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은해 4月/튤립의 꽃말
equinox
w. na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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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 숨도 못 쉴 만큼 복잡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혁재는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면서도 양 옆으로 쭉 늘어서 있는 상가에는 전혀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다. 금방 새로운 가게가 생기고, 또 망하기를 반복하는 것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좋아했던 베이커리가 사라진 후에는,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를 쳐다본 적조차 없었다.
전날 비가 온 덕분인지 며칠째 심했던 미세먼지가 사라져 하늘이 파랬다. 점점 따뜻해지는 햇빛에 몸은 따뜻했고, 아직까지는 조금 차가운 바람이 더해져 얼굴은 시원했다. 혁재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에 기분이 좋아지려던 참이었다. 어딘가 익숙하고도 그리운 향기가 혁재의 코를 간지럽혔다.
향기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햇빛이 가득 들어왔다. 눈에 담기에는 따가운 빛들이 미간을 주름지게 만들었다. 이마 위로 손을 들어 빛을 가린 후에 다시 눈을 뜨자, 노란 꽃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고개를 들었고, 저도 눈이 부신지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게 잠시 서있던 남자는 가게 안으로 향했다.
꽃집이었다. 지금까지 혁재가 보았던 꽃집들과는 달리 매우 오픈되어있는 곳이었다. 가게 앞의 거리까지 작은 꽃다발들과 다육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햇빛을 쬐고 있었고, 한쪽 켠에는 양동이에 담긴 꽃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가게의 가장 안쪽에 아까의 그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늘어진 리본을 잘라 색색의 비닐로 싸여진 꽃을 묶었다. 그 섬세한 손짓과 삐죽 나온 입이 혁재의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혁재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러 꽃들의 향이 섞이긴 했지만 화분의 흙냄새 그리고 포근한 햇빛의 냄새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꽃다발을 다 만들었는지 조금은 뿌듯한 얼굴로 가게를 나오는 남자를 보고 혁재는 그제서야 흠칫 놀라며 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날씨와 파란 하늘, 꽃향기와 함께 갑작스럽게 찾아온 봄 때문에 잠깐 넋을 놓았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비웃는 듯, 혁재의 머릿속은 하루 종일 노란 꽃으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아있는 내내 멍한 모습의 혁재를 동료들은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옥상으로 떠밀었고, 출근한지 몇 시간 만에 다시 봄이 된 햇빛 아래로 나와야했다.
- 왜 이러는 거야 짜증나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노란 꽃들에 짜증이 났다. 일할 때는 한 번도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 꽃이 퍽 마음에 들었나보지. 퇴근할 때 그 꽃집에 다시 들러 꽃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퇴근을 기다린 게 얼마 만이었는지 모르겠다. 애인과 헤어진 후로는 미친 것처럼 일을 해서라도 머릿속을 다른 생각으로 꽉 매우고 싶었고, 그래서 누구보다 퇴근을 원치 않은 혁재였다. 그랬던 그가 아침에 잠깐 보았던 노란 꽃 때문에 평소 거의 보지 않는 손목시계를 몇 번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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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가 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르게 짐을 챙기는 혁재를 동료들이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 혁재씨 오늘은 일찍 퇴근하네요? 매일 제일 늦게 퇴근하던 사람이 웬일이래요?
- 오늘은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을 거는 동료들에게 그저 그런 대답을 던지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꽃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노란 꽃을 사서 돌아가면, 더 이상은 생각나지 않겠지. 종일 짜증이 나있던 모습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혁재는 입가에 미소를 건 채 가게에 도착했다. 아침의 노란 꽃을 찾으려 걸려있는 양동이들을 보고 있는데, 아까 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어서오세요. 찾으시는 꽃 있으세요?
가슴이 따끔했다. 아침에는 햇빛 때문에 잘 보지 못했던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얼굴에 띄운 미소라니,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아. 노란 꽃을 찾고 있는데요.
- 노란 꽃이라면 이쪽에 있어요. 프리지아도 있고, 장미도 있고, 개나리 가지도 있어요.
