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은해 11월호 :: Debut
IDOL
W.버터빈
"이제부터 너희들 트레이닝 담당 바뀌는건 알지?"
"네."
긴장되는 마음에 앞으로 꼭 모은 손만 만지작거리던 동해가 옆에서 자신을 툭툭 쳐오는 규현의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네."
그래, 알고 있겠지만 데뷔 확정되면 그 때부터 데뷔까지는 데뷔조 담당 트레이너들이 너희 데뷔곡, 앨범, 안무, 퍼포먼스 디렉팅까지 전부 총괄해서 맡아. 자세한 스케줄이나 연습 시간 같은.....
앞에서 김팀장이 꽤 중요한 얘기를 줄줄 읊고있었으나 동해는 귓가에 빠르게 울리는 커다란 맥박소리 탓에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동해는 그저 속으로 같은 말만 계속해서 반복하고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ㅡㅡ
몇 주 전부터 연습생들 사이에는 회사가 남자 그룹을 새로 데뷔시킬거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퍼지고 있었다.
연습생들은 너도나도 이번엔 누가 데뷔라느니, 누가 후보에 올랐다느니 이러쿵 저러쿵 수군대기 바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언급이 많이 되는 이는 단연 동해였다. 실력 되지, 비주얼 되지, 인성 되지. 연습실에 있는 모든 이들은 대체 저런 사람이 왜 여지껏 데뷔를 못하고 있는건가를 놓고 떠들어댔다.
그도 그럴것이, 동해는 올해로 연습생 생활 5년차에 접어든 고참급 연습생이었다. 늦은 나이에 회사에 들어온 터라 벌써 나이도 스물셋, 현재 남아있는 연습생 중 동해의 또래는 이제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고참이면서도 텃세는 무슨 오히려 동생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세심히 챙겨대는 덕에 동해는 연습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본인과 함께 들어온, 혹은 그보다 늦게 들어온 친구들이 데뷔할 때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진심으로 축하해주고는 했다.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동해를 칭찬했지만, 그에게는 이상하리만큼 기회가 찾아오질 않았다. 데뷔 멤버 최종선발 라인업에 들었던 것만 그간 세 번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데뷔를 목전에 두고 좌절한 것 또한 세 번이었다.
좌절했다. 그만 포기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동해는 끝끝내 자신의 꿈을 놓지 않았다.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자리에서, 먼저 데뷔한 아이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티비로, 휴대폰으로 지켜보면서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나도 언젠간 저렇게 빛을 받을 날이 올거야, 혼자 다독이는 것도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이동해, 조규현, 김려욱 팀장실로."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데뷔 확정이라고 했다. 3인조 보이그룹 KRH.
이 말을 들은 동해는 양 옆에 있는 규현과 려욱을 동시에 껴안았다. 저 못지 않게 긴 시간 이곳에서 스스로와 싸워온 아이들이었다.
아끼는 동생들과 팀을 이루어 데뷔를 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혹여 이것이 꿈은 아닐까 멍하게 있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 볼을 따라 눈물이 또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려욱이 손을 들어 조심스레 그 눈물을 닦아내었다.
"울지마 형, 우리 이제 데뷔하는거야."
"려욱아..."
"축하해 형."
서로를 껴안으며 눈물 짓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김팀장이 고개를 한 번 흔들고 다시금 시선을 제게로 집중시켰다.
자, 데뷔 확정이라고 해도 아직 연습할 기간 많이 남았으니까 마음 더 단단히 먹고 준비해야된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더 힘들 수도 있으니까 다들 힘내고.
"이제부터 너희들 트레이닝 담당 바뀌는건 알지?"
"네."
"아.. 네."
"그래, 알고 있겠지만 데뷔 확정되면 그 때부터 데뷔까지는 데뷔조 담당 트레이너들이 너희 데뷔곡, 앨범, 안무, 퍼포먼스 디렉팅까지 전부 총괄해서 맡아. 자세한 스케줄이나 연습 시간 같은 세부사항은 내일 홍실장님한테 들으면 될거고 앨범 컨셉회의랑 곡회의는 아직 진행중이라니까 그렇게 알고 일단은 계속 연습에 집중하면 돼. 할 수 있지?"
"네!"
"그래, 이제 나가봐. 화이팅하고."
당차게 대답한 규현과 려욱과 달리, 계속 아무 말 없이 발끝만 보고있던 동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는 채로 입을 열었다.
"저, 팀장님"
"응?"
"데뷔조 담당 트레이너면... 그 분 맞아요?"
"그분?"
"은혁선배님..."
"어 맞아, 안무 담당"
우와, 그럼 보컬은 예성 선배님이에요? 아 어떡해 우리 진짜 데뷔하나봐.
옆에서 흥분한 려욱이 동해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지만 동해는 지금 그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드디어... 드디어 만날 수 있겠구나 내 우상, 내 꿈. 내가 여기서 5년간 이악물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된 사람.
은혁. 그에게 트레이닝을 받는다는 것은 곧, 데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든 연습생들에게 그의 수업은 꿈의 실현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속사는 최종 선발 및 회의를 거쳐 데뷔를 앞둔 팀의 연습생들을 총괄 관리 및 지도하는 프로젝트 팀을 결성하여, 회사가 새로이 신인그룹을 내놓을 때 마다 최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곡과 안무, 그룹 컨셉 등을 만들어냈다.
