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의 미학
w.nanami.
서로 다른 상의를 입은 두 사람이 응원석으로 들어섰다. 하얀 유니폼을 입은 혁재가 뒤따라오던 동해를 돌아봤다. 혁재가 ‘자리 어디야?’ 묻자 동해가 티켓을 살피고는 ‘저-기’ 말하고는 몸을 움직였다.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며 기계처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던 동해가 자리에 앉으려 하자 양 손이 가득 찬 혁재가 턱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
"왜."
"그냥."
"존나 지 멋대로."
동해가 불만인 듯 중얼거리다 이내 혁재가 가리킨 자리에 냉큼 앉았다. 팔걸이에 올려둔 컵 속의 맥주가 찰랑, 흔들렸다. 흘릴 것 같다며 혁재가 컵의 반만 채워준 게 다행이었다.
한 손에는 가득 채운 맥주 컵을, 다른 손에는 핫도그와 소떡소떡을 든 혁재가 동해의 옆자리에 앉았다.
“넌 먹으러왔냐?”
“배안고파? 밥도 안먹고 왔잖아.”
“됐어.”
혁재가 핫도그를 내밀자 동해가 고개를 돌렸다.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있는 선수들이 보였고 동해의 얼굴에 설렘이 피어올랐다. 역시 야구는 직관이 최고였다. 응원석에 가득하게 앉은 사람들과 다른 유니폼을 입긴 했지만 뭐, 상관은 없었다. 동해는 눈치따위 보지 않았다. 상대팀 팬들 사이에서 혼자 개썅마이웨이로 응원을 하고 욕을 할 자신이 있었다. 알빠세요? 전 야빤데요. 머릿속으로 혼잣말을 하던 동해가 킥킥 웃었다. 혁재가 동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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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는 야빠였다. 야구 빠돌이. 어릴 때부터 지역 야구팀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야구장을 가고, 고등학교때는 독서실에서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응원했다. 왜 그 팀을 응원하냐고 물어도 딱히 할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태생이 OO야.
대학에 들어와서는 주변에 야구를 보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해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과방 모니터에 틀려있는 중계를 슬쩍보다 큰 소리로 개쌍욕을 한 후로 동해는 동기들 사이에서도 야빠로 불렸다. 그 후로 동해는 이제 내가 OO팬인거 전교생이 다 아는데(그건 아니었지만) 뭐 어떠냐며 대놓고 지랄을 했다. 그렇게 안생겨서는 엄청 흥분한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며 어깨를 툭툭쳐도 씨발 쟤넨 해체해야돼!!!를 외치는 동해의 모습에 동기들은 OO가 진 다음 날에는 동해를 피했다. 야구에 미친 개한테 물릴지도 몰라. 실제로 팀의 n연패에 예민한 동해의 옆에서 알짱거리던 규현이 어깨를 물린 일이 있기도 했다.
동해가 알기로는 같은 동기 중에 야빠는 없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도 안되는 말로 야구를 보는 애들은 알빠가 아니었다. 졌는데 어떻게 잘싸운거야. 쳐돌았나? 동해는 팀이 이겨도 화를 냈고, 져도 화를 냈다. 원래는 내가 화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고, OO때문에 화가 많아진거라고 말을 해도 믿는 사람은 없었다. 확실히 시즌 중에 더 까칠하긴 했지만, 원래도 뭐.. 규현이 말을 받아치다 팔뚝을 맞고는 우는 표정을 지었다. 들리는 말로는 이혁재가 야구를 좋아한다고 했긴 했는데, 동해는 혁재가 야구를 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동해 기억 속의 혁재는 노는 걸 좋아하는 동기였다. 그러면서 수업도 열심히 듣고, 성적도 좋고, 필기도 잘하는 모자란 것 하나 없는 녀석이었다. 딱히 혁재의 필기를 본 건 아니었지만, 동기들이 혁재의 노트를 보며 혁재 너는 글씨도 예쁘네하며 웃어대는 소리를 하도 들어 알고 있었다.
