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는 주택가에 위치한 작은 바 '푸른 달' 을 운영중이였다. 분위기며 맛, 거기다 사장님의 나이스한 얼굴까지 삼박자가 고루 어울러진 곳이라는 소문이 퍼져 '푸른 달' 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참이었다. 물 들어올때 노 젓자는 말을 실현이라도 하려는 듯 동해는 쉬는 날 없이 일을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푸른 달' 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다른 날과 한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오늘따라 이상할만큼 손님이 없다는 점 정도였다. 장사가 이런날도 있고 저런날도 있는거지 뭐. 잔을 닦던 동해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도 없고 하니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찍 문을 닫고 들어가서 쉴까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출입문에 걸어놓았던 종소리가 조용한 바 안을 가득 채웠다. 어서오세요. 기분 좋은 미소를 입에 걸고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동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저, 저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동해의 엑스보이프렌드, 그러니까 전 애인 이혁재였다. 헤어지는 과정에서 이새끼, 저새끼, 시팔, 저팔 세상에 있는 욕이며 없는 욕을 다 하고 헤어진 사이였기에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쾌했다.
"와, 진짜 예쁘다."
"아, 아, 어...그런, 그러게요."
이혁재라고 아무렇지 않았느냐, 그건 절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에 서 있는 동해와 눈이 마주친 이후로 온몸의 땀샘이란 땀샘이 죄다 열린 것처럼 전신에 식은 땀이 흘렀다.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과 세번째 만남을 한 날이였는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다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온 곳이 하필이면 이곳이였다. 동네에 들어섰을 때부터 쎄한 기분이 들더니.. 혁재는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그녀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좁지 않으세요? 동해와 마주보며 앉을 수 있는 바에 자리를 잡은 그녀에게 물으니 세상 해맑은 미소와 함께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와, 진짜 좆됐다. 그녀를 따라 자리를 잡고 앉은 혁재는 제 정수리에 내려앉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가 칵테일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사장님이 추천 해주시면 안돼요?"
"그럼요. 두분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칵테일로 준비해드릴게요."
동해는 마침 잘 됐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혁재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살기를 읽은 혁재가 불안한 듯 다리를 떠니 그녀가 제법 걱정되는 어투로 괜찮느냐 물어왔다. 소리내어 대답할 기운도 없어 대강 고개만 끄덕이니 혁재에게 주던 시선을 거두고 가게 안을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그녀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을 확인한 동해가 소리내지 않고 입만 벙긋 거리며 혁재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개새끼야.'
'내가 알고왔겠냐 미친새끼야?'
'지랄하네 진짜.'
순간 욱한 혁재가 뭐라 한마디 덧붙이려는데,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탓에 얼굴에 쓰여있던 짜증은 거두고 혁재 또한 방긋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걸 앞에서 보고 있는 동해는 괜히 열이 올랐다. 둘이 만났어도 충분히 빡치는 상황인데 전 남자친구의 현 썸녀라니, 이 얼마나 개 빡치는 상황인가. 쉐이커를 부술듯 흔들던 동해가 짧은 심호흡을 하며 잔에 칵테일을 담았다. 이혁재 개새끼야, 한번 당해봐라. 두사람 앞으로 칵테일이 담긴 잔을 내보인 동해가 싱긋 웃었다. 아무 의심없이 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혁재가 푸핫 하는 소리와 함께 음료를 뱉어냈다. 이동해 저 개새끼가!
"혁재씨 괜찮으세요?"
"손님, 괜찮으세요?"
웃음을 간신히 삼키며 제게 물어오는 동해를 향해 욕이라도 시원하게 내뱉을까 생각하던 혁재가 제 체면을 생각해 화를 삭히며 대강 고개만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동해의 유치한 복수는 계속 되었다. 서비스라며 준 크래커에 와사비를 얹어서 준다던가 하는 것들이었다. 혁재는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제 앞에서 팔짱을 끼고 아니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동해에게 으르렁거렸다.
"너 또라인건 진작에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어마무시한 개또라이다."