이정도는, 연습생 기간이 좀 된다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알고있는 정보였다. 그리고 들리는 소식통에 의하면 최근 3년간 데뷔기획팀 고정 트레이너는 은혁과 예성이었다.
그들은 10년 간의 활동을 마치고 3년 전 각자의 자리를 찾아 해체한 보이그룹 Superior의 메인댄서, 메인보컬 출신이기도 했다.
그리고 은혁은 동해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였다.
열 두살 무렵인가, 동해는 무료하게 앉아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중,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독무를 하고있는 은혁의 모습을 보고 일시정지 상태가 된 듯 굳어버렸다.
그리고 손끝으로부터 시작된 전율이 이내 온몸으로 퍼져 머리끝에서까지 그 떨림이 느껴지기 시작했을때, 동해는 펄쩍 뛰어올라 엄마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 나, 나, 나 꿈 정했어."
"꿈? 어제까진 없으니까 그만 좀 물어보라고 신경질 내더니?"
"아 뭔지 안물어볼거야?"
"알았어, 뭔데?"
"저어기"
말과 동시에 보고있던 티비를 가리키는 동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엄마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가수하려고? 저거 엄청 엄청 연습한 사람만 할 수 있는건데 할 수 있어?"
"응! 나 저기 가운데, 저 사람처럼 막 무대에서 조명받고 춤추고 노래하고 표정도 막 저렇게 멋있게 하고... 몰라, 방금 정했어. 그냥 저사람이 내 꿈이야!"
엄마는 눈을 반짝이며 도도도 말을 쏟아내는 아이가 귀엽다는 듯이 한번 볼을 쓰다듬고는 말았지만, 동해는 혼자 방으로 들어가 조용한 가운데 쿵쿵 뛰어대는 가슴위에 한 손을 얹어보았다.
그리고 방금 들었던 노래 가사를 컴퓨터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슈퍼리어... 은혁"
그리고는 책상을 눈으로 훑다가 발견한 메모지에 매직으로 크게 글씨를 쓴뒤 벽에 꾹꾹 눌러붙였다.
[은혁 = 내 꿈]
은혁은 그렇게 처음으로, 동해의 삶 한 쪽에 자리잡았다.
몇 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동해의 일기장에도, 엠피쓰리에도, 아니 동해의 일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은혁이 없는 곳은 없었다. 그는 어느새 동해의 삶,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빛이 바래 끝부분이 노랗게 변해버린 종이였지만, 메모장에 써있는 글귀역시 그대로였다. 책상 옆에 높게 자리잡은 책장은, 이전에는 없었던 앨범 수십장과 화보 잡지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어느덧 열아홉을 얼마 안 남겨두었던 그때의 겨울,
[축하드립니다. OO엔터테인먼트 공개오디션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월요일 오전 9시까지 회사 내 로비로 오시면 됩니다]
동해는 한 발자국 더, 그 꿈에 다가갈 수 있었다.
ㅡ
"김려욱, 조규현, 이동해"
"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 안무 트레이너를 맡은 은혁입니다. 본명은 이혁재. 호칭은 둘 중 아무거나 부르시고 연습시간에 딴짓, 딴생각, 잡담 모두 금지입니다."
저 얼굴이 저렇게 차가워질 수도 있구나... 늘상 티비에서, 대중 앞에서 웃는 얼굴만 보던 동해이다보니 무표정하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익숙치 않은 것은 당연했다.
려욱과 규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동해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도 못한채 긴장된 표정으로 앞에있는 트레이너의 손끝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두번 말하는거 싫어하니까 대답은, 꼭 하고."
여전히 세 명 모두 입을 꼭 다물고있자, 혁재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말했다.
"대답?"
"네..!"
몇 년을 기다려 드디어 만나게 된 제 우상을 보고 감격하는 것도 잠시, 동해는 혁재의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굳어있어야 했다. 저렇게 무서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연습에 앞서서,"
"데뷔 앞두고 있으면 체력관리는 필수인거 알죠, 연습 전후로 몸 똑바로 풀고 항상 부상 조심하세요. 본인 다치는건 본인한테만 문제되는게 아니라는거 명심하고 다른사람들한테 피해주지 않도록"
다치지 말라고, 조심하라고 하는 말도 어쩜 저리 차갑게 하는지. 동해는 혁재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움찔- 하고 목을 가다듬고 크게 대답했다.
"네에!"
그에 동해를 힐끗 쳐다본 혁재가 무심히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들고있던 서류를 한쪽 의자에 내려두고 다시 돌아왔다.
"시작합시다"
하아- 하-
연습실 안은 건조한 톤으로 세 명의 동작을 하나하나 잡아주고 있는 혁재의 목소리와, 세 사람이 내뱉는 숨소리, 운동화와 마룻바닥이 마찰되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했다.
"아니지, 아까부터 왼쪽 오른쪽 균형이 안맞잖아. 오른팔에 더 힘풀고."
"괜찮았는데, 이 동작 할 때는 고개를 좀 더 옆으로 꺾어도 돼. 어떻게 추는지만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보일지도 생각하면서 해야지."
동해는 옆에서 혁재가 규현과 려욱을 잡고 안무를 가르치고 있는 동안, 곁눈질로 그를 흘끔이기도 하고 거울로 몰래 지켜보기도 하면서 미친듯이 뛰고 있는 심장소리가 혹여 거기까지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동해 볼게."
"네!"