혁재는 엠티때 장기자랑에서 춤을 추기도 했고, 슈퍼주니어라나 뭐라나 여튼 댄스동아리도 한다고 했다. 동해에게 혁재와 친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no였지만, 혁재에 대해 묻는다면 잘 모른다고 하면서도 술술 읊을 수 있었다. 알려고 한 건 아닌데, 그냥 지나가다 들은 건데 하는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 자세히 알고 있어서 물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할 만큼이었다. 그런 뒤에 동해는 혁재가 야빠라면, 조금은 정이 갈지도 모른다며 뒷말을 붙일 것도 뻔했다.
평소처럼 강의실에 앉아있는 동해의 앞 자리에 혁재가 앉아 말을 걸었다. 얘가 나한테 무슨 볼 일이지? 뒷자리에 있는 혁재와 친한 동기들의 눈이 다 자신들을 향해 있는 것 같아 동해가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동해 너 OO팬이라고 했지?”
“어. 왜?”
“나랑 직관안갈래? 이번주 금요일.”
제 눈앞에 휴대폰 화면을 들이미는 혁재에게 동해는 콜당오를 외쳤다. 콜. 당연하지. 오케이.
“우리 팀 응원석 가도 괜찮아? 아니면 중앙으로 가고.”
“상관없어. 뭐 어쩔거야.”
동해의 말에 혁재가 멍하니 있다 웃고는 그래. 자리는 내가 알아서 예매할게. 금요일 강의끝나고 보자. 말을 했다. 실행력 존나 빠르네. 동해도 고개를 끄덕하며 강의록을 폈다. 오랜만의 직관에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월요일인데. 왜 월요일에는 야구를 안하는 걸까. 하루종일 존나 심심할게 뻔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잠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원래의 자리로 옮겨가는 혁재를 슬쩍 쳐다보며 동해가 어깨를 으쓱했다. 시끌벅적한 뒷자리에 동해가 펜을 돌리며 턱을 괴었다. 조규현은 하필 오늘 자휴때리고 지랄이야. 이걸 봤어야했는데. 매일 혁재의 얘기만 나왔다 하면 에이 형 그건 좀. 혁재 형이 왜를 반복하던 규현이 이 장면을 봤어야 했는데. 봤어도 못믿으며 동해에게 되물었을 것 같기도 했다. 혁재형이 형한테 왜요?
“쟤네랑은 직관 안가나보지.”
“쟤넨 야구 안봐.”
중얼대던 동해의 옆으로 혁재의 목소리가 동해의 닿았다. 언제 옆으로 온건지. 깜짝 놀란 동해가 펜을 떨어뜨리자 혁재가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두고는 아래로 몸을 숙였다. 까만 펜을 주워든 혁재가 동해에게 펜을 내밀며 웃었다.
“안받아?”
“아. 어. 고마워.”
방금 어떻게 말했었지. 뭐 때문인지 머리가 복잡해진 동해가 펜을 받아들고는 턱을 괴고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빨개진 귀와 뒷목에 혁재가 빤히 동해를 바라보며 웃었다.
“왜.”
“응?”
“왜 여기 앉냐고.”
“그냥 여기가 더 잘보일거 같아서?”
웃으며 말을 하는 혁재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동해가 또 고개를 휙 돌렸다. 빠르게 뛰는 가슴이 어색했다. 야 조규현. 나 오랜만에 직관간다고 이렇게 설레나봐.
/
직관하러 가는 팬들 사이에는 승요, 패요라는 말이있다. 승요는 승리요정, 패요는 패배요정.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동해는 패요에 가까웠다. 동해는 부정했지만 직관을 가기만 하면 n연승을 하던 동해의 팀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비실책을 했고, 상대 팀 타자들은 존나 빠따에서 불이 났더랬다. 같은 팀을 응원하는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동해가 직관을 간다고 하면 그날 경기는 버렸다며 중계도 보지 않을 정도였다.
