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나비 그리고 칼
월간은해 2019.05 [tattoo & trigger]
w. 파문
01. 초석
죄송한데 언제를 말하라는 거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자세히 몰라요. 저를 고용한 사람들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진짜 제일 가벼운 사람이고, 저 같은 애들은 그냥 일만 넘겨받거든요. 말 그대로 진짜 아무것도 아닌 놈이죠. 게다가 전 그 사건 터지고 나서 이 바닥을 완전히 떴어요. 사실 급전이 필요해서 이 사람들 거래에 손을 얹었던 건데 완전 질려버려서 뛰쳐나왔죠.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이제 가물가물하네요.
제가 마주쳤을 때는 그 사람들이 막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라 평범한 갱단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시다시피 이 지역에서 그렇게 크게 판을 벌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두어 번 일만 받았는데 평범한 판이 아니란 걸 알겠더라구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모른 척 닥치고 일해야지. 나 같은 놈은 위험한 인간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아요. 돈 좀 벌어보자고 줄 잘못 섰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니까.
보여주신 남자는 어디 출신인지 몰라요. 아뇨, 그건 아니고 목소리만 듣고 대화를 한 적이 없어요. 게다가 그 조직 사람들은 보통화부터 광동어, 영어, 불어까지 써서 어디 출신인지 알 길이 없거든요. 거래 내역 확인 받을 때마다 잠깐 스쳐 지나갔어요. 예쁘장하기도 하고 잘 생기기도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처음 본 게 아마 초봄. 그 때 입고 있던 옷이 그 계절쯤이니까. 네 그 건물에서요. 키는 조금 작았고, 검은 진에 품이 큰 붉은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어요. 계단에서 내려오는데 그게 좀.. 어디서 뒹굴다 나온 느낌이라.. 제가 고개를 돌려서 자세히는 못 봤어요.
늘 비슷한 시간에 갔는데 대부분이 편한 복장이었던 거 같아요. 아 맞아 '또이츠(對子)'. 그를 또이츠라고 부르더라고요. 아마 그 조직끼리 부르는 호칭이겠죠.
또이츠가 내려오면 보고도 받고 도구 얼굴도 본인이 확인해요. 뭐요? 아 그냥 저희를 부르는 속칭이에요. 그냥 멀리서 힐끗 보는 정도지만 생판 처음 보는 도구면 직접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죠. 그러다 흔들리면 그 사람 손에 바로 잡히는 거에요. 한 번은 누가 머리채를 잡히고 끌려가고 있던데.. 아마 그런 식으로 걸린 놈일걸요. 얘기 들어보니까 그 날 죽었다고 하더라구요. 시체요? 글쎄요.
근데 이 사진 진짜 그 사람이에요? 네 맞아요 이 얼굴. 근데 이렇게 순진한 인상이 아닌데.. 이런 사진은 어디서 구했어요? 와 이렇게 웃는 거 보니까 진짜 다른 사람 같아 보이네. 왜요. 에이 거짓말하지마요. 그 사람이 웃을 때 얼마나 소름 끼치는데. 봐요 자, 이렇게 입술을 안으로 말아 쥐고 웃어요. 이렇게 웃을 때는 굉장히 만족스럽다는 거고, 입술을 살짝 벌려서 즐거워하면 그 땐 뭐 하나 갖고 놀 걸 찾았다는 뜻이죠. 둘 다 썩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아 잠깐 얘기가 샜네. 아까 말한 끌려가던 사람 말이에요. 그 때, 좀 마른 사람이 뒤를 따랐는데 그 사람이 또이츠랑 종종 같이 있었어요. 통역을 해주는 역할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랫사람도 아닌 거 같았는데. 네, 또이츠가 유일하게 그 사람 말을 들었거든요. 늘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자세히 못 봤지만 이 왼쪽에 있는 남자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02. 어린양
이 청년 알아요. 알다마다. 매 오는 때는 달랐는데 여기 오면 저 꼭대기 파란 지붕 집에서 몇 주는 살았지. 와서 늙은이들 일도 도와주고 찬거리도 해서 가져다 주고 얼마나 살가웠는지 몰라. 겨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인지 알어? 그 청년들이 겨울에 오면 연탄도 사다 다 날라주고 한 번은 김씨네 수도 다 얼어터진 걸 보고 새벽에 기사를 데려왔다니까 글쎄. 재주도 좋지. 엉? 아니 그럼 어디 나라 사람이겠어. 왜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나?
