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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강의실] 방백_파문

방백 

  보통, 비가 오고 안개 낀 날은 식사도 나가서 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이런 날씨에는 그냥 조교실에 틀어박혀 아이스초코에 컴퓨터나 두드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하루 일과가 아닌가. 실제로 몇 없는 한가한 날에는 그런 빈둥거림을 제일 사랑했다. 그렇다면 오늘같이 폭우가 쏟아지는 날, 왜 연관도 없는 먼 강의동에 앉아있냐는 질문에 나는 입술만 잘근 씹게 되는 것이다. 푹 눌러쓴 모자를 벗어서 머리를 헝클어버리고 그대로 던지듯 책상에 올려놓았다. 밖을 서성이다가 들어온 강의실은 한적했다. 근처 강의실에 수업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신 없이 소리를 질러도 될 정도였으면 완벽했겠지. 손 틈 너머로 내려다 본 밖은 물줄기가 기울기 따라 흐르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허접한 드라마도 이렇게는 안 퍼 붓겠네 싶다가 또 종영한 지 한참이 지난 드라마가 생각났고, 자연스레 그 옆에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권태기의 냉전을 참지 못 한 이동해는 서운하다 힘들다를 나열하다가 극적인 장면처럼 화를 냈다. 내게서 원하는 대답이 없었거나 애초에 어떤 위안도 소용 없었을 것이다. 이동해 내면에 잠재하는 무언의 긴장이 팽팽해지다가 결국 제 풀에 스스로 끊겨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 가다간 뚜렷이 이어질 살벌한 분위기에 천천히 대화하려 했다. 한 번 퓨즈가 나가면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 조차 모르기에 그런 이동해를 컨트롤하려 나름 애를 썼더랬다. 그러나 한 번 꼬리를 문 파편들은 도통 모일 줄 몰랐고, 헤어지자며 이별을 내던졌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다시 되물어도 같은 말만 반복했다. 항상 자신만 서운해하고 감정 소모하는 일에지친다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자신만 신경 쓰는 것 같아 힘들다며 조용히 울었다. 한참 말없이 앉아있다가 그럼, 그러자 답했던 것 같다. 긴 연애가 허무했지만 이별 통보에 세상이 무너질 것 같진 않았다. 연애의 끝에 이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단지, 우리 사이에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해본 적 없어 상황이 어색 할 뿐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이동해가 생각났다. 나는 별다른 동요 없이 '들어가라' 멀쩡히 인사까지 건내고 심지어 평소보다 이상하리만치 일찍 잠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바싹 마른 새 이불을 덮은 완벽한 마무리였다. 제출된 레포트를 미리 채점하려던 것도 잊고 등이 닿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저절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단순한 무거움이 아니었다. 지독한 두통과 함께 몰려온 상실감은 서른 넘은 인생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각이었다. 피곤이 쌓였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상 현실 도피를 위한 방어기제라는 말이 떠올랐다. 헛웃음이 나왔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버티고 버티다 끓던 속이 터졌다. 아 미친 거 아니야? 나는 그제야 이동해의 이별 통보 현장을 곱씹었다. 조교실로 출근하는 내내 정신나간 사람처럼 핸드폰을 두드렸으나 단번에 받을 리 없었고 기대 하지도 않았다. 비명처럼 조바심이 났다. 생판 남이 될 상황을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그 계산이 주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꼬박 7번을 받지 않던 전화는 딱 8번째가 되어서야 멈출 수 있었다.

"잠깐 나와 할 말 있어"

[돌았어?]

"나와"

[진짜 미쳤나 이거. 나 바로 수업이야 끊어]

"출석만 찍고 나와라"

[아 왜 이래]

"일단 좀 나와"

[아니 출석이 문제가, 지금]

"그냥 얘기 좀 하자"

수화기 너머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미친 새끼라는 짧은 욕설과 함께 통화가 끊겼고 그 뒤로 여기까지 온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텅 빈 강의실에 홀로 앉았다.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지만 언제건 이동해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완벽하게 모질지 못 할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무시를 해. 이동해는 그 말을 인간관계에 단 한순간도 적용시켜 본 적이 없다.