결론은, 동해는 패요 중의 패요였다. 오늘은 안그러겠지 오늘은 이기겠지. 팀이 상승세일때만 직관을 갔는데도 동해가 야구장에 발만 딛으면 그날은 13:1, 규현의 말을 빌리자면 말그대로 발리기 일쑤였다. 한번은 9:3으로 지고있길래 8회에 야구장을 나섰는데 9회에 9:10으로 이긴 적도 있었다. 선수들은 당연히 모르겠지만 팀이 이기려면 동해가 야구장 근처에도 오지 말아야했다. 뭐 그런 이유로 직관을 한동안 가지않았었는데, 혁재의 말 한마디로 야구장에 들어온 자신이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동해가 제 앞에 들이밀어진 소세지를 한입 가득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야구장에 오면 뭘 먹지도 않았는데. 낯설지만 조금은 신이 났다. 이혁재 알고보면 나 패요인거 알고 자기 팀 이기려고 나 데려온 거 아니야? 동해가 눈을 흘겨보며 혁재의 팔뚝을 세게 퍽 때렸다.
“아! 왜 때려!”
“재수없어.”
혁재를 흘겨보던 동해가 그라운드로 눈을 돌렸다. 오늘은 그래도 괜찮았다. 1회에 7점이 나진 않았고, 지금까지 무실점이었고, 심지어 지금 동해의 팀은 득점 타이밍이었다. 나, 오늘은 정말 패요말고 승요가 될지도 몰라. 설렘이 가득한 눈동자를 본 혁재가 아린 팔뚝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알기쉽다니까. 동해의 바람과는 달리 OO의 선수들은 줄줄이 삼진을 당했다. 주먹을 꼭 쥐며 보던 동해가 마지막까지 스트라이크존에 빨려들어가는 공에 참지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해체하라고!!!!”
우렁찬 목소리에 하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동해와 혁재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좋아해야하는데, 욕을 내뱉는 파란 유니폼의 상대 팀 팬때문에 뭔가 마음을 놓고 좋아할 수도 없고 와아.. 하는 작은 소리만을 내뱉었다. 혁재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듯 웃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동해의 어깨를 누르며 자리에 앉혔다.
“야야. 진정해.”
“내가 씨발 저걸 보고 어떻게 진정을 해.”
“우리 팀도 금방 끝나. 봐봐.”
언제 나왔는지 혁재 팀의 선수들도 삼진으로 나가고 있었다. 동해가 자리에 앉아 컵에 반만 차올라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짜증나. 짜증나. 열이 받아서 그런지 뭐때문인지 가슴이 자꾸 두근거렸다. 동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맥주 이거 마셨다고 벌써 취했나. 시뻘건 얼굴을 하고 있는 동해에게 혁재가 얼굴을 가까이가져가며 말을 걸었다.
“괜찮아? 너 술 잘 못마시잖아.”
뭘안다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혁재는 동해에 대해 잘 아는 듯 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것도, 야구를 좋아하는 것도, 어느 팀 팬인지까지도. 사실 같은 과라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동해는 조금 기뻤다.