참한 청년이 말을 잘 안 하긴 했어. 곱게 자랐는지 예의도 아주 바르고. 오래 살면 사람 웃는 것만 봐도 딱 보인다니까. 저 밑에 길이 얼면 여기, 여기 팔을 꼬옥 붙들고 우리 장보러 가는 길까지 내려갔다가 지는 또 꼭대기까지 다시 올라가. 그치 그 집. 둘이 같이 살았어. 형제냐 물어도 둘 다 대답도 안 해주더만 할미 섭섭하게. 그래도 같이 웃는 게 아주 예뻐.
이름? 그 곱상한 청년은 모르겠고 요놈이 혁재 응 혁재랬지. 무뚝뚝해 보여도 나름 싹싹해. 다 큰 청년이 우리 손주 놈들 어릴 적 재롱부리던 거 마냥 귀엽고. 그나저나 뭔 일 있어? 왜 이 촌구석까지 와서 이놈을 찾으려 그래. 이 놈들 여기 안 온지 꽤 오래야.
03. 판도라
아 정말 이런 거 잘못 새어나갔다간 큰일나는데. 이렇게 계속 찾아오는 자네 성의를 봐서라도 얘기는 해주지. 사실 뭐 당신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진 않으니까.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는데 괜히 깊게 알려 들지마. 여태 그 문제 때문에 난리였는데 이제 좀 잠잠해졌으니까 들쑤시지 말라고. 생각해봐, 누구 죽어나가는 건 얘깃거리도 아닌 이 바닥에서 얼마나 뒈졌길래 이렇게 떠들썩하겠냐고.. 나 같으면 당장 여길.. 아 그래그래 물어보려던 게 뭐였지?
맞아. 확실해. 목덜미에 나비, 가슴팍에 칼, 눈 아래 이 타투까지. 누구? 당신 지금 미쳤어? 눈이 장식이 아니면 똑바로 봐. 이 남자가 어디 봉사나 다니는 그런 사람 같아? 내가 여기서 장사한지 30년이 넘었는데 이 사람 오고나서 얼마 안 가 깽판치던 놈들이 다 사라졌어. 사실 이런 곳은 자질구레한 놈들이 소란을 좀 떨어줘야 경찰 놈들이 명분 삼아 와준단 말이지. 온 김에 분리수거도 좀 해야 그 덕에 구역이 좀 잠잠해지고, 장사꾼들한텐 작은 소란이 그런 이득이 있어. 실이 있으면 득이 생긴단 말이야 화전농사처럼.
왜 사람이 자잘하게 몸이 아파야 그나마 정상적인 거 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게 더 무서운 병을 키우고 있는 거라고. 그 깽판치던 놈들이 죄다 사라진 게 이 사람 때문이야. 아니 사건사고가 없으니 편하긴 한데 숨도 쉬기 힘들었다니까 정말. 안개 속에서 뭐가 날아올 지 모른 채로 걸어 다니는 꼴이었지. 뭐? 하하 자네가 본 영화는 그랬나봐. 진짜 대가리인 놈들은 자질구레한 일에 피 보는 걸 굉장히 싫어해. 시간낭비라 생각한다고. 잔챙이들을 쳐봐야 뭐하겠어 윗대가리부터 치면 알아서 다 기어다닐텐데. 그래서 더 난리였던 거지. 뭐에 꼭지가 돌지 않고서야 그걸 다 죽일 이유가 없잖아.
.. 지옥이었다니까 완전.