그리고 드디어 온 제 차례에, 점점 크게 귓가를 울리는 심장소리를 뒤로 하고 심호흡을 한 번 한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원 투, 원 투 쓰리,
앞서 자신들 앞에서 안무를 가르쳐주던 혁재의 춤선과 느낌을 기억하며, 마치 무대에서 그와 함께 이 춤을 추기라도 하는 듯 최선을 다해 동작을 끝낸 동해가 밭은 숨을 내뱉고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안무숙지는 빠른 편이네. 근데 그런식이면 디테일이 잘 안사니까 꼼꼼하게 외워두고. 힘을 빼서 약하게 춰야하는 부분도 너무 세게 추는 느낌이 있어. 강약조절 하는거 연습하고."
예를 들면 여기서,
직접 동작을 보여줘가며 설명하는 혁재 옆에서 동해가 눈을 반짝여가며 그의 설명을 듣고는 최대한 그 느낌을 살려 따라 췄다.
"이, 이렇게요? 아 이부분이 잘 안되는데..."
"발목에 힘 풀고. 왼손은 이렇게, 아니"
헉,
자신의 뒤로 걸어와 한 발을 동해의 오른발 안쪽에 붙이고 팔동작을 고쳐주는 혁재때문에 동해가 순간적으로 숨을 헉 들이켰다. 이내 집중해서 잘 춰보려고 했으나 팔쪽에 신경을 쏟다보니 왼발이 바닥에서 살짝 삐끗하며 흔들려 중심을 잃었다.
"집중하랬지"
흔들리는 동해의 몸을 한쪽 손으로 받쳐 넘어지려는걸 붙잡은 혁재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정신 안차리면 바로 부상이야, 집중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쉬며 땀에 젖은 앞머리를 위로 한 번 쓸어올린 혁재가 앞으로 걸어가 세 명을 향해 말했다.
아직 곡, 컨셉 회의 최종 협의중이라서 데뷔곡 안무는 아마 다음달 쯤 돼야 나올거고, 그 때까지는 비슷한 장르 안무 중심으로 연습합니다. 정리 스트레칭까지 확실히 하고 끝내는거 잊지말고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끝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간단히 고개만 끄덕이고 문을 열어 나가려던 혁재가 다시 몸을 틀어 동해를 불렀다.
"네?"
"볼 때마다 왼발 불안하던데 그쪽 발목이 특히 약한 것 같으니까 조심하고 찜질 자주해."
네... 네?
볼때마다라니, 그 전에도 내가 춤을 추는걸 보신 적이 있다는 뜻이야?
"네 감사합니다!"
모르겠지만, 일단 걱정해주니 좋았다. 조심하라고 하시니 조심해야지. 오늘 당장 가자마자 찜질도 해야겠다.
동해 혼자서만 들떠있던 혁재와의 첫 수업이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ㅡ
"선생님!"
동해가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혁재를 큰소리로 불렀다. 아 혁재쌔앰-!
"왜."
어디가세요? 멀리서 빨리도 달려오더니 히힛 맑게도 웃으며 말을 꺼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혁재가 생각했다.
처음엔 그렇게 무서워하고 눈도 못보더니, 이젠 웃기도 잘 웃고 인사도 예쁘게 하고 말도 잘 한다.
지난 한 달 새 동해가 저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려졌음을 새삼 느낀 혁재가 픽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요 쌤, 어디가시는데요?"
참 밝은 아이였다. 처음 긴장해있는 모습만 봤을 땐 조용한 모범생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참 밝고 환한 아이였다 이 애는.
"니들 안무 짜러 간다. 너도 좋아하는 연습하러 가."
"방금까지 했는데... 저 안무 짜는거 구경가면 안돼요?"
"어 안돼. 연습 다 했으면 어디 들어가서 좀 쉬든지."
이렇게 쪼르르 달려와 말 거는 것만 보면 마냥 철없는 애같은데, 혁재는 동해가 데뷔가 확정된 후 더더욱 연습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걸 알고있었다. 그만큼 데뷔와 꿈에 목말라있는 아이였다.
동해를 볼 때면 자꾸만 연습생 시절 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단순히 춤이 좋아 시작했던 연습생 생활, 몇 년을 노력해도 좀처럼 주어지지 않던 기회, 데뷔가 무산될 때 마다 쏟아냈던 눈물들. 이 작은 아이도 그 과정을 똑같이 견뎌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저렸다.
몸 좀 챙겨가면서 하래도, 적당히 하래도 괜찮다며 헤헤 웃던 어제 동해의 얼굴을 떠올린 혁재가 한숨을 폭 쉬었다.
"바쁘니까 귀찮게 하지말고 얼른 가."
"...네에"
그리고 혁재는 이 아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저를 대하는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순수한 아이였다. 동작을 알려주려 조금만 가까이 가도 흠칫 하고 긴장하는 모습도, 시범 삼아 춤추고 있을 때면 거울 너머로 보이는 발그레한 얼굴도, 모두 순수했다.
일부러 더 차게 내뱉는 말에 가끔 동해가 저렇게 울먹이는 얼굴을 지어보일 때면, 그 팔을 잡아 제게로 끌어당겨 품에 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 주먹을 꼭 쥐어야했다.
"트레이너님, 여기서 뭐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시죠."
동해는 앞으로의 미래가 더 밝을 아이였다. 신인그룹을 위해 프로젝트팀이 구성되고, 수많은 연습생들의 영상을 돌려보면서 가장 눈에 띄던 것이 바로 동해였다.
안녕하십니까! 연습생 이동해입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를 보며 맑게 인사 하는 모습은 마냥 어려보이기만 하더니 춤과 노래를 대하는 태도는 꽤 진지했다.
