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여기있지?"
그나저나 아까부터 아랫도리가 존나 허전한데.. 설마. 동해는 얼굴을 잔뜩 구긴채로 덮고있던 이불을 살짝 걷어 이불 속을 확인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 옛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였다. 아무래도 우리 둘, 제대로 사고친것 같다.
/
"그래서 니말은, 이혁재랑.."
"닥쳐. 더이상 듣고 싶지않아..."
"미친새끼."
그러니까 왜 안 마시던 술을 마셔가지고. 쯧쯧. 규현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은 동해가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졌다. 아버지가 예전부터 해주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살면서 조심해야 할 것들 두가지. 돈, 그리고 술. 어릴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였고, 애초에 술을 잘 마시는 타입도 아니였기에 친구들과 선배들의 권유에도 굴하지 않고 콜라만 주구장창 마셔댔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동해는 자기자신을 자책이라도 하는듯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였던 것 같다. 이 멍청한 새끼! 동해는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어댔다.
"야, 근데 중요한건."
"중요한거...?"
"삽입의 유무지."
규현의 돌직구에 당황한 동해가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한채로 벌떡 일어나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 미친새끼가 지금 뭐라는거야!
"야! 입은 갑자기 왜 틀어막고 지랄이야!"
"아, 좀 닥쳐봐 진짜. 쪽팔려서 너랑 같이 못 다니겠어."
"내가 뭐 틀린말 했냐?"
그렇다고 해서 맞는 말도 아니잖아, 븅신아. 신성한 캠퍼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선택이였다. 빈 강의실이였기에 망정이지, 혹시나 여자선배들이 들었더라면 동네방네 '3학년 경영학과 이동해가 게이라카더라.' 하는 소문이 나는건 뻔할 뻔자였다. 문을 열고 텅텅 빈 복도를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은 동해가 제 앞에서 아직도 조잘거리고 있는 규현을 있는 힘껏 쏘아보며 물었다. 그게 왜 제일 중요한 일인데?
"삽입이 없는 섹스는 2퍼센트 부족하지."
"...그런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 잘 생각해봐."
잠 깨고 나서 본 니 몸에 키스마크 있었음? 규현의 물음에 동해는 가만히 생각했다. 있었다. 가슴팍에 두개, 허벅지 사이에 하나. 이혁재 개새끼야!! 속으론 혁재를 껌 씹듯 씹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헐. 긍정을 뜻하는 동해의 행동에 적잖이 놀란 규현이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갔을 확률 45퍼센트.
"어제 있었던 일 하나도 기억 안나?"
"그냥 중간중간.."
"읊어봐."
명령하는 듯한 규현의 말투에 진지하게 '저 놈의 대가리를 반으로 갈라버릴까' 생각했던 동해가 이내 생각을 바꾸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내려 애썼다.
"이혁재가 힘들다해서 걔네 집에서 술 마시면서 고민 들어주다가 맞아서 키스하고.."
"그리고."
"하다가... 아, 씨발."
"왜? 뭐 기억났냐?"
"내가 깔렸어."
진지하게 말을 듣고 있던 규현이 강의실이 울릴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웃어. 제 앞에서 두눈에 눈물까지 달고 금방이라도 숨 넘어갈 듯이 웃는 그를 보고 있으니 지하로 떨어졌던 기분이 지하땅굴까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존나 우울해.. 동해는 책상에 머리를 박은채 괴로운듯 우는 소리를 냈고, 한참을 웃던 규현은 새빨개진 얼굴과 함께 아직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당연한거고.
"지랄. 그게 왜 당연한 일인데!"
"몰라서 묻냐?"
"...아니."
곰곰히 생각하던 그가 어느새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짓어 보이자 규현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너 걸어다닐때 어때?"
"뭐?"
"왜, 다들 그러잖아. 섹스하고 나면 허리랑 꼬리뼈랑 존나 아프다고."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
"꼽냐?"
아무래도 이새끼 이거,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다. 서둘러 말을 돌리는 규현의 행동이 영 미심쩍었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였다. 끝까지 갔냐 안갔냐를 가리는게 우선이였기에 그를 추궁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아무튼, 너 안 아프냐?"
"그러니까 막 못 걸어다닐 정도로 아린건 아닌데... 그냥 좀..."
"좀?"
아프다고, 개새야. 웅얼거리는 동해의 말을 용케 알아들은 규현이 입을 쩌억 벌렸다. 끝까지 갔네. 혁해 잤잤이요, 님들. 자기는 꼭 혼전순결을 지키겠다 말하고 다니던 동해의 모습이 괜히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결심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규현은 왠지 그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고 많은 사람중에 이혁재라니. 동해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같은 과에 겹치는 수업도 많아 피해다닐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걸려도 하필 이혁재냐."
"내말이! 거지같네 진짜.."
"존나 세고 사람보길 돌같이 한다는 소문이 난 목석 이혁재를 꼬신 방법이 뭡니까?"