 *

 한 시간 가까이 지나자 맞은편 의자가 거친 소리를 내며 밀려나갔다. 너무나 멀쩡한 얼굴로 나타나선, 동요 없이 빤히 응시하던 이동해는 바닥이 보이는 컵과 나를 번갈아 보고 표정을 바꾸었다. 내가 수업 중이라고 말했지. 오만상을 쓰는 얼굴을 향해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짜증나"

 내리깐 시선을 따라가니 신발과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다. 푹 젖어 본래 색보다 한 층 더 진해진 바지를 내려다보며 이동해는 정체불명의 사투리들을 연신 늘어놓았다. 한 손에는 커피잔을, 다른 손엔 노트북과 전공 서적에 핸드폰, 프린트까지 쥐고 바지를 내려다 보는 행동이 영 불안해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동해는 익숙하게 제 것을 건냈다. 모든 행동이 아무렇지 않게 흘렀고, 나는 손에 들린 무게를 실감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허리를 굽히고 아예 옷 매무새에 열중한 이동해에게 당장 할 말이 없어 가만 그 행동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어제와 방금 통화랑은 다른 사람처럼 도통 이 자리의 목적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체 어떻게 걸으면 운동화 신은 바지 위로 물이 튀냐 멍청아"

"밖에 몰라? 어디로 온 거야?"

"아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

"아 튈 수도 있지"

 그래, 촉촉하고 좋겠네. 커피를 반쯤 덜어 벌컥 들이킨 뒤에도 따라오는 말꼬리가 없었다. 이동해는 생각보다 긴 시간을 신발과 바지에 투자했다. 뭐해. 신발끈 묶잖아. 어디까지 젖었냐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행동들이 말하는 뉘앙스가 무엇인지 포착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짜증나 한마디에 담긴 느슨한 이동해의 말투부터 알기 쉬운 수준이었다. 손은 발목 언저리에서 진작 떠나 있었다. 대신 무릎에 얹어진 두 손 위로 작은 얼굴이 푹 파묻혀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래 봤자 너나 나나 늘 비슷한 생각이다.

"중간에 나왔어?"

""

"진우한테 내용 받아둘게"

"안 받아두면 형 죽여버릴 거야"

"네에"

 이동해는 놓친 강의에 관심 없다는 것을 안다. 단지, 작위적인 어색함을 무릅쓰고 분위기를 둘린 섬세함을 자각했다는 일종의 내 신호였다. 한참 수업 중인 시간대는 확실히 조용했다. 폭우가 멎은 창문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창가에 고여있는 물방울이, 팔에 얼굴을 부비는 이동해가 천천히 두 눈에 들어왔다. 비가 오는 것을 좋아하는 이동해는 그 연장선의 풍경도 사랑했다. 속으로 웃었다. 머릿속 가득 두 눈에 담았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 까닭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너는 비처럼 처연하고, 비 갠 뒤 맑은 구름처럼 투명하고 싱그러우니까. 심심해 나가자. 나 영화 볼래 형 퇴근 맞춰서 같이 예매할게. 아 저녁 거기서 먹자, 무조건 그 식당 가야 해. 언제 나와, 빨리와.