"여기 이동해라는 연습생, 제일 고참급이라고 하셨죠?"
"아 동해요? 유명하죠 회사에서. 들어온지 5년 정도 됐는데 최종까지 갔다가 자꾸 떨어지는 바람에 실력, 비주얼, 인성 다 괜찮은 애가 이렇게..."
"흐음,"
"원래도 잘하긴 했는데 노력파에요, 동해 연습하는거 보면 선생님들이 다 말릴 정돈데 말 다 했죠 뭐."
그래요?
이후로 한참 동야 혁재의 시선은 동해의 프로필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 다음날,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복도 끝 연습실 방 하나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걸 본 혁재가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발을 돌렸다.
가까이가서 문에 난 작은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땀을 뚝뚝 흘려가며 격렬한 안무를 소화해내는, 그 아이가 있었다. 이동해였던가. 거기다 방에서 작게 새어나오고 있는 노래는 혁재 그룹이 낸 마지막 앨범의 타이틀곡이었다.
듣던대로 연습벌레구나. 안에서 춤추는 모습을 한참 보며 슬쩍 미소짓던 혁재가 이제는 가봐야지 싶어 몸을 돌린 순간,
아!
제법 큰 소리가 들려 다시 창을 들여다보니 연습실 한가운데서 왼발목을 붙잡고 아파하는 동해가 보였다.
들어가봐야하나, 고민하던 혁재가 문고리를 돌리려 손을 댔지만 이내 다시 손을 거두었다.
"흐으,"
"아파아...... 흐윽"
처음엔 발목을 붙들고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작게 흐느끼던 동해가, 어깨를 점차 심하게 들썩이더니 결국 큰소리로 엉엉 울음을 터뜨린 탓이었다.
복도를 크게 울리는 동해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혁재는 천천히 그곳을 벗어났다.
그후로도 가끔씩, 혁재는 늦은 시간 연습실이 있는 복도를 지나갈 때면 동해가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돌아갔다.
"조규현, 김려욱, 이동해 최종 멤버로 선발 확정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 안쓰러운 뒷모습을 봐야할 일은 없었다.
-
"데뷔곡이랑 안무나왔다. 오늘부터 집중 트레이닝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최대한 빨리 숙지하도록."
"네에!"
곡과 안무가 나왔으니, 이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 분명했지만 세 아이들의 목소리는 어느때보다 에너지가 넘쳤다. 데뷔를 앞두고 잔뜩 힘이 들어간 것 같아 새삼 더 귀엽게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안무 보여줄게."
예상했던대로 파워풀한 댄스곡은 아니었다. 흘러나오는 전주를 들은 동해가 고개를 까닥이며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댄스곡이라기엔 꽤 느린 템포였지만 그루브하고 유연한 안무에 제격인 곡이었다.
앞에서 감각적인 안무를 선보이는 혁재를 집중하는 눈으로 보던 동해가 느릿한 박자에 맞춰 골반을 몇번씩 튕겨올리는 모습을 보고 슬쩍 얼굴을 붉혔다.
아니 뭐 저렇게 야해...
춤이 야한건지, 사람이 야한건지. 집중하느라 앙 다물고있는 입술과 그 나른한 표정까지 무엇하나 섹시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처음 혁재에게 반했던것도, 저 표정 때문이었지 아마. 여유로우면서도 섹시하고 카리스마 있는 눈빛, 동해가 가장 좋아했던 혁재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 이제 한 동작씩 나가자."
마지막 포즈 후 몇초 간 멈춰있던 혁재가 빙글 몸을 돌리자마자 정면에 있던 동해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 저...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급해서요, 죄송합니다!"
"뭐? 아니 너 아까.. 이동해! 야!"
눈이 마주치자 횡설수설하더니 달려나가버리는 동해를 향해 소리친 혁재가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냥 한숨을 한번 작게 쉰 뒤 규현과 려욱을 돌아보았다.
"먼저 시작하자."
끼익-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린 동해가 눈치를 한번 보고 규현과 려욱 옆 대열에 조용히 합류했다.
다행히 진도는 얼마 나가지 않아서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정도였다. 큰 숨을 한번 후욱 내뱉은 동해가 미처 식히지 못한 붉은 뺨을 양손으로 몇 번 누르고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혁재는 그런 동해를 거울 너머로 주욱 지켜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려욱의 목소리에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골반웨이브, 아까 동해의 양 볼을 달아오르게 했던 그 춤은 동해가 중심이 되는 파트였다. 센터에서 먼저 골반을 살살 흔들다 느린 박자에 맞춰 튕기면 뒤에 선 려욱과 규현이 한명씩 박자에 맞게 들어오는 식이었다.
마지막엔 다같이 추긴하지만 어쨌든 그 앞까지는 동해의 독무가 되는 셈이었다.
여전히 살짝 붉은기가 감도는 볼을 한 동해가 골반을 왼쪽 오른쪽 부드럽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곤 혁재가 했던대로 한 손은 허벅지 안쪽에, 다른 한 손은 눈가에 갖다댄채 느리게 튕기는데.
아, 미쳤다 이혁재.
붉어진 뺨에, 연습하느라 이마부터 목선까지 흐르는 땀, 색색대는 숨소리까지. 혁재는 자꾸만 저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미칠 노릇이었다.
침착하자. 넌 선생이야. 트레이너라고. 이건 춤이다, 그냥 춤이야. 냉정하게,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응.
