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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우리에게] 모든날 우리에게_은사

"야 이혁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에 혁재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얼마 후 자신의 어깨에 팔이 걸쳐짐과 동시에 쫑알거리는 말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인마. 왜 대꾸도 안 하냐?"

 

"미안. 왜?"

 

"아니, 너 내일 같이 ㅇㅇ공원 가기로 한 거 잊지 말라고~"

 

"그걸 어떻게 까먹냐. 네가 오늘만 해도 자그마치 5번은 얘기했는데."

 

"헤헤, 그런가. 어쨌든 절대 까먹지 마!! 시간 꼭 지켜!!"

 

 

자기 할 말만 하고 냉큼 사라지는 이동해가 얄미웠지만 그는 이미 저 멀리 뛰어가버린 후였다.

 

미치겠네. 혁재는 답답함에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바로 저 약속이 요 며칠간 혁재의 고민거리였다. 

토요일 오전 10시, 이동해 집 앞, 같이 ㅇㅇ공원 가서 타임캡슐 꺼내기. 약속은 간단했고, 만나는 목적도 매우 간단했지만, 그 목적이 혁재를 미치게 했다.

 



혁재와 동해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붙어 다닌 '절친'이었다. 물론, 동해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혁재는 동해를 향한 일방적인 짝사랑을 시작했고, 이 감정은 25살이 되도록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차마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아 마음을 정리하려고 군대도 일찍 갔지만, 저를 따라 비슷하게 입대를 해버린 동해 때문에 휴가 때도 계속 만나면서 오히려 감정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이동해는 어디서 주워들어 왔는지 타임캡슐을 만들자며 혁재를 졸라댔고,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는 동해를 이기지 못한 혁재는 결국 오케이했다. 10년 뒤의 자신과 상대방에게 편지를 써서 타임캡슐 안에 넣어놨는데, 이게 문제였다. 15살 패기 넘치던 이혁재는 10년 뒤에 이동해와 연애를 하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동해를 향한 편지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지금쯤이면 우리가 사귄 지 얼마나 지났으려나?' 같은 문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오 이 미친놈!!! 내가 진짜 왜 그랬지? 그냥 당일날 아픈척할까? 계단에서 확 굴러버려? 타임캡슐을 미리 꺼내는 생각도 안해본 건 아니지만, 빌어먹게도 타임캡슐을 묻은 위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편지가 담긴 상자를 묻으면서 꼭 10년 뒤에 같이 꺼내러 오기다! 하고 말갛게 웃던 동해의 얼굴만 똑똑히 기억날 뿐. 그때 이동해 진짜 이뻤... 미쳤구나 정말.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20시간 남짓이었지만, 혁재의 머릿속에는 어떠한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

 

 

 

"여기 어디쯤 묻어놨었는데..."

 

 

집중해서 땅을 파고 있는 동해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10년 전의 동해가 지금의 자신에게 썼을 편지 내용이 궁금하긴 했지만 15살의 내가 지금 땅을 열심히 파고 있는 이동해에게 쓴 편지를 생각하면 그냥 동해가 편지를 찾지 못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제발 못 찾아라. 제발.

 

 

덜컥.

 

 

"어? 이건가 보다!!"

 

 

신이시여, 지금 삽에 걸린 물체가 그냥 돌덩이라고 해주세요.

 

 

하지만 신은 끝내 혁재의 간절한 기도를 무시했다. 이동해가 바닥에서 꺼내 든 것은 분명 10년 전 그들이 편지를 넣어놨던 상자였다. 상자 위에는 동해의 글씨체로 '10년 뒤의 우리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하, 드디어 찾았네! 얼른 너희 집 가서 읽어보자!"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한숨을 푹 내쉰 혁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걸어가는 동해의 뒤를 따랐다.

 

 

 

*

 

 

 

"자, 내가 쓴 거 먼저 읽어봐! 그럼 나도 과거의 내가 쓴 편지를 읽어볼까나~"

 

 

상자 위쪽에 동해가 쓴 편지들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혁재가 동해가 건네는 편지 봉투를 받아 열어보았다. 

 

 

 

To. 나의 베스트 프렌드 혁재!!