그래서 도구 하나가 누굴 또이츠라고 했다고? 아닌데, 여기 오는 놈들은 나비 문신한 남자를 그렇게 불렀어. 조금 더 마르고 날카롭게 생긴 이 남자. 둘이 같이 오거나 혼자 왔지. 이 남자는 술을 전혀 못 해. 나비 문신한 남자- 그러니까 또이츠가 그의 것은 매번 논알콜로 주문했어.
그렇게 다른데도 둘이 아주 친해보였다니까. 저기 저 구석에 앉아서 속닥거리고 지들끼리 좋다고 웃고, 잔도 여러 번 엎었지 아마. 그 사람도 마냥 살벌한 줄 알았는데 둘이 같이 오니까 웃기도 하더라고.
그래, 사진 좀 다시 보여주겠어? 맞아 이 남자. 또이츠보다 오히려 옆에 이 사람이 더 위험한 사람이야. 내가 몇 년간 이 얘기를 꺼려했던 것도 이 사람 때문이거든. 처음엔 메리가 잘 생겼다고 들이댔다가 거절 당한 손님이었어. 가게 뒤에서 담뱃불이 없어서 찾던 걸 붙여준답시고 좀 스킨십을 했었는데 옆구리에 총을 댔다잖아. 덜덜 떨면서 들이댔다던데 아주 귀엽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자길 해하는 사람인 줄 알고 위협했던 거라고 다음 날 엄청 사과하고 갔거든. 문신한 남자가 밖에서 어찌나 웃던지. 메리가 아주 노발대발 했어. 그 얼굴에 플러팅도 못 하게 하면 솔직히 반칙이라며 아주 푹 빠졌었다니까. 너무 귀엽지 않냐고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미친 거지. 지 내장에 통풍구 만들어주려던 놈이 귀엽다니.
한 잔 더 해. 내가 서비스로 주는 거니까. 얘기가 좀 길어질 거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그 둘이 가게 드나든 지 2년쯤 지났나. 장사 접고 정산하려고 조명만 내렸는데 뭐가 유리문에 퍽 부딪히는 거야. 이 동네에선 그게 일상이야. 약쟁이나 취한 새끼들이 깽판 부리나 싶어서 처음엔 무시했단 말이지. 근데 갈수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확실한 거야. 결국 손전등을 가지고 나갔는데, 그 순진한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유리문을 엄청 두드리고 있더라고. 호러가 따로 없었지. 엄청 급해 보였어. 사람이 피범벅으로 문을 두드리는데 낸들 어쩌겠어? 알고 보니 그 나비 문신한 남자가 자기 때문에 총에 맞았는데 가게 창고 좀 빌릴 수 있겠냐는 거야. 환장하지. 우리가게 단골인 갱단 보스가 죽어가는데 내가 어떻게 그 말을 거절하겠냐고. 울며 겨자먹기로 들여오긴 했는데 상태 보니 정말 심각하더라니까. 몸을 아예 못 가누는 상태였어. 난 그런 쪽엔 손이 떨려서.. 해달라는 것만 해줬지. 아니 이봐, 내가 이렇게 생겼어도 나름 겁도 많고 섬세하다고.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데 응급키트만 가져다 줬는데 그 남자가 정신 잃은 사람 붙들고 알아서 척척 잘 하더라니까? 많이 해 본 솜씨던데.
근데 좀 이상했던 게 말투가. 그 남자 말투나 표정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어. 가게에서 술도 제대로 못 해서 엄청 부끄러워하던 사람이 짐승 같은 표정으로 광동어를 살벌하게 지껄이더라고. 욕이었겠지 아마. 아니야 정말 다른 사람 같았어. 나를 못 알아 보는 느낌이라 쌍둥이는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땐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했지.
나야말로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단 말이지. 정신차려보니 동이 트고 있더라고. 그제야 어디다 전화를 걸더니 몇 명이 와서 문신한 남자를 데려갔어. 그리고 뭐라고 자기들끼리 대화하더니 금방 가버리데. 인사도 없이.