 가만 생각해보면 정신 없이 급한 행동을 따라가기에 벅찰 법 한데 다행히 나 자신은 생각보다 이동해의 호흡에 잘 맞춰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이동해만의 흐름에 맞추다 보면 느끼지 못 한 것들이 사랑스러워지고 놓친 것은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이 된다. 그래서 이 비어있는 강의실에서 사색에 잠겨 결론 낸 것은, 이동해 역시 본인의 이별통보 방식을 후회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급한 성정을 이기지 못하고 쏟아지는 감정의 홍수를 홧김에 뱉어버렸을 것이고, 내내 후회에 쌓여 돌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그 방식이 어색해 네가 아닌 것 같아 자꾸만 급해졌는지 모르겠다고. 사실은 여기서 바짓단을 어색하게 탓 할 때부터 짐작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먼저 꺼내지 않았다면 홀로 끙끙 거렸을 것이 분명했겠지

 나는 네 생각보다 네 호흡에 잘 맞춰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 했을 뿐. 이동해의 눈물 버튼을 누른 이유라면, 요 근래 예민해진 내 탓이다. 평소 꼬박꼬박 받아주던 장난도, 내 기분을 풀어주려 귀찮게 이유를 물었던 행동도 피곤하단 이유로 거절했기에. 계획한 일정에 맞춰 일을 끝내야 하는데 그럴 때 이동해는 본인의 불안함을 알아달라 내 시간으로 파고들었다. 그걸 내쳤던 것이 아닐까 새삼 후회가 들었다

 우리는 정말 나비효과 처럼 네가 변하니까 나도 조바심이 났던 거고. 적어도 나는 우리가. 적어도 아직은, 서로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다. 그래서 말을 고르고 다듬었을 너의 어색한 사과에 맞장구 쳐줬을 뿐이다. 그걸로 우린 된 거야. 너는 어때? 바라보는 눈동자를 향해 소리 없이 물었다. 빈 강의실에서 색색 숨소리만 내는 이동해가 멎기를 기다렸다. 깊은 숨과 함께 올랐던 어깨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나 신입생 때 형이 강의실에 잠깐 남으라고 했잖아, 그거 꼬시려던 거 다 알았어"

"알고있으면서 시치미 뗐어?"

"민망하잖아, 그 때도 엄청 조용했단 말이야"

"아아 지금도 민망하셔서?"

 이동해는 욕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새 울었던 눈가의 흔적은 쉽게 지워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너 눈, 부어있다. 훅 다가온 뺨에서 손끝으로 전해진 열기가 반가웠다. 내가 좋아하는 향수 뿌렸네그 말에 진짜 능글맞은 복학생 같다며 눈썹을 찌푸린다. , , . 딱 맞춰 다가온 입술과 기분 좋은 숨이 닿았다 떨어진다. 아 조교가 매번 이렇게 빈 강의실에 나와있으면 어떡하나 정말 누구 때문에. 니가 나오라고 했잖아, 몰라 나 갈래. 짐을 챙겨 일어난 얼굴이 붉다. 급한 몸짓으로 문 밖으로 향하는 걸음도 제멋대로다. 나는 그저 그 옆에서 맞춰 걸으면 된다. 이동해는 강의실까지 가는 길과 골목 내내 나무에, 바닥에, 고인 빗물에 시선을 둔다. 비어있던 강의실 사이로 들어온 햇살 같이 조용하고, 파랗고, 따뜻한 눈이다. 그래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낸 소감은 어때?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이동해가 말했다. 미묘한 민망함이 목소리에서 흘러나왔다. 눈치를 보고 있었다. 꾹 멈춰선 채 한걸음 앞에 서게 돼버린 나를 볼 생각도 않고, 발아래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다. 곧장 몸을 돌려 쪼그려 앉았다. , 빠끔 내민 입모양에 미안함을 담아 답했다.

"내가 잘못했어.."

 완연하게 나온 햇빛이 곳곳에 스며든다. 고요히 웃는 입술과 눈만 봐도 머릿속이  찰랑이는데 어떻게 내가 너랑 헤어지겠어, 그치. 기울어지는 고개를 따라 이동해의 시선도 따라오다 살갑게 끄덕인다. 그러니까 나도 더 노력해야지. 언제나 너를 사랑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지

너는 다시 태어나도 사랑 받을, 사랑스러운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