혁재야 안녕!! 나 동해야!! 이렇게 편지를 쓰려니까 조오금 어색하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벌써 5년이 넘었네! 나랑 지금까지 친구 해줘서 고마워ㅎㅎ 아마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겠지? 너는 정말 좋은 친구야! 이 타임캡슐도 내가 만들자고 엄청 졸랐는데... 너가 안 들어줄까봐 사실 조금 무서웠어 ㅠㅠ 그래도 너 지금 되게 열심히 쓰고 있어! 아마 이 편지를 읽는 시점엔 후회 하나도 안 할걸? 이런 게 다 추억이야~ 으음... 10년 뒤 우리는 뭘 하고 있을까? 같이 대학을 다니고 있겠지? 같은 대학이려나? 군대는... 알아서 잘 했길 바래. 그때는 내가 좀 꼼꼼했으면 좋겠다... 오늘도 한국사 교과서 집에 두고 와서 결국 너한테 빌렸는데... 항상 나 때문에 수고가 많아ㅎㅎ 너 기억하고 있으려나?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맨날 뭐 흘리면 너가 다 챙겨줘서 애들이 다 너보고 동해맘이라고 불렀잖아 ㅋㅋㅋ 넌 아직도 동해맘일까? 그래도 나도 요즘 잘 챙기고 다니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때는 아닐 수도 있겠네. 조금 기대하고 있어야지ㅎ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겠다. 너 나랑 진짜 꼭 평생친구 해야된다?? 알겠지?? 쓰고 보니까 좀 오그라드네... ㅎㅎ 그럼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혁재야!! ㅅ..사..사랑해♡  아 오글거려 ㅋㅋㅋㅋㅋ진짜 안녕~^^

From. 너의 베스트 프렌드 동해^^

 

 

 

이동해답다 정말. 편지를 읽을수록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에 어느새 혁재는 함박웃음을 짓고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줄에 있는 동해의 사랑한다는 말에 혁재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너는 이렇게 쉽게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구나. 네가 나에게 하는 말에는, 나와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구나.

 

 

다시금 착잡해진 혁재와 달리 동해는 과거의 자신이 쓴 편지를 굉장히 흥미롭게 읽고 있었다. 잠시 후 다 읽었다-! 하고 편지를 내려놓은 동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혁재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어땠어? 과거의 내가 뭐래? 나 기억이 잘 안 나."

 

"궁금하면 네가 봐 보던가."

 

"안돼! 과거의 내가 자기 거만 보는 게 타임캡슐의 매력이랬어!"

 

"그럼 말해주는 것도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런 말은 없었지롱~"

 

 

장난스럽게 웃는 동해에게 혁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내자고 그러더라."

 

"오오, 근데 벌써 15년 넘게 친구였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리는 앞으로도 당연히 친구겠지~"

 

 

해맑은 동해와 달리 혁재는 씁쓸한 기분을 감춰야만 했다. 너와 나의 사이가 친구 이상이 되길 바라는 건 나의 욕심일까.

 

 

"그럼 이제 네가 쓴 거 읽어볼 차례네! 나 완전 기대한다!!"

 

 

아 맞다. 동해의 편지를 읽느라 잠시 잊었던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To. 미래의 나라고 쓰여 있는 봉투를 받아든 혁재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편지 봉투를 뜯는 동해를 피해 슬그머니 자신의 방으로 피신했다. 이 편지만 읽어보고 바로 생을 마감하던가 해야지... 한숨을 내쉰 혁재는 10년 전의 자신을 욕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 봉투를 열었다. 

 

 

 

To. 10년 후의 동해에게

 

 

 

어?

 

편지의 시작이 무언가 이상했다. 혁재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편지는 동해가 받아야 할 편지였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편지 내용을 후다닥 훑어보았지만 읽을수록 동해에게 쓴 편지라는 사실만이 분명해졌다. 혁재의 머릿속은 굉장히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지금 이동해가 읽고 있는 것은?

 

 

헐레벌떡 거실로 나간 혁재의 눈에 열심히 편지를 읽고 있는 동해가 들어왔다. 저거 분명 방금 전에 자기 편지만 보는 게 타임캡슐의 매력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나한테 뭐라고 썼었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다가 동해의 표정도 어딘가 미묘해서 당최 내용을 종잡을 수 없었다. 기척을 죽인 혁재는 슬그머니 동해 곁으로 다가가 자신이 쓴 편지 내용을 읽어보았다.