"너는 어마무시한 개새끼야. 여기가 어디라고 얼굴을 들이밀어 개빡치게."
"네 매장인거 알았으면 내가 왔겠냐?"
결국 그녀가 오늘은 이만 가보자는 얘기를 꺼낼때까지 두사람은 그녀 몰래 으르렁 거리며 싸우기 바빴다. 오늘 같은 날은 두번 다시 안 왔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던 혁재에게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여기 자주 와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세상을 잃는다는 게 이런 느낌인건가. 혁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확인 사살 시키듯 주에 한두번씩은 꼭 푸른 달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아, 물론 혁재도 함께였다. 매번 동해와 마주보며 앉을수 있는 자리에 자리를 잡았고, 덕분에 동해의 유치한 복수는 계속 이어질수 있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움과 동시에 혁재와 으르렁 거리는게 익숙해질 쯤, 며칠동안 두사람의 발길이 뚝 끊겼다. 뭐야, 둘이 그래서 사귀는거야 마는거야. 내심 그게 신경 쓰였던 동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서오.. 뭐야. 왜 혼자냐?"
"닥쳐라 진짜."
"잘 안됐어? 안 사귀는거야 그럼? 차였어?"
"야!!"
"차였네. 이혁재 이새끼 차였네."
차였냐는 말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르는 혁재를 보며 동해는 비웃음 담긴 목소리를 내었다. 익숙하게 바에 자리를 잡고 앉는 혁재를 보던 동해가 묘한 기분에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게 근 일주일만이었다. 혁재에게 칵테일이 담긴 잔 두개를 내민 동해가 바 안쪽에서 빠져나와 문 앞에 걸린 팻말을 뒤집었다. close. 마감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혁재의 얘기도 들을 겸. 항상 그녀가 앉던 혁재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동해가 칵테일 잔 하나를 제 앞으로 당기며 물었다.
"그래서 네가 차인거지?"
"아니야."
"차였네, 차였어. 아 존나 통쾌하네."
"악랄한 새끼.."
"야. 전 남자친구가 새 애인 생기는 거 축하해 줄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명이나 되겠냐?"
아, 그건 그렇지.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려던 혁재가 멈칫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동해가 의아한 듯 바라보자 그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얘기했다.
"너 또 여기다 장난친거 아니지?"
그 얘기에 한참을 웃던 동해가 간신히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이번엔 장난 안쳤으니까 그냥 마셔도 돼. 이 대답도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혁재가 다시한번 잔을 들었고, 이번에는 잔 안에 담긴 칵테일을 한모금 마셨다. 진짜 장난 안쳤네. 테이블에 놓인 칵테일 잔이 반짝였다.
혁재와 그녀가 도대체 왜 쫑나게 되었는지, 어떤게 문제였는지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던 두사람의 대화는 어느새 과거로 흘러가게 됐다. 헤어지고 나서 어떻게 지냈는지, 그때 왜 그렇게 싸우고 헤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고 참을수 없었던 것들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진 지금 이야기를 나누니 조금은 이해가 될것도 같았다. 그때 너나 나나 진짜 어렸다. 혁재가 큭큭 거리며 웃으니 동해는 제 앞에 놓인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우냐? 설마 싶어져 물으니 동해는 이번에도 대답없이 고개만 저었다. 얘 술 못 마시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동해는 오래전부터 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 애가 바텐더를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주변에서는 참 아이러니 하다는 얘기들을 많이 했었다. 에휴. 한숨을 내쉰 혁재는 그가 만지작 거리고 있던 칵테일 잔을 제 앞으로 끌어다 놓은 후 양 손으로 동해의 볼을 쥐어 눈을 맞췄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네가 잘못했지?"
벌개진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동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 없이 동해를 바라보고 있던 혁재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야 그만 울어. 퉁명스럽게 얘기하며 눈물을 닦아주려 하는 순간, 동해가 제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춰왔다. 헤어진 연인과의 키스라,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입술만 한참 맞대고 있던 동해 또한 아차 싶어 입술을 떼려는데 큼지막한 손이 제 뒤통수를 감쌌다. 뜨거운 살덩이들이 엉키는 소리가 바 안을 가득 채웠다.