아침에도 대충 봤었지만, 막상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또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꽃가루들 때문인지 혁재의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 편하게 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꽃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노란 꽃들로만 채워진 양동이들이 있는 벽으로 안내한 남자는 아침에 꽃다발을 만들던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종일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노란 꽃들이 지금은 혁재의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나 노란 꽃을 기다렸던 혁재의 눈은 남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또 뭔가를 만들고 있는 남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무렇게나 흥얼거리는데도 감미로운 느낌이 드는 것이 남자의 목소리 덕인 것 같았다. 혁재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돌렸고, 혁재는 그에 놀라 아무 꽃이나 가리키며 말했다.
- 이 꽃으로 한 송이만 주세요.
- 아, 네. 프리지아로 드릴게요. 포장하세요?
- 네.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름을 말하며 남자가 노란 꽃을 한 송이 꺼내들었다. 포장을 하러 가는 뒤통수에서 아침에 맡았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남자의 하얗고 가는 손이 꽃을 감싸고 있는 종이를 몇 번 지나자, 금세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이 만들어졌다.
- 이제 곧 봄이라, 노란 꽃들을 많이 찾으시더라구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리본을 매만지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황홀하던지. 평소의 혁재였다면 별 시덥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넘겼을 텐데, 남자의 얘기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남자 뒤의 목화 리스로 가득 찬 예쁜 벽 탓인지, 예쁜 웃음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예쁜 얼굴 탓인지.
- 다 됐습니다. 예쁘게 선물하세요!
선물? 아. 포장했었구나. 이 꽃을 어떡하지. 혁재의 집에 꽃병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누구한테 줄까 했지만 선물해 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꽃을 받아들고는 가게를 나왔다. 갑자기 왜 꽃을 산건지, 이 꽃은 어떻게 할 건지. 하는 질문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노란 꽃 한 송이를 들고 퇴근 하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퇴근 후에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을 타고,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것이 힘겨웠던 혁재였지만, 오늘만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꽃이 길을 밝혀주는 것 같았다.
- 예쁘네.
혼자 살아 칙칙했던 집이 노란 꽃 하나로 한층 밝아졌다. 꽃을 포장하던 남자의 웃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남자의 웃는 얼굴은 꽃보다 더 밝았고, 더 봄이었고, 더 예뻤다. 혁재는 노란 꽃을 보며 남자의 얼굴을 생각했다. 목소리를 생각했고, 향기를 생각했다. 그렇게 혁재의 집은 노란 꽃의 향으로 가득 찼고, 남자의 웃는 얼굴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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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재의 온 신경은 매일 꽃집으로 쏠려있었다. 퇴근길에 꽃을 사는 것도 습관이 되었는지, 집에 쌓인 꽃들이 벌써 4송이였다. 오늘도 혁재는 꽃집으로 향했다. 어떤 꽃을 살지에 대한 생각은 있을 리가 없었다. 오늘은 뭘 입었을까, 머리는 내렸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남자랑은 별다른 대화를 한 적도 없었고, 아는 것도 전혀 없었지만 혁재의 머릿속은 늘 남자로 가득 차있었다. 처음엔 부정했었지만, 이제는 그냥 첫눈에 반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름도 모르는데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의아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뭐 어떤가. 저 꽃집 주인이 저렇게 예쁜데.
- 안녕하세요! 날씨가 더 따뜻해졌죠?
오늘도 여전히 웃으며 인사를 하는 남자가 좋았다. 매일을 찾아온 보람이 있었는지 남자는 편하게 인사를 건넸다. 혁재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 이 꽃은 뭐예요?
- 아 그건 히아신스에요. 빨간 히아신스 꽃말이 ‘내 마음에 당신의 사랑이 머물러 있습니다.’ 래요. 완전 로맨틱하죠!
- 아, 그럼 이걸로 주세요.
- 한 송이, 포장 맞으시죠?
침착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지만 남자에게 말을 거는 혁재의 가슴은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로맨틱한 걸 좋아하는 듯 신이 나서 말을 하다 환하게 웃는 남자에게 히아신스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어떡하지. 선물할까? 혁재는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있었다.