그리고 실은 전부터 혁재는 술자리에서마다 동해를 챙겼다. 술 한잔에 헤드뱅잉을 하는 동해의 옆에 앉아 잔을 대신 받아주며 ‘동해 술 잘 못마시잖아.’를 연발하던 혁재의 모습에, 동해는 술을 마신 날이면 규현에게 전화를 해 난리를 쳐댔다. ‘오늘 혁재가-, 그러니까 이혁재가-.’ 그 말이 듣기 싫어서 규현이 한밤중에 걸려오는 동해의 전화를 돌린 적도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혁재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제가 혁재를 더 많이 알았지만 그 작은 말 하나에도 동해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동해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혁재가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손이 닿았는데도 빨개진 얼굴이 가라앉기는 커녕 더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밀어내기는 싫어서, ‘여기서 내가 이혁재를 밀어내면 우리 팀 투수도 밀어내기로 1점을 줄지도 몰라.’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동해가 혁재의 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동해의 뺨이 시원한데 또 동시에 뜨거웠다. 혁재의 차가운 손에 동해의 머릿속이 시끄러워 죽겠는데 자꾸 주변이 더 시끄러워졌다. 동해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자 커다란 전광판에 뜬 자신과 혁재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다 둘을 쳐다보고 있었고, 전광판에는 분홍색 하트가 떠다니고 있었다. 빨간 입술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게.
“뽀뽀해! 뽀뽀해!”
미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다들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냥 평소와 같은 키스타임 이벤트 시간이었고, 평소처럼 커플같은 사람들을 카메라로 비추다 동해와 혁재를 선택한 것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일인데도 동해는 상황파악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주변에서는 자꾸만 키스를 요구했다. 대체 혁재와 자신을 왜 커플이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 물론 자세가 조금 야시꾸리하긴 했는데. 아니 그래도 그렇지.
동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꾸만 눈동자를 굴렸다. 이상할 정도로 어떡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당연히 안하는 건데. 이건 당연히 엑스를 그려야하는 건데. 부정하지 않고있는 혁재의 모습마저 동해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뭘 어쩌고 싶은 거야? 동해가 여전히 제 뺨을 감싸고 있는 혁재를 쳐다봤다. 동해의 눈이 제게 닿기를 기다린 건지, 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스파크가 튀었다. 혁재가 씩 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동해에게 다가갔다. 입술과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미친놈. 이혁재 미친놈. 첫키스를 하면 뭐 종이 어쩌고 저째? 동해의 귓속에는 사람들의 환호가 끝없이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너, 너..”
“미안. 놀랐어?”
혁재가 웃으며 동해의 입술을 엄지 손가락으로 비볐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자꾸만 입술에 닿는 손가락에 동해가 정지했고, 타이밍이 좋은 건지 또 한번 전광판에 혁재와 동해의 모습이 뜨며 이벤트의 당첨을 알렸다.
이 시간이 끝나고나면 혁재와 동해는 선물을 받을 거였다. 고급 세단 차를 받을 수 있는 추첨권일수도, 영어강의 수강권일수도, 아니면 놀이공원 입장권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해의 머릿속은 자꾸만 또 다른 전광판을 그려냈다. 그 전광판 속에는 아까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이 반복되었다. 확대되기도 하고, 전체샷으로 나오기도 하고. 빨개진 동해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커지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한번 더! 한번 더!를 외치고 있었다. 다들 미친게 분명했다.
와중에도 동해는 제 입술을 자꾸만 비비는 혁재의 손가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우고 싶다는 건지 뭔지. 동해가 취하지만 않았어도 그러지 않았을까? 동해가 혁재의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눈을 꼭 감고 혁재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
한번은 친구가 동해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너는 패요면서 직관을 왜 가냐? 지면 화만 내면서.’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묻는 친구의 말에 그 날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며 흥얼대던 동해가 웃으며 말했다.
“져도 직관은 직관대로 재밌잖아. 응원도 있고 이벤트도 있고. 그런게 직관의 미학이지 뭐.”
“너 그냥 오늘 OO 이겨서 기분 좋은 거 아니야?”
“그런 것도 있고-”
혁재의 유니폼을 잡아챈 동해의 손이 자꾸만 떨렸다. 제게 닿은 입술이 바릇 떨리자 혁재가 웃으며 동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몸에 닿은 팔에, 동해는 주변사람들의 환호성이 자꾸만 종소리처럼 들렸다. 그때는 웃어넘겼는데. 동해는 오늘에서야 정말 직관의 미학이 뭔지 알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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