 

 

 

To. 10년 후의 나에게 

안녕 이혁재? 25살이라니... 아직 나한텐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나이네. 당연히 잘살고 있겠지? 너는 멋진 놈이니까 분명 대학도 잘 들어갔을 거고 군대도 잘 갔다 올 수 있을 거야. 아, 갔다 왔으려나? ㅋㅋㅋ 사실 나는 네가 부럽다. 동해랑 보낸 시간이 나보다 10년이나 많네. 25살의 이동해는 어때? 여전히 예쁘지? 나는 아직도 생생해. 작년 4월, 우리 학교 앞 벚나무 아래에서 흩날리는 벚꽃잎을 잡으려고 애를 쓰던 이동해가. 사실 동해랑 함께했던 모든 시간은 절대 잊을 수 없겠지만, 다 쓰면 너무 길어질 테니까 이 정도만 얘기할게. 이동해는 웃을 때 정말 예뻐서, 매일 웃었으면 좋겠어. 근데 또 남들 앞에서 웃으면 괜히 신경 쓰여. 참 이기적이다, 그치? 아직 좋아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동해가 좋으면 지금 너는 얼마나 이동해를 좋아하고 있을까? 너무 좋아서 죽어버렸을까봐 걱정되네ㅎ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데, 내 첫사랑이 동해같이 좋은 사람이라 너무 감사하고 있어. 네가 나보다 동해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별 말 안 하지만 너 동해 울리면 진짜 죽는다. 내가 타임머신 타고 너 찾아갈거야. 남은 인생도 동해랑 같이 행복하게 보내야 돼, 알겠지? 그럼 잘 지내.

 

 

 

어라?

 

편지를 읽을수록 혁재의 동공은 크게 흔들렸다. 이건 그냥... 이동해 주접 편지잖아!!! 정말 중2병을 심하게 앓았던 게 분명하다고 과거의 자신을 욕하던 혁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이동해는 이걸 지금 다 읽은 거잖아?

 

일단 최대한 빨리 이 편지를 뺏어야겠다고 생각한 혁재가 편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동해 너는 왜 내 편지를..."

 

 

혁재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혁재를 돌아본 동해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반짝거리고 있었다. 동해의 눈물을 본 혁재의 손은 허공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 울어???"

 

 

혁재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긴, 친구가, 그것도 남자놈이 자기를 좋아했다는 게 충격적이겠지. 일단 변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혁재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 동해가 눈에 맺힌 눈물을 콕콕 찍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야이씨. 이혁재 너 왜 이렇게 글을 잘 써. 나 완전 감동받아서 3번이나 더 읽었잖아... 킁."

 

 

동해의 말에 혁재는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너 지금 이 편지 내용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응. 네가 나 좋아한다는 거 아니야? 심지어 내가 첫사랑."

 

"...알면서 그런 반응이 나와? 안 놀랐어?"

 

"처음 읽었을 땐 되게 놀라긴 했는데, 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나 눈치 되-게 없다. 네가 날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여태껏 몰랐다는 거잖아."

 

 

동해의 반응은 혁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굉장히 무덤덤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최악은 아닌 결과에 긴장이 풀린 혁재가 한숨 돌리는 순간,

 

 

"근데 혁재야, 너 그럼 아직도 나 좋아해?"

 

 

커헉,

동해가 던진 다음 폭탄에 맞은 혁재는 결국 침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렀다. 주저앉아 계속해서 기침을 해대는 혁재에 동해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혁재의 등을 툭툭 쳐 주었다.

 

 

"켈록, 고마워."

 

"뭘. 괜찮아? 내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나..?"

 

 

어. 완전. 이라고 대답하고 싶은 걸 참은 혁재는 기침 몇 번을 더 함으로써 대답을 미뤘다. 

 

 

10년 동안 잘 숨겨왔었는데.

 

여기서 대답을 잘못 하면 내가 지켜온 시간들이 무너진다.

 

 

"좋아했지. 그것도 엄청."

 

 

이건 나에게 닥친 일생일대의 위기이지만,

 

 

"그리고 지금도."

 

 

동시에 일생일대의 기회이기도 했다.

 

 

씨익 웃으며 대답을 하는 혁재에 동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기침 때문에 쭈그려 앉아 있던 혁재가 읏차- 몸을 일으켜 동해와 눈을 맞추었다.

 

 

"언젠가는 꼭 고백해야지- 생각은 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진짜 좋아해, 동해."

 

"..."

 

"너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우리의 관계를 조금 더 발전시키고 싶어."

 

"..."

 

"혹시 너도 괜찮다면, 나랑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

 

 

빨개진 얼굴로 혁재의 고백을 듣던 동해는 안절부절해 하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혁재의 품에 안겨들었다. 혁재의 품에 파묻힌 동해는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너 진짜 나한테 완전 잘해야 된다. 내가 착하니까 받아주는 거야."

 

 

새빨개진 동해의 귀가 귀여워 푸흡, 하고 웃음이 터진 혁재는 환하게 웃으며 동해를 꽉 껴안았다.

 

 

"당연한 소리를."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두 연인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