- 애인 분한테 선물하시나 봐요!
꽃을 포장하던 남자의 말에 혁재의 가슴이 꿍 내려앉았다. 애인이라니. 매일같이 꽃 한 송이씩을 포장해가는 젊은 남자 손님이니까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만 했다. 단번에 부정하고 싶었지만 달리 댈 핑계도 없었다. 제가 꽃을 좋아해서요. 라고 둘러대기엔 꽃을 모르는 티가 너무 났고, 그냥 못들은 척 넘기는 수밖에 없나. 하며 눈을 이리저리로 굴리고 있는 혁재의 손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
- 여기 있습니다! 애인 분은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멋지고 로맨틱한 애인도 있고!
늘 꽃을 포장해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남자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혁재의 손에 꽃을 쥐어주었다. 남자의 손이 닿은 부분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까지 뜨거워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탓에 혁재에게 남자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꽃을 받아들고는 허겁지겁 가게를 나오는 혁재의 귀가 뜨거웠다. 사람들의 손이 아무렇지 않게 부딪히는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도 남자의 손의 감촉이 사라지질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얼굴부터 확인한 혁재는 변기위에 주저앉았다.
- 미치겠다.. 얼굴 이렇게 빨개졌었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혁재가 현관 바닥에 떨어져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적색의 히아신스가 붉어진 제 얼굴을 놀리는 것 같았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이 창피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히아신스를 지금까지 산 꽃들 위에 올려두었다.
- 내일 얼굴 어떻게 보냐..
놓인 꽃들을 보며 생각하던 혁재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아, 내일 주말이구나. 주말에는 출근하지 않기 때문에 남자를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출근도 안 하는데 거기까지 찾아가기도 뭐하고. 사복을 입고 남자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또 얼굴이 뜨거워졌다. 사복 입고 만나면 데이트 하는 기분이잖아! 혁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침대를 굴렀다. 종일 그 남자 생각밖에 안하는데도, 좀 더 생각하고 싶었다. 좀 더 알고 싶었다. 오늘은 살짝 닿은 것뿐이지만, 그 따뜻한 손을 잡고 싶었고, 꽃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이 계속 되자 혁재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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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혁재는 출근하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아, 정장 말고 다른 옷 입은 걸 보여주는 건 처음인데, 어떡하지. 긴장되는지 계속해서 입술을 무는 제 모습이 거울 속에서 보였다. 입술 까칠하면 안 좋아하겠지. 그러다 또 금세 얼굴이 펑하고 터져버리는 혁재였다. 이름도 모르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람이 별로 없는 지하철을 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주말에는 밀린 잠을 자기에 바쁜 혁재였기에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이 퍽 낯설었다. 꽃집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혁재였다. 간만에 내려본 머리도 안 어울리는 것 같고. 평소처럼 그냥 포마드를 할 걸 그랬네. 옷도 마음에 안들고.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였다. 분명 느즈막한 오후에 도착하려 했었는데 벌써 평소 같았으면 퇴근하고 꽃집에 들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미쳤어. 너무 늦은 거 아니겠지. 거리에 조금 삐져나와있던 다육이들을 정리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혁재는 멈출 줄을 모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트레이를 들었다.
- 어, 오늘 안오실 줄 알았는데! 이리주세요! 제가 하면 되는데.
- 아니에요.
혁재가 반가웠는지 웃으며 얘기하는 남자 때문에 혁재의 가슴은 전보다 더 쿵쿵거렸다. 이 사람이 지금 누구 피 말려 죽이려고.
- 오늘 출근 안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 네. 오늘 쉬는 날이에요.
혁재는 묵묵히 남자를 도와 다육이들을 가게 안으로 옮겼다.
- 오늘은 주말이라 일찍 닫았는데, 손님은 특별히! 주문하셔도 괜찮아요! 구경하시고 말씀해주세요!
- 아 오늘은 따로 찾는 꽃이 있어요.