너무 진이 빠져서 그 날 가게는 늦게 열었지. 그런데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가 창고 뒤에서 나를 찾는다는 거야. 알고 보니 그 쪽에서 사례금이라며 돈을 보내왔더군. 준다기야 받았지만 그 이후로 순진한 사람은 가게에 안 왔어. 또이츠- 그래, 그 문신한 남자는 가끔 왔는데 그 날 얘기라던지 몸 상태는 절대 묻지 않았지. 묘하게 그 날 이후로 동네가 잠잠해졌어. 내가 말한 깽판치던 놈들이 그 때부터 잠잠해지기 시작한 거야. 이 근방 지역은 다. 또이츠는 예민해져서 올 때도 있었고, 가게에서 술을 마시다가 급하게 나가는 횟수도 잦아졌지.
갱단 보스치고는 가게에서 소란은 절대 피우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애 하나를 완전 잡더라니까. 내가 한국어를 몰라서 알아 듣진 못했는데.. 아마 죽였을 거야. 그가 나가자마자 다른 놈이 그 놈을 끌고 뒤로 나갔거든. 이전 같았으면 요새 바쁘냐고 농담도 건낼 수 있었겠지만.. 별로 알고싶지도 묻고 싶지도 않았어. 그 날 밤 이후로는 또이츠 분위기도 더 날이 섰고, 그만큼 구역도 스산했으니까.
그 순진한 남자가, 진짜 이상했었던 게 분명한 거라니까. 그 돈의 의미를 내가 몰랐겠어?
04. 야누스 - 기록
네, 차트에 있네요.
동양계 남자. 그 당시에 20대 초반이라고 하셨죠? 그럼 이 아이가 유일해요. Charles Chalamet. 진단명은 'trouble dissociatif de l'identite'
아뇨, 행방불명 된 아이라 진단 이후로 내원한 기록이 없는 아이네요.
a. 작사(雀士)
또이츠(對子)? 당신 마작은 할 줄 알아? 세상에 완전 샌님이구먼. 자 간단히 말해서 머리 두 개를 말해. 이렇게 같은 패가 한 쌍인 상태. 이걸 물어보는 걸 보니 여기 처음인가? 혹시 그 놈들 찾는 거야? 그럼, 나 같은 뒷골목 선수는 딱 보면 알지.
맞아. 한 놈이 머리가 아니라 두 놈 다 머리라고. 그 쪽 지역에서도 모르는 놈들이 많아. '또이츠를 만나러 간다'고 얘기하면 자기가 아는 또이츠를 생각하는데 각자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경우도 많았지.
도구는 누굴 만났어? 하나? 안돼 한 마리 만으로는 절대 모를 거야.
b. 눈 먼 사람
미친놈이었어 완전히 눈깔이 돌았다니까? 꼭 누구랑 대화하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리더니 내 눈을 그었다고! 그 새끼들 싹 다 제정신 아니야. 그런 미친놈을 갱단 보스로 달고서 얼마나 가겠어? 내가 이 사단 날 줄 알았어. 그런 걸 싸고돌던 그 놈도 똑같이 제정신 아니지. 꼴 좋다 미친새끼들.
c. 여인
만나기 싫다는데 왜 자꾸 연락해요? 전 그 사람들에 대해 할 말 없어요. 그 놈들만 안 나타났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지 않았을 거라고. 근데 누가 죽었어요? 아뇨 아쉬워서요. 내 남편이 그 인간들 손에 죽었거든. 내가 똑같이 죽였어야 했는데.
누구요? 둘이요? 셋이라고 말하는 게 맞는 거 아니에요?
그 인간은 둘에게 사랑 받고 있잖아.
