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은해 11월 / 데뷔
너와 나의 13년
w,nanami
“대체 너한테 나는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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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혁재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아, 짜증나게. 차의 좌석을 뒤로 젖힌 혁재가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큰 손으로 머리를 누르는 듯한 두통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형, 두통약 있어요?”
매니저에게 받은 두통약을 입에 털어 넣은 혁재가 생수병을 집어드는 동시에 차 문이 열렸다. 동해였다. 잔뜩 부어 붉어진 눈두덩이를 두꺼운 테의 안경으로 가린 동해가 차에 올라탔다. 혁재가 손을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다시 물병을 들어 마셨다.
“니네 싸웠냐. 오늘 촬영있는데 그렇게 눈이 부어서 어쩌려고 그래.”
“그런 거 아니에요.”
혁재의 말에 매니저가 잠시 뒤를 향하던 고개를 다시 돌리곤 한숨을 쉬었다. 동해가 살짝 가려진 목도리 아래로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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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딱 13년이었다.
같이 보낸 시간은 대충 18년쯤. 오래봤으니 싸울 만도 했다. 안 싸우는 게 오히려 더 어색했겠지. 다른 멤버들과도 그랬다. 누구나 한번쯤 싸웠고, 서운한 게 있었고, 그럴 때는 싸우고 풀어버리는 게 더 좋은 해결방법이었다. 모두가 그랬다. 바로 말을 하고 푸는 게 어쩌면 그들의 룰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혁재와 동해는 달랐다. 그도 그럴게, 다른 멤버들의 관계와 그들의 관계는 달랐다. 어쩌면 조금 더 가깝고, 또 어떻게 보면 조금 더 먼. 그냥 멤버, 친구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조금 이상한 관계였다.
혁재는 그런 그들의 관계에 싫증이 나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동해에게 휘둘리는 자신에게 싫증이 났다. 혁재가 동해를 챙기는 것은 이미 당연하게 굳어진 일이었다. 동해가 짜증을 부릴 때면 대충 받아서 넘어가주고, 억지스러운 고집을 부려도 그러려니 받아주고. 꼼꼼하지 못한 그를 챙기는 건 언제나 혁재의 일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당연해져버린 관계에 짜증이 날 법도 했다.
그래서 짜증을 냈다. 처음으로 화를 냈다. 한 번도 화낸 적 없었는데. 소리를 질렀고, 화를 참지 못해 동해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집을 나왔다. 참고 참다 드디어 터뜨렸는데, 되려 가슴이 더 답답했다. 붉게 충혈된 동해의 눈이나, 그 눈을 가리려는 안경테나. 모든 게 다 짜증스러웠다. 목구멍을 죄어오는 동해의 굳어진 표정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동해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또 화라도 내면 편해질까. 혁재가 동해를 빤히 쳐다봤다. 철저하게 제 시선을 외면하고 창밖을 향한 동해의 머리를 붙잡아 제 쪽으로 돌리고 싶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이동해. 혁재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컵홀더에 담긴 생수병이 차의 흔들림에 따라 이리저리 찰랑거렸다. 뚜껑을 닫아 물이 튀진 않았지만 투명한 병 안에서 수면을 울려대며 튀어오르는 물방울이 위태로웠다. 혁재와 동해의 관계처럼. 뚜껑을 열면 아무렇게나 튀어 시트를 적실 것처럼, 그렇게.
/
“눈이 왜 그래.”
“아니야.”
“아니긴. 울었어?”
“으응, 아니야.”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동해의 얼굴을 감싸며 다정하게 묻는 시원의 모습에 혁재가 고개를 돌렸다. 엄지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쓸어주는 모습이 사뭇 연인 같았다. 아무렇게나 머리를 쓸어올리며 대기실로 들어온 혁재에게 희철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또 싸웠냐?”
“아니, 다들 왜 이렇게 우리한테 관심이 많은데요?”
잔뜩 날카로워진 혁재의 반응에 희철이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보며 의자에 앉은 혁재가 고개를 젖히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랄하네.”
희철의 말을 들은 혁재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기분이 나쁠 법 했는데도 입꼬리에 웃음을 건 희철이 혁재의 뒷통수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번쩍. 정신이 드는 기분에 혁재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장난 섞인 웃음을 지으며 대기실을 나갔다.
“정리해. 새끼야.”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거라고. 정리가 안되니까. 해결은 못해줄망정 잊고 있던 어젯밤을 상기시키는 희철의 말에 혁재가 고개를 숙였다. 나더러 어떡하라고.
/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데?”
“어?”
“이동해. 너는 정말,”
“갑자기 왜 그래.”
“대체 너한테 나는 뭐냐?”
어제의 실랑이가 머릿속을 맴돌자 동해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팔을 겹쳐 무릎위에 올리고는 얼굴을 묻었다. 멍청하게도. 메이크업 지워질 텐데. 등에 따뜻한 손이 닿고 그 손은 동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려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겨우 눈물을 참은 동해가 어깨를 떨었다.
“너 이렇게 겁 많아서 어쩌려고 그러냐.”
그러게. 희철의 말에 동해가 고개를 들고 웃어보였다.
나도 모르겠어 형.
/
어떻게든 촬영이 끝났고, 표정이 내내 굳어져있던 혁재가 수고했다는 스탭들의 말에 기지개를 켰다.
“수고하셨습니다.”
“은혁씨!”
“네?”
“오늘 촬영 너무 좋았어요. 컨셉 이해가 확실해서 그런지 표정도 좋았고요. 다음에도 잘 부탁합니다.”
“아뇨. 감사합니다.”