미리 꽃을 생각하고 간 건 처음이라, 혁재도 어색하게 말을 꺼냈고, 남자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금세 또 표정을 풀고 씩 웃는 남자였다.
- 아, 어떤 꽃 찾으세요?
- 튤립이요. 노란색.
어제 급하게 꽃말과 개화시기를 맞춰 찾아낸 꽃이 튤립이었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 그러니까 혁재가 남자에게 첫 눈에 반했을 때. 혁재의 머리를 꽉 채운 게 노란 꽃이었기 때문에 노란 튤립을 선물하고 싶었다. 평소처럼 남자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한 송이 꽃이 오늘따라 더 예뻤다. 자신한테 선물할 꽃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따라 신경을 더 써서 꽃을 포장하는 남자였다.
- 오늘은 꽃도 미리 정해오시고, 특별한 날이신가 봐요!
네. 그쪽한테 선물할거니까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혁재였다. 그러나 어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준비해온 말들이 있었기때문에 혁재는 자신을 꾹 억눌렀다.
- 네. 이제 퇴근하세요?
- 네. 마무리하고 저도 집에 가야죠!
- 그럼 같이 가요.
- 네?
혁재의 말에 놀라는 남자의 모습이 귀여웠다. 꽃만 만지면서 대답을 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혁재를 바라봤다. 동그랗게 뜬 눈이 예뻤다.
- 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요.
- 아. 저 청소도 해야 하는데..
- 기다릴게요.
좀처럼 웃지 않던 혁재가 다정하게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자 남자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 그럼 아르바이트 좀 해주세요!
포장된 꽃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남자와 혁재는 가게를 정리했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파란 잎들을 치우며 시재를 체크하는 남자를 보았다. 혁재의 눈빛은 그 어떤 꽃보다도 달콤한 향이 날 것 마냥 달달했다.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혁재의 눈은 남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게 밖을 나오자 어느새 달빛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햇빛만큼 눈이 부실정도로 밝지는 않았지만 둘을 비추기에는 충분한 달빛이었다. 발뒤꿈치를 들어, 가게 문을 잠그는 남자의 얼굴에 달빛이 닿았다. 햇빛에는 눈을 질끈 감았던 남자였지만 달빛에는 크고 동그란 눈을 제대로 뜨고 있었다. 밤하늘과 잘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머리칼과 날카로운 얼굴선이 혁재의 눈을 가득 채웠다.
- 아!! 꽃다발 안들고 나오신 것 같은데!!
남자의 눈이 남자를 바라보던 혁재의 눈과 마주쳤다. 어딘지 진지해 보이는 혁재의 표정에 남자가 발뒤꿈치를 내리고 혁재의 앞에 섰다. 남자가 제대로 서자 달빛이 남자의 뒤를 비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 분위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시원한 밤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가며 조금은 달아오른 듯한 얼굴들을 식혀주었다. 눈빛만이 오고가는 조용함을 깨고 남자가 먼저 눈을 피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꺼냈다.
- 꽃.. 들고 나와야 하지 않아요? 선물하시는 건데..
- 방금 선물했어요.
- 네?
- 그쪽한테 선물한 거라구요.
나름 목소리도 좀 깔아보고, 조금은 여유로운 척을 하며 말을 했긴 했지만 혁재의 손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 원래 꽃에 관심 하나도 없었는데, 그쪽 주려고 어제 꽃말도 찾아본 거예요. 튤립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꽃집에서 일하는, 그것도 플로리스트한테 꽃말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게 웃겼지만 남자에게 멋있게 고백하고 싶어 생각하고 또 생각한 말이었다.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을까. 표정이 이상하지는 않을까. 끊임없이 불안하고 걱정되긴 했지만 혁재는 그저 지금에 충실하고 싶었다. 이 타이밍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 사랑의 고백이에요.
- ....풉.