"어... 잘하네. 이 부분은 그렇게하면 되고 다음 동작 바로 갈게."
"네에."
대답을 한 뒤 꾹 다문 입술 끝 말려올라간 입꼬리마저 신경쓰였다. 저 애기를 상대로 내가 무슨.. 진짜 미쳤다, 미친게 틀림없다 이혁재.
"다음 동작은..."
정신없는 와중에 어떻게 어떻게 수업을 마친 혁재가 자신의 작업실 문을 닫자마자 밀려오는 자괴감에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니... 마냥 예쁘고 귀여워보이던 애가 오늘은 갑자기 왜, 왜 그렇게 보이냐고.
가뜩이나 그 애가 자꾸 신경쓰이는 것 조차 죄스러웠던 요즘인데, 이건 정말이지 안 될 일이었다. 동해는 열살이나 어린데다, 이제 막 꿈을 이루려고 날개를 단 아이였다. 그 날개가 온전히 펴지기도 전에 자신이 그걸 꺾어버릴 수는 없었다.
접자. 접어야한다. 아직 깊지 않을 때, 뿌리까지 다 뽑아버려야 하는 마음이었다.
어느새 무릎에 고개를 묻은 혁재가 조용히 자신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혁재쌤! 어디가세요?"
"이동해, 여기서 이러고 노닥거릴시간에 가서 연습해. 데뷔가 코앞인데"
"아니 저 방금까지..."
"간다."
매정하게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혁재의 뒷모습을 보는 동해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말투가 좀 차갑긴 했어도 저를 보는 눈빛과 태도까지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선생님이 변했다.
그렇게 동해를 지나쳐간 혁재 역시 마음이 안좋은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혁재가 할 수 있는거라곤 자신과 저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 뿐이었다.
혁재의 냉대는 그 이후로도 주욱 이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혁재의 이상한 태도에 동해는 하루에도 몇번씩 뭘 잘못했나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별 다른 일은 없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더 많이 이동하고 회전 더 크게, 어 그렇지."
게다가 트레이닝 시간의 혁재는 예전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달라진거라면 트레이닝시간 외에는 마주칠 일이 아예 없어졌다는 것, 혹여 마주치더라도 말걸려는 동해를 알고있다는듯이 쌩 지나쳐버린다는 것 정도.
답답했다. 가뜩이나 데뷔 전이라 몸도 피곤한데 혁재때문에 마음까지 피곤해지는 동해였다.
그리고 데뷔를 이주정도 남겨두었을 즈음, 역시나 자신을 지나쳐가버리는 혁재의 뒷모습을 향해 동해가 소리쳤다.
"혁재쌤!"
"선생님!"
멈칫 하다가도 그냥 걸어가버리려는 혁재를 뛰어가 붙잡은 동해가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얘기좀해요 선생님."
"놔, 나 바쁘다"
"한번만요, 딱 5분만 얘기해요 네?"
"...뭔데."
"잠깐만 저기로 가서..."
혁재의 소매 끝자락을 꼭 쥔 동해가 슬쩍 눈치를 한번 보고는 구석에 비어있는 연습실 안으로 그를 이끌었다.
"선생님"
"어."
"혹시... 제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근데 왜 자꾸, 자꾸 그렇게..."
어깨를 들썩이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듯한 눈을 피해 동해의 옆쪽 그 어딘가를 의미없이 주시하던 혁재가 동해의 말에 크게 움찔하며 눈을 마주쳤다.
"...좋아해요 선생님"
상황과 맞지 않게 쿵쿵 뛰어대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뭘 좋다고 눈치도 없이 그렇게 뛰어대는지.
"......홍실장님한테 들었어, 너 내 팬이었다며? 회사도 그래서 들어온ㄱ.."
"그런거 말구요."
"그냥 존경하는 사람 닮고싶은 선배 그런거 말고. 진짜로, 좋아한다구요 선생님."
애써 모르는척 그렇게 넘기려고 했지만 단호하게 말해오는 아이의 눈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안돼."
"..."
"너 다다음주에 데뷔야. 이런 쓸데 없는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쓸데 없는게 아니에요."
적어도 나한텐... 아주 중요한건데...
"너. 그러니까 니가 어리다는거야."
"지금 너한테 중요한게 그런 사적인 감정이야? 당장 2주 뒤에 데뷔를 앞두고 있는 애가?"
정신차려 이동해. 너 아직 애야 나한테.
먼저 나갈게. 데뷔무대 잘 하고, 앞으로 2주간 너희 트레이닝은 장선생님이 봐주실거야.
쿵.
혁재가 떠난 문이 닫히고, 동시에 동해의 눈물도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ㅡㅡ
변한건 아무것도 없었다. 동해의 마음도, 혁재의 마음도 그리고 둘의 관계까지도. 여전히 그때 그자리였다.
아니 사실 마음은 더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성공적인 데뷔 후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동해는 틈만 났다하면 정신을 놓기 일쑤였다. 제발 멘탈 좀 챙기라며 려욱과 규현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안무가 좋지만 동해씨 독무로 시작되는 부분이 너무 섹시하고 멋있더라구요, 한번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아, 예 이동작은..."
동해는 예능을 많이 출연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한번 출연을 했다 하면 꼭 작가나 엠씨가 시키는 댄스며 노래, 랩, 심지어는 자신없는 개인기까지도 모두 소화해야 했다.