표정이 좋았다니. 스탭의 말에 혁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답답하고 짜증나서 죽을 것만 같은데. 컨셉이 맞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웃어야 하는 촬영이었다면 표정관리를 못했을 게 뻔했으니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돌려야할지를 모르겠어서. 아니 어쩌면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고, 혁재와 동해는 또 다시 적막이 가득한 차에 올라야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어제처럼 화라도 낼 수 있다면. 혁재의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찼다.
연기가 올라오듯 스멀스멀 시작된 것들은 어느새 뿌옇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뿌연 연기 한가운데 혁재가 서있었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기침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가슴을 꽉 막히게 하는 덩어리를 꺼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예상이 맞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제 마음을 연기 밖으로 꺼내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오늘은 저 차 타고 갈게요.”
그러는 와중에 동해가 꺼낸 이야기는 혁재의 머릿속을 암흑으로 만들었다. 스위치를 눌러 불을 꺼버린 듯 탁. 꺼진 머릿속에서는 이제 연기도 보이지 않았다. 왜 자꾸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해. 차문을 열고 말을 하는 동해의 눈은 혁재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어? 너네 아직도 화해안했냐? 그러지 말고 얼른,”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세요.”
“어?”
“나랑 같은 차에 타기도 싫은 가보죠. 출발해요.”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당황한 얼굴로 제게 눈을 맞추는 동해를 쏘아보았다. 내가 지금 얼마나, 됐다. 이동해가 알 리가 없었다. 눈치라고는 개나 준 우리 동해가 내 마음을 알 리가 없지. 알았으면 우리는 이미 끝나버렸거나, 아니면 다시 시작했거나. 말도 안되는 생각들이 또 머리를 어지럽히자 혁재가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쉬었다.
“나가.”
/
탁,
큰 소리를 내며 닫힌 차문 앞에 동해가 멍하니 서있었다. 차가 출발할 때까지 동해의 발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썬팅이 진하게 된 창문에는 멍한 동해의 모습만이 비쳐보였지만, 동해는 그 뒤의, 까만 창문 뒤로 눈을 감은 혁재의 모습을 생각했다. 제 머릿속만큼 까맣게 탄 창문 덕에, 혁재에게까지 눈이 닿지도 않는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차가 출발하려 했다.
혁재가 동해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차가운 눈으로 나가라고 했다. 두 번 다시 동해를 보지 않을 것처럼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여태까지 부정해왔던 감정들이 눈물 터지듯이 미치도록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꼭꼭 숨겨두려 했던 감정이, 혼자만 아파하려 했던 마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 같아 동해가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
혁재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향한 눈이 프로젝터를 좇았다. 동해가 달자고 해서 달았었는데. 거실이니 주방이니 온통 모던한 느낌의 혁재의 집에 유일하게 동해의 입김이 닿은 곳이 침실이었다.
“빈티지한 느낌으로 하라니깐?”
“아니 너희 집도 아닌데 이동해 네가 왜 난리야.”
“네 집이 내 집이고, 내 집도 내 집이지!”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던 동해의 모습에 웃음이 흘렀다. 멍청한 이동해. 결국은 이렇게,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침실에 동해가 가득 찼다.
심심하면 제 집으로 내려와 통통거리며 집 안을 뛰어다니던 모습도, 공포 영화를 보다 깜짝 놀라 이불로 숨어들던 모습도, 슬픈 영화를 볼 때는 눈물을 흘리던 모습도, 재미있는 장면에서는 소리를 내며 웃던 모습도. 그러다 잠이 들어 침대 위에서 색색 소리를 내던 모습도. 동해는 잘 때마다 입을 오물거렸다. 입술도 얇으면서. 그 모습이 웃겨서 한참을 보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귀여워서. 정말 어쩌면, 사랑스러워서.
어느 순간 혁재의 머릿속에 가득 찬 연기들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간 웃음이 동해만이 남아있었다. 동해야. 미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너를.
혁재가 집을 뛰쳐나갔다. 머릿속이 맑아지고 남은 것은 동해뿐이었다. 그마저도 잔상이었다. 혁재가 내쳐버린 동해는 이미 제 옆에서 사라진 뒤였다. 방안을 채우고 있던 동해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바로 이동해가 보고 싶었다. 그 부어오른 눈두덩이 위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동해는 같은 마음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언젠가 쏟아질 마음이었다.
너와 나의 13년은, 어쩌면 오늘이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
집에 들어선 동해가 한숨을 쉬며 현관에 주저앉았다. 차 문을 닫던 혁재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해서 현관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탁 소리를 내며 닫힐 문이 무서웠다. 두려웠다. 그 눈빛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릴 제 모습까지 그대로였다.
함께 해오면서 꼭꼭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혁재가 눈치 챈 게 아닐까.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떡하지. 나를 피하면 어떡하지. 내가 사랑하는 이혁재가 나를 더럽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한번 시작된 두려움은, 허우적대던 동해의 발목을 잡고 끝없이 밑으로 끌어내렸다. 이제는 허우적거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속으로 끌어내려지는 그대로, 그렇게, 잠기고 있었다.
“이동해.”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암흑 속으로 빠지던 동해의 손목을 붙잡고 밖으로 끌어올린 건 혁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빛이었던 혁재가 현관문 앞에서 동해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아직까지 굳어져 있는 혁재의 얼굴에,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뛰어올라왔는지 숨을 고르던 혁재가 입을 열었다.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소리를 뱉어냈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기를 바랐던 동해의 마음을 조각내버리며 결국 열려버렸다.
“얘기 좀 하자.”
오늘이 끝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이렇게 자신을 찾아오는 혁재도, 제게 웃어주던 혁재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동해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어.”
너와 나의 13년은 어쩌면, 오늘이 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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