*
조금 웃긴 얘기지만 키스 사건 이후로 두사람의 사이에는 변화가 생겼다. 그러니까 그게, 몽글몽글 해졌다고 해야 하나.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두사람은 썸을 타기 시작했다. 퇴근후 하루가 멀다하고 푸른 달에 출근 도장을 찍는 혁재도, 어쩌다 혁재가 못 오는 날이면 하루종일 저텐션인 동해도 재결합에 대해선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었지만 자꾸만 상황이며 마음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게 되니 퍽 난감해하고 있었다. 분명 헤어질 때 '내가 이새끼랑 다시 만나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라던가 '저새끼랑 다시 만나면 내가 등신이지.' 라는 말을 서로 내뱉었던 게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데.. 아니, 뭐 이럴줄 알았나. 옛 생각을 하던 동해가 민망함에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사장님, 오늘 크리스마스 이븐데 그분 안 만나세요?"
"그분이요?"
"네, 그 매일 오시는 분 있잖아요."
반짝이는 눈을 하고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단골 손님을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동해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사람은 아직은 아닌거겠죠. 하며 짓궂게 웃었다. 하긴, 동해 또한 슬슬 담판을 지을 시기가 됐다고 생각을 하던 찰나였긴 했다. 그래서 오늘 만나려고 했던건데. 말이 좋아 크리스마스 이브고 크리스마스 파티지, 여길가나 저길가나 넘쳐나는 인파를 이겨낼 자신이 없어 동해가 먼저 혁재에게 그냥 제 매장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자 얘기했었다. 개새끼, 분명 알겠다고 해놓고. 약속 어기면 대가리 박기로 해놓고 오늘 아침 갑자기 급한일이 생겨 만나지 못할것 같다고 말하던 혁재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순간 열이 확 뻗쳐 욕 하려던걸 연신 미안하다 사과하는 절절한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약해져 그냥 알겠다 대답했던 제 모습이 생각났다. 아, 그냥 욕할걸.
크리스마스 이브의 푸른 달은 연인으로 가득했고, 동해의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가 되었다. 와, 나 진짜 수고했다. 영업시간이 지나 팻말을 close로 바꾼후 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동해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느라 열이 올라 빨갛게 달아오른 제 뺨을 차가운 바에 가져다 대었다. 영업시간 내내 확인하지 못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낸 그가 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은 벌써 새벽 한시였고, 혁재에게서 온 전화며 카톡은 한통도 없었다. 바쁘긴 바쁜가보네..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였다.
[야 바쁘냐?]
[나 지금 끝났어]
[집에 갈거야]
[우리집에 오던가 말던가]
혁재에게 퉁명스러운 카톡을 남긴 동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한데 영업 끝났습니다- 영혼이라곤 1그램도 담지 않은 말투로 얘길하고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못지않게 빨개진 볼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혁재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너 못 온다며!"
"네가 그렇게 서운한 티를 팍팍 내는데, 아, 더럽게 힘드네."
동해가 표현하진 않았지만 오늘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급한 일이 생겨 만나지 못할것 같다는 얘기를 했을때 서운해하던 그 목소리가 계속 신경쓰여 하던 일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달려왔던 참이었다. 일단 이거부터 받아. 그래도 명색이 크리스마슨데 빈손으로 오긴 뭐해서. 그가 내민것은 빨간 장미 한송이와 작은 케익이었다. 제가 내민것을 받아든 동해가 울먹이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자 혁재는 장난기 머금은 목소리를 내었다.
"야, 울면 안돼. 못 생겨진다."
"안 울어 개새끼야..!"
동해를 품안 가득 끌어안은 혁재가 그의 머리칼에 잘게 입 맞추며 얘기했다. 메리크리스마스, 못난아. 혁재의 등 뒤로는 두사람만의 크리스마스 시작을 알리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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