가끔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도 동해는 항상 웃으며 촬영에 임했다. 신인이라면, 그리고 프로가 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겪는 과정이겠거니 하며 시키는대로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자신없는 모창까지도 전부 해냈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데뷔곡 독무를 춰달라는 요구가 있을 때면 가슴이 쿵 크게 울렁였다.
처음으로 안무를 보여줄 때 지었던 그 표정과 몸짓들, 연습시간마다 뒤에서 저를 잡아주던 단단한 몸과 길다랗던 손가락. 무뚝뚝한듯 보여도 그 속에 다정함이 잔뜩 묻어있는 태도. 혁재와 연관된 모든 것들이 자꾸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맴도는 것이었다.
"이 춤은 저희 안무 디렉터이자 선생님이신 은혁 선배님이..."
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게 웃으며 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오늘도 동해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쓰라린 하루를 견뎌내야 했다.
혁재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KRH는 말그대로 대박이었다. 기존 남자아이돌과는 차별화된 곡과 컨셉, 멤버들의 실력, 비주얼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그룹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긴했지만.
음악방송, 예능, 라디오, 광고, 시선을 돌린 어느 곳에나 그 아이가 있었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발돋움한 아이는 천천히 위로, 더 위로 날아 오르고 있었다.
그 때 그 마음을 외면한건 잘한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조금만 더 지나면, 어린아이가 품고있는 저 풋풋한 감정도 금방 사그라들거라고. 그러면 다 괜찮아질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 애가 웃는 얼굴을 볼때마다, 아니 사실은 그 아이를 보기만해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이 통증도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일까, 혁재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생각만해도 이렇게 아픈데...
내가 저 아이를, 정말 빼낼 수 있을까.
오늘도 혁재는, 턱끝까지 올라온 자신의 마음을 다시 가슴 깊은 곳으로 밀어넣어야만 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네, 뮤직 어워드 올해의 신인상 주인공은....."
"축하합니다, KRH!"
퍼엉-! 큰 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쏟아지는 축하와 환호소리에 얼떨떨한 채 앞으로 나와 트로피와 꽃다발을 전해 받은 세 사람의 얼굴이 카메라 크게 잡혔다.
려욱은 이미 눈물 콧물 다 쏟으며 규현의 품에 안겨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리더인 동해조차 쏟아지는 눈물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깨만 떨고있자, 그나마 가장 먼저 감정을 추스린 규현이 려욱을 안고있지 않은 손으로 마이크를 건네받아 수상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 우선 저희 KRH를 만들어주시고 이끌어주신 사장님, 이사님을 비롯한 회사의 모든 스탭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멤버들, 멤버들 부모님께도 정말 감사하고. 팬분들 진짜 너무 감사하고 사랑하고..."
언젠가 만약 우리가 상을 받게 된다면, 하고 생각해보다가 멋들어진 수상소감을 준비하기도 했었지만 막상 이 순간이 다가오니 머리는 하얘지고 순간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아 그저 생각나는대로 말을 내뱉고 있는 규현이었다.
"아.... 아, 그리고 내일이 바로 저희 데뷔 1주년 되는 날입니다. 이렇게 큰 상 받을수 있어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그룹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지금 리더 동해씨가 많은 눈물을 쏟고 계신데, 혹시 수상소감 한 마디..."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엠씨가 옆에 있던 동해에게 마이크를 다시 건넸다.
"아... 너무 기뻐서.. 흠으흠,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우선 같이 고생해준 려욱이 규현이 너무 고맙고..."
아직도 제 감정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해 커다란 눈에는 눈물을 가득 매단채로 히끅대며 겨우 수상소감을 시작한 동해가 생각나는 이름들을 두서없이 이어나가고, 곧 마무리하려던 찰나 떠오르는 얼굴에 멈칫했다.
그리고 어느새 부어올라 빨개진 눈으로 카메라 렌즈를 정확히 응시한채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고생 많이 하신 우리 안무디렉터 은혁선배님. 감사하고, 정말 사랑합니다."
"네, 신인상 KRH 다시 한 번 축하드리고 바로 무대 준비 해주시구요 다음 시상은..."
탁-
혁재가 방금 전까지 무언가 끄적인 흔적이 있는 다이어리를 탁소리 나게 덮은 뒤 리모콘을 들어 아까부터 시끄럽던 티비를 꺼버렸다.
"이동해..."
평범한 수상소감처럼 들렸지만 적어도 혁재는 알 수 있었다. 저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마음으로 저렇게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을 한건지.
아마도 저에게 하고싶은 말이었겠지. 동해가 데뷔를 하고, 회사에서 가끔 마주쳤던 것을 제외하면 거의 만날 일이 없었던 제게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었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무서웠다. 저 아이가 보여주는 그런 사랑의 방식이. 아직 세상의 잔인함과 차가움을 배우지 못한 화초같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그리고 그럼에도 자꾸만 그 아이를 품으려하는 자신의 마음이 자꾸만 혁재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놓아야 하는데, 그게 안된다.
안 되는걸 아는데, 욕심이 났다.
-
지잉- 지이잉-
새벽 두시를 넘어가는 시간, 여전히 아무것도 못하는 채로 쇼파에 멍하게 앉아있던 혁재의 옆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ㅡ 선생님...
"이동해 너,"
죄송해요... 동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축하파티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조용한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떨리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또 어디서 혼자 울고있는 모양이었다.
"어디야 지금"
"죄송해요, 죄, 흐으 죄송해요 선생님..."