풉? 갑자기 웃음이 터진 남자가 허리까지 굽혀가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혁재의 얼굴에도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왜 웃는 거지. 멋있어 보이려고 연습한 건데. 너무 오글거렸나? 일주일도 안 봤는데 고백한다는 게 어이가 없나? 아니면 남자인 내가 남자인 자기한데 고백하는 자체가 웃긴가? 혁재의 머릿속이 당황에서 황당으로, 또 한번 짜증으로 바뀌었다. 이 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긴장하고 준비했던 것들이 다 무색해지고 무너진 것 같았다. 자신의 진심이 짓밟혔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이 혁재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 아.. 진짜 많이 웃었네요 오랜만에. 아.. 배아파..
- 제가 고백한 게 웃겨요?
-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풉..
- 하.
결국 화가 날대로 난 혁재는 남자의 옆을 지나쳤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황해 할 거라곤 생각했었지만 저렇게 사람의 진심을 비웃을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했었는데. 혁재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 아 어디가요!
남자가 자신을 지나치는 혁재의 손을 붙잡았다. 이 새끼가 지금 뭐하자는 거지? 남자의 호칭을 금세 새끼로 바꿔버린 혁재가 자신을 붙잡은 남자의 얼굴을 노려봤다. 달빛이 남자의 얼굴을 비춰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씨발. 열받게도 예쁜 얼굴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비웃음 당했놓고도 예뻐보이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예쁘긴 존나게 예뻤다.
- 사람 말은 끝까지 듣고 가야죠.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차가운 표정으로 말까지 짧아진 혁재에 남자는 한 번 더 웃음이 터질 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눈빛으로 돌아온 남자의 모습에 혁재의 눈이 움찔했다.
- 노란 튤립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 내가 아까 말했잖아. 사랑의 고백이라고.
- 아니요. 그건 빨간 튤립이고. 노란 튤립.
뭐? 꽃 색깔 별로 꽃말이 나뉘던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던 혁재가 남자의 말에 적지 않게 당황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게나 잡아보고 싶었던 남자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 노란 튤립의 꽃말은 헛된 사랑이에요. 그런 꽃을 선물한다는 건, 그쪽에 대한 제 마음을 접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게 된 혁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 남자가 눈치 채지 못해 다행이었다. 귀까지 달아올라 붉어진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방금 남자의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쉽게 말해서 상황파악이 되질 않는 혁재였다.
- 아니 진짜.. 큭큭.. 웃겨.. 그니까 저도 그쪽한테 관심 있다구요.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엄청 허술하네.. 나 웃기려고 그러는 거예요? 아.. 배아프다..
남자의 직설적인 말에 혁재가 남자의 머리를 꾹 눌러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 아씨.. 사람 놀라게.
- 말이 짧아졌네요 그새? 이거 놔요 얼굴 좀 보게.
- 아 민망하니까 그만 봐.
- 큭큭.. 아, 혁재씨 진짜 재밌는 사람이네요. 평소엔 잘 웃지도 않더니.
- 웃지마.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어.
- 사원증 매일 달고 다니는데 어떻게 몰라요. 아 이것 좀 놔보라니까?
손을 치우고 머리를 혁재 앞으로 쭉 내밀어 보이는 남자였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남자에 또 얼굴이 붉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혁재는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에게 눈을 맞추었다. 한참동안이나 혁재를 쳐다보던 남자가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 역시. 잘생겼네.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니까.
- 뭐?
- 내가 꼬시면 안 넘어오는 사람 없거든요. 남자든 여자든.
- 하.
- 동해에요.
- 어?
- 내 이름. 이동해라구요.
동해. 남자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혁재가 생각해왔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게 능글맞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게 또 매우 귀여운 사람이었다. 꽃말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노란 튤립이랑 잘 어울리는 예쁜 웃음이 가득했다. 하얀 달 아래에서 눈을 마주치고 씩 웃던 동해가 말했다.
- 그래서 나, 노란 튤립 받아요?
- 씨발. 갖다버려.
끝까지 동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 모습을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보던 혁재도 결국 같이 웃음이 터졌다. 노란 튤립의 꽃말은 헛된 사랑이다. 하지만 둘에게 꽃말은 전혀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지금 같이 손을 잡고 있다는 게 중요할 뿐. 달빛 아래 그들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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