사실 동해는 혁재랑 이렇다할 정도로 친한사이는 아니였다. 몇달전, 제 뒤에 앉은 혁재에게 펜을 빌린 후로 말문이 트여 점점 친해지는 단계였는데... 그놈의 술이 웬수라고, 의도치않게 역사를 세워버린 것이였다.
"나 이혁재 어떻게 봐야 돼?"
"사내대장부가 뭐가 걱정이냐?"
"쿠크다스 심장이라 으스러진다고."
"맞다, 새가슴 이동해."
"됐고, 아 진짜 어떡하지?"
내일 당장 수업이 있는터라 한시라도 빨리 대책을 세워야했다. 안그러면 나 심장떨려 죽을지도 모름. 빨리 방법을 알려달라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동해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한참동안 혼자 고민을 하던 규현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튀어!
"꼭 얘기해야 된다는 법 있냐? 그냥 도망가면 돼. 강의 끝나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튀면 되는거야."
"아, 그런가?"
"당연. 야 근데..."
"뭐."
"왜 허리가 조금밖에 안 아프지? 이혁재 거기가 보기보다 작냐?"
…븅신. 동해는 괴롭다는 듯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규현은 쯧쯧, 혀를 차곤 의자에 걸쳐져있던 제 백팩을 들었다. 야, 나 수업있어. 간다. 미동도 없이 손만 흔들어보이는 동해를 뒤로 한채 규현은 강의실을 나왔다.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와 1층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눈에 보인건 다름아닌 혁재였다. 개미친. 규현은 그대로 휴대폰을 꺼내 동해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야, 지금 1층에 이혁재 있음. 도망가라.
"이동해 어디 있는지 알아?"
"걔 오늘 공강이라 학교에 없을 걸."
"혹시 연락 돼?"
"안 해봤는데.. 무슨일 있어?"
"어, 아무것도 아냐. 고맙다."
고맙다며 저를 등지고 건물을 빠져나가는 혁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 사이의 일이 어떻게 해결되건 간에 오늘 동해를 구제해 준 값은 제대로 받아내야겠다 다짐했다.
/
규현에게 상담 아닌 상담을 받은 후로 동해는 혁재를 피해다니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했다. 강의 시간이 임박해서야 강의실에 들어간다던지,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는다던지, 강의가 끝난 직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다던지 하는 (아주 유치한) 일들이였다. 간혹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때마다 혁재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곤했다. 그렇게 지낸지 어언 2주가 흘렀다.
갑작스런 휴강으로 다음 수업까지 두어시간의 여유가 생긴 동해는 학교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길이였다. 벚꽃이 예쁘게 피었다는 말이 생각 나 꽃 구경이나 할 겸, 원래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동해."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동해는 무의식 중에 고개를 돌렸고, 잔뜩 굳어진 표정을 짓고 있는 혁재가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린 동해가 울상이 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 진짜 개망했다.. 지난 2주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였다.
"아, 안녕? 오랜만이네, 그치.. 어, 나는 약속이 있어서.."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는 동해가 메고 있던 백팩의 끈을 잡아당겼고, 힘에서 밀린 동해는 결국 혁재가 이끄는대로 따라갈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사실 가까운 거리였지만 동해가 느끼기엔 그게 꼭 저승으로 가는 길 마냥 길게 느껴졌다.) 도착한 곳은 혁재의 자취방이였다. 도어락 잠금을 해제하고 동해를 집안으로 밀어넣은 혁재가 아무 표정없이 제 앞에 서 가슴팍에 엑스자를 그리고 있는 동해를 바라봤다. 이, 이새끼가 지금 뭐 하려고..!
"너, 왜 나 피해다녔어."
"내..내가 언제 너를 피해다녀!!"
"전화는 안 받아, 메세지는 다 읽고 씹어, 강의 끝나고 말 걸려고 하면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이게 다 나 피해다닌게 아니라고?"
따박따박 캐묻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냥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한채로 땅만 바라보고 있는데, 혁재가 귓가에 딱 박히는 말을 꺼냈다.
"우리 그 날 안 잤어."
"...뭐?"
"안 잤다고."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말하는데, 동해가 할수 있는 거라곤 입만 떡 벌린채 얘기를 듣는 것 뿐이였다. 혁재의 말에 따르면, 그날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른채 키스를 하고, 애무까지 한건 사실이였지만 콘돔을 찾으러 간 새에 동해가 잠들어버려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 저도 옆에서 잠들었다는 것이였다. 동해는 그동안 저 혼자 오해하고 오버했던 일들이 떠올라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야 그걸 이제 말해주면 어떡해!! 내가 너 피해다닌다고 얼마나.."
"나 피해다닌거 아니라며."
"...아씨."
제 입으로 인정한 꼴이 되자 새빨개진 얼굴은 꼭 터질것 마냥 더 붉어졌다. 동해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메고 있던 백팩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존나 억울하니까 이번엔 진짜로 해. 맨정신으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사람은 서로를 안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정말로 사고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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