"어디야. 말해 얼른"
또 혼자 울고있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저릿한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장 얼굴이라도 봐야 이 들끓는 속을 가라앉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울지말고 말하라고, 어디야 어? 내가 갈게"
ㅡ 여기... 흐, 선생님 집 앞에 놀이터...
"뭐?...알았어 좀만 기다려"
이 추운 날씨에 놀이터에서 혼자 울고있을 동해를 생각하니 걱정도 되고, 안쓰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해서 혁재가 고개를 한번 젓고 패딩을 걸쳐입고 집을 나섰다.
야, 너!
아무도 없는 춥고 어두운 놀이터, 홀로 그네에 걸터앉아 고개만 푹 숙이고있는 동해를 발견한 혁재가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그를 불렀으나 곧 지금이 야심한 새벽이라는걸 깨닫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 앞으로 걸어가 살짝씩 흔들리고있는 그네줄을 잡았다.
"너 뭐야"
"혁재쌤..."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아니 그보다 왜..."
으흑,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금 울음을 터뜨려버리는 동해에 당황한 혁재가 추위에 빨개진 두 손을 보고 머뭇거리다 결국 제 손을 그위로 살포시 덮었다.
"들어가자.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응?"
혁재는 괜히 어색했지만 일단 동해를 달래는게 우선인듯 싶어 어르는 말투로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자신을 일으키는 혁재의 손길에 몸을 맡겨 일어난 동해는, 손목을 잡고 집쪽으로 자신을 이끄는 혁재의 움직임에도 꼼짝않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동해를 돌아보자 눈물을 도륵도륵 흘리는 와중에도 들어올린 한손 끝은 놀이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편의점을 향해 있었다.
"편의점? 배고파?"
묻는 말엔 끝까지 대답도 안하면서.
여전히 자그만 입술은 앙 다문채로 편의점쪽만 바라보는 동해의 시선을 못 이긴 혁재가 알았어, 가자. 하고는 손을 고쳐잡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띠링-
"어서오세요"
중년을 약간 넘긴듯한 나이의 남자가 늦은 시간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대충 인사를 한 번 건네고는 다시 보고있던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아니 이제는 어제가된 날 오후에 열렸던 야구 경기 하이라이트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동해나 저를 못알아보는 것 같아 안심한 혁재가 편히 말을 건넸다.
"뭐 먹을건데?"
그때까지도 입을 꼭 다문채 막힌 코만 킁킁 하던 동해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더니 혼자 음료가 있는 칸으로 걸어갔다.
"제가 고를거에요. 쌤은 따라오기만해요 알았죠?"
"뭐 대단한걸 산다고... 알았어."
으음. 다양한 종류의 맥주로 가득 차있는 칸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동해가 문을 열더니 기다란 캔 하나, 작은 캔 하나를 꺼내고는 문을 탁 닫았다.
"맥주마시려고?"
"네."
그래 그럼.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혁재를 곁눈질로 한번 쳐다본 동해가 마찬가지로 카운터를 보고있는 아저씨 눈치도 슥 보더니 점점 구석진 진열장 끝쪽으로 들어갔다.
"뭐 찾는데, 안주 안사?"
"...이거"
말없이 눈을 굴려 무언가를 찾은 동해가 이거, 하며 그 물건을 집어들었고 무엇인지 확인한 혁재가 놀라 말까지 더듬으며 그런 동해의 손목을 잡았다.
"어, 야, 야 그걸 왜 사 여기서.."
"그럼 어디서 사는데요?"
"미치겠네 얘. 그걸 지금 왜 사냐고 쓸데없이."
"쓸데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는거구-"
와... 얘 진짜 대박이네. 얼빠진 표정으로 잡고있던 손목을 놓아준 혁재는 동해가 고른 콘돔을 들고 계산대로 향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 서있었다.
"안올거에요?"
"지금 간다..."
"8700원입니다."
계산하는 아저씨는 이들이 뭘 사든말든 관심도 없었지만 괜히 민망해진 혁재가 눈치를 괜히 몇 번 살피고 동해보다 먼저 후다닥 나와버렸다.
"집으로 가요 쌤"
"야, 너 방금까지 울던 애 맞아? 얘 진짜 무서운애네."
"안갈거에요? 나 추운데?"
춥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듯 여전히 빨간 얼굴을 한 동해의 눈에 금방이라도 다시 떨어질듯한 눈물방울들이 맺혔다.
"알았어 가. 갈테니까 너 울지마?"
"헤에 네."
동해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혁재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와, 집 진-짜 좋다. 넓고 깔끔하고!"
"정신사나우니까 좀 앉아. 너 때문에 이시간에 이게 뭐냐?"
말투는 저리 퉁명해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정한 것임을 알고있는 동해가 피이, 바람빠지는 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고백할즈음의 혁재는 너무 차가워 다가가기 조차 어려워진 사람이었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날의 기억은 아직 생생히 남아있었다.
"쌤 이리와봐요."
"아 왜 또."
올거면서.
귀찮아하는 듯 해도 결국 고분고분 제 옆에 와서 앉은 혁재는 웃기기도, 귀엽기도했다.
그런 혁재의 눈을 보다 씨익 한번 웃어보인 동해가 편의점에서 산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두었다.
"봐요."
"뭘 봐"
"이거 술이랑 콘돔, 내가 산거잖아."
산거잖아? 아주 맞먹네 이제.
어이없다는듯이 동해를 보던 혁재가 제 눈앞에서 손바닥 크기도 채 안되는 작은 상자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동해의 손목을 홱 잡아챘다.
