 핸드폰 알림 속 메시지를 읽고, 포털사이트 메인 뉴스란을 살펴보았다. 역시 어제랑 똑같네.. 침대 헤드에 앉아있던 몸을 이제야 스르르 눕혔다. 허리가 살 것 같다. 눈을 감았다. 열대야라곤 했지만 어떻게 해가 진 밤보다 지금이 더 쾌적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채우지 못한 잠을 청했다.
복잡한 생각에 머리도 지쳤었는지 꽤 오래 잠을 잤다. 눈 떠보니 시계의 긴 바늘은 어느새 오후 시간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혁재가 왔을까? 문을 열고 나가보니 적막함만 나를 반기고 있었다. 분명 혁재는 없었다. 근데 마음은 이상하게 반가웠다. 조용한 거실이, 부엌이, 현관이 반가웠다.
잠들기 전 생각했던 말에 답을 찾았다. 혁재가 없어서 다시 잠든 아침이 시원했던 거다. 미안하지만, 그게 정답이었다. 굳건해졌다. 혁재가 오늘도 날 사랑한다면 분명 늦은 해가 지기 전, 저녁은 나와 같이 먹기 위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난 그때 내 생각을 혁재에게 전해야겠다.
기분이 좋아졌다. 후련했다. 너무나 못 된 마음이고 이기적인 거라 생각해서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찝찝하긴 했지만 상쾌한 기분을 이길 순 없었다. 나도 모르게 콧소리로 노랫말을 흥얼거리기도 하고 읽기만 했던 메시지에 답장도 하고, 누가 봐도 돈 주고 소개하는 억지 맛집 소개 프로를 보다 보니 혁재가 불투명한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일찍 왔네. 손에는 뭐야?"
"아, 이거 치킨. 더우니까 뭐 요리든 조리든 하기 싫잖아. 간단하게 먹자고 사 왔어 그냥"
옳다구나, 맥주를 찾았다. 아무리 내가 후련하다고 해도 정도 있고.. 양심도 있고. 말하기가 미안하기도 했고 혁재도 맨 정신에 듣기보단 적지만 알코올의 힘이 들어간다면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맥주 없어?"
"저번에 내가 사둔 거 있잖아. 그래서 따로 안 사 왔는데?"
아. 내가 관심이 없어지긴 했구나. 머쓱한 마음에 뒷목을 긁적이며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꺼냈다. 식탁엔 혁재가 그새 치킨 포장을 다 뜯어놨다. 센스 하나는..
"배고프다. 바로 먹자"
치킨을 먹기도 전에 맥주부터 뜯어서 마셨다. 막상 말하려니까 입이 쉽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말할 시간도 없게 계속에서 입에 치킨, 맥주를 순서대로 마셨다. 옆에서 배가 그렇게 많이 고팠냐며 천천히 먹으라고 걱정해주는 혁재의 목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으며.
저기 혁재야. 응응. 우리 헤어질까?
고개를 돌려 티비를 보며 치킨을 먹던 혁재가 손을 내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나 못 들었어. 누가 봐도 확실히 들었으면서 괜히 한 번 더 묻는 혁재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만하자구.. 우리.
꽤 길게 정적이 이어져 슬쩍 들어 쳐다본 혁재의 얼굴엔 참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 담겨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잘못 들은 게 아님에도 잘못들은 것 같다는 듯, 멍하면서도 진지한 표정. 그냥 그렇게 우린 서로를 바라보다, 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안, 미안해 혁재야. 근데 있잖아 나
"네가 좀.. 버겁게 느껴져."
"동해, 취했어? 내가 뭐 서럽게 했나? 미안해. 기억 못 하겠는데 기억 못 해서 미안해.."
미안해야 할 건 나인데 되려 혁재가 미안하다고 한다. 그런게 싫다고 나는. 네가 잘못한 게 아닌데 잘못했다고 하지 마. 상처받은 게 눈에 다 보이는데 숨기면서 용서를 구하지 마. 후련했던 마음을 찝찝한 마음이 덮었다. 불쑥 무서워진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더욱 비수가 되는 말들을 쏟아냈다.
"안 취했어. 나 이제 너가 좀 힘들어 나 밤에도 더워서 짜증나 누가 내 옆에 없었으면 좋겠어 그냥. 솔직히 말하면 이제 지친 것 같아."
혹여 중간에 말을 끊진 않을까 겁이나 빠르게 내뱉었다. 혁재는 끼어들기는커녕 내 말이 끝나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또다시 끔찍한 정적이 이어졌다. 이내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혁재가 울고 있었다. 혁재 성격상 장난치지 말라며 웃고 넘겼을 법도 한데 진심이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소리 없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혁재도 알고 있었던 거다. 변해가던 나를, 한 순간에 혹해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휴지를 건네주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여 어깨를 떨고 있는 혁재를 조용히 바라만 볼뿐이었다.
혁재의 맥주는 김이 다 빠졌을 것이고 적당히 따뜻하던 치킨은 식었다. 뉴스가 나오던 티비는 어느새 끝나갈 시간이 다 되었는지 오늘 밤의 열대야를 예보하고 있었다. 숨 막히는 시간이 흐르고 혁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안 돌아보고, 말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혼자가 됐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식탁 위로 엎드렸다. 유리가 차갑다. 고개를 묻은 채 리모컨만 손으로 휙휙 찾아 티비를 껐다. 지독한 고요가 나를 삼켰다. 한숨만 새어 나왔다. 이전의 후련함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금방 들어올 줄 알았던 혁재는 밤이 깊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홀로 침실로 가 누웠다. 씻을 힘도 없다. 그냥 누웠다. 선풍기를 틀지 않았는데 덥지 않았다. 분명히 뉴스에선 오늘도 열대야라고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시원함을 넘어 공기가 차가웠고 한숨은 끊이질 않았다.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넓은 침대를 혼자 데굴데굴 굴러봤다.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나 홀로 차가운 밤을 맞는 것 같아서. 공허한 마음에 침대가 더 넓게만 느껴져서. 온갖 감정이 나를 짓눌렀다. 왜 내가 찝찝하지? 마냥 기분 좋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혁재는 며칠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연락 한 통 없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눈을 떴다 감았다 할 뿐이었다. 밥도 먹지 않았다. 챙겨 먹으려고 나간 식탁엔 여전히 따여 있는 맥주캔과 식어버린 치킨이 그대로여서. 이번에도 변한 건 나뿐이어서.
혁재의 부재가 계속되는 여름밤, 나를 끌어안고 잤던 혁재를, 그런 혁재가 더웠던 나를 이해했다. 내가 줬던 사랑은 차가웠고 받은 사랑은 뜨거웠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다른 온도를 느꼈던 것이다. 그 차이를 알게 되고 많이 울었다. 잠시나마 후련함을 느꼈던 내가 싫어서 그 후련함이 주는 뜻을 그때 이해하지 못한 내가 싫어서 계속 울었다.
그렇게 또다시 나만 변한 열대야를 맞이한다.
오늘도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열대야가 찾아온다.
혁재의 밤은 이제야 조금 뜨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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