"그래서, 나더러 어떡하라고."
"모르는거 같아서 알아두라구요. 나 애 아니고, 나도 성인이라고."
"뭐?"
"나보고 그랬잖아요 어리다고. 나 안어려요. 나 진심이에요 선생님 좋아하는거."
"하.."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결국 저 소리다. 안그래도 아까 시상식 이후로 이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팠는데, 직접 마주하고 이야기하자니 속이 더 타는 기분이었다.
결국 혁재는 눈에 보이는 큰 맥주캔을 따서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동해 역시 그 옆에 있던 작은 캔을 하나 따서 꿀꺽 넘겼다.
"그때 분명히 말했잖아. 안된다고."
"사람 마음에 되고 안되고가 어딨어요? 안된다고 하면 그게 그냥 쉽게 접어져? 선생님이 말하는 어른들은 다 그래?"
"안쉬워. 마음이 쉬운게 어딨어 다 어려운거지, 힘든거고. 그래도 안되는거다 싶으면 참는거야."
"된다 안된다 말고, 쌤 마음을 말해달라구요 그냥."
"..."
"선생님도 나 좋은거죠? 그러니까 참는다고 말하는거고? 응? 말해줘요."
"못해."
"왜 못해"
"말하는순간 그건 네 인생에 걸림돌이 되는거야, 넌 앞으로 더 잘나갈거고 더 성장해서 크게 될 수 있는 앤데 괜히 나때문에..."
허, 꽤 큰 소리로 숨을 한번 내뱉은 동해가 혁재의 말을 끊었다.
"뭐라는거야 이 쌤 진짜, 혼자 드라마 찍어요?"
"...장난 아니야."
"나도 아니야. 앞길을 위해 뭐 어쩌구저쩌구, 말도 안되는 핑계대지마요. 그냥 선생님은 용기가 없는거잖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내 말 틀려?
아니 우리가 사귄다고 무슨 지구가 반대로 돌기를 해, 우주가 격변을 하기를 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나는 쌤이 좋고, 쌤은 내가 좋으니까 한번 만나보자구요.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데?"
용기가 없다. 자신이 없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10살이나 어린 아이와 사랑한다는게, 과연 옳은일일까 재고 따지고. 서른 셋의 사랑은 이토록 겁이 많았다. 동해의 말엔 틀린게 하나 없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무서워. 나보다 열살이나 어린애가 날더러 좋다는데, 눈치없이 자꾸 좋아서. 나도 모르게 네가 자꾸 좋아져서 무섭다고."
"무서워할 필요 없잖아요. 그냥 마음가는대로 하면 되잖아, 응?"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고있었다.
안된다 안된다 밀어내봤자 결국 끝까지 그 속을 비집고 들어올 것을.
그리고 지금 이 감정이 결국은 자신을 온전히 집어삼킬거라는 것까지, 모두.
어쩌면 이미,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아 이사람이 진짜.
혁재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사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가 없는 동해는 답답한 마음에 남아있던 맥주캔을 한번에 비워냈다.
취기도 오르겠다, 끝까지 모르겠다 뒤로 빼는 혁재에 욱한 동해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콘돔상자를 바지주머니에 쑤셔넣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맘대로해요. 나 갈래."
"어, 야! 이 시간에 어딜가 그건 또 왜 챙기고."
"몰라, 어디든 쓸 데가 있겠죠"
"뭐?"
다른사람이랑 쓰기라도 하겠다는거야?
그거야 제 마음이죠, 선생님은 상관하지 마세요 제 애인도 아니신데.
부러 더 얄밉게 말하는 동해의 입을 빤히 바라보던 혁재가 동해를 따라 일어선뒤 아직 바지주머니에 있는 그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확 끌었다.
"나랑 산건데?"
"정확히는 내가 샀죠. 선생님은 그냥 옆에있었고."
"... 그래서, 진짜 다른데서 쓴다고?"
"글쎄- 왜, 신경쓰여요? "
얼굴을 가까이 붙인채 말꼬리를 늘리며 야살스런 눈웃음을 짓는 동해에 속 깊은곳으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오름을 느낀 혁재가 나머지 한 손을 콰득 움켜쥐다가 결국 동해의 뒷목을 끌어안아 거칠게 입을 맞댔다.
도톰한 입술이 동해의 얄쌍한 윗입술을 덮어 진득하게 물고 빨았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혁재에 호흡을 맞추지 못한 동해가 자꾸만 고개를 뒤로 빼려했지만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혁재 탓에 숨이 턱 막혔다.
"허으, 자, 잠시, 읍, 숨막.. 하으"
조용한 집 안이 두 사람의 입술과 혀가 엉겨붙는 소리로만 가득했다. 어느새 한 쪽 벽에 몸을 붙이고 선 동해가 질척하고 끈적한 소리에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가만히 있어."
여전히 한 손은 뒷목에 두고 동해의 입술을 탐하던 혁재가 다른 한 손으로 동해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허리 옆을 살살 지분댔다.
"아으, 아 이거 너무.. 흐윽"
약간의 자극에도 분위기 탓인지 극도로 흥분한 동해가 허리를 들썩이며 두 손으로 혁재의 목을 감싸안았다.
어느새 양 눈 끝에 맺혀있는 눈물을 한번씩 핥아낸 혁재가 동해의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선생님이랑 쓰자, 부족하면 더 사줄게."
"......응"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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