05. 늑대 - 기록
이 청년이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할아버지 밑에서 컸는데 10살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좀 안쓰러운 애였죠. 크고 나서는 해외로 일을 다닌다고 하던데 성공했는지 종종 와서 도와주고 그랬어요. 네, 파란 지붕.
a. 로스엔젤레스 베니스(Venice)의 바리스타
그 분은 제 카페 단골이었어요. 거의 매일 가게에 왔는데 피앙세랑 LA에 산다고 하더라구요. 둘 다 한국인인데 자기 피앙세는 불어도 유창해서 욕하는 걸 알아들으려고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했죠. 네, 유머 감각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고 다정했던 기억이 나요. 그 사람이 브런치를 먹고 있으면 피앙세는 점심이 지나서 왔어요. 둘 다 얼마나 예뻤는지 근무하면서 둘을 보는 재미로 오전을 보냈는데.. 싸워요? 음, 다투긴 해도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그냥 연인끼리 투닥거리는 느낌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하루는 그 남자가 혼자 찾아오더니 당분간 못 올 거 같다며 아쉽다고 하더라구요. 피앙세와 떠난다고.. 둘이 스위스로 신혼여행을 갈 거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스위스? 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느낌이.. 네. 아주 오지 않는 거냐 물었더니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저도 아쉬웠죠. 그 둘이 가게에 오는 날에는 근무 내내 아주 즐거웠거든요. 맞아요, 정말 딱 그런 말투로 둘이 싸웠어요. 저는 한국어를 모르니 알 수 없었지만 보고만 있어도 재밌고 귀여웠죠. 어디로 가냐니까 그냥 웃고 말았어요. 그 남자 눈빛이.. 약간 심난해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잡았어요. 다 잘 될 거라고. 그러더니 그제서야 웃더라구요. 당신 같은 사람만 세상에 가득했으면 좋겠다면서. 맞아요 정말 착하죠. 그 이후로는 정말 한 번도.. 혹시나 이 동네에 오진 않았을까 비슷한 사람이 보이면 앞질러 가 확인하기도 했는데 늘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제 얘기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냥 제 추억만 늘어놓은 것 같아서.
그 사람 저희 가게 쇼콜라 쇼(chocolat chaud)를 엄청 좋아했는데.. 아 잠시만요.
실례되지 않는다면 이것 좀 전해주시겠어요? 저희 가게가 쇼콜라를 따로 판매하게 되었거든요. 이게 원액이고, 늘 먹던 종류라고 전해주세요. 이건 그의 피앙세가 좋아하던 원두. 저희 가게 시그니처라서 다른 곳에서는 먹지 못 했을 거에요. 둘 다 LA에 못 오는 상황이라니까.. 좋아지면 좋겠네요. 그 두 사람이 정말 좋아할 거에요. 제 가게는 언제든 여기 있을 테니, 돌아오면 들려달라고 전해주세요.
뭘요, 제가 더 고마워요.
b. 오래된 도구
영악한 사람이에요. 제가 알기론 어릴 적부터 혼자 커서 눈치가 빠르고, 사람을 다룰 줄 알아요. 자기가 어떻게 하면 좋은 위치를 차지 할 수 있는지 계산도 빠르죠. 맞아요, 그게 가장 무서운 점이에요. 그가 들어섰을 때, 그에게 오래된 연인이 있다고 구역에 소문이 돌았어요. 그걸로 빌미로 누군가 협박한 모양인데 설마 그가 몰랐겠어요?
그는 모르는 척을 잘 해요. 반응을 해주면서 사람을 기쁘게 만들고, 다른 이야기까지 쏟아내게 만드는 재주가 있죠. 예를 들어 10명이 그에게 같은 이야기를 한다 치면 그는 그 10번을 전부 처음 들어본 것처럼 행동해요. 그리고 마치 소중한 정보를 들은 것 마냥 진심으로 고마워하죠.
그게 가장 위험한 짓인데 보통 인지를 못 하죠. 같은 이야기라도 다른 사람 10명이 한다면 상황이 달라져요. 관점도, 서사도, 뒷이야기도 모두 다르죠. 그걸 모으잖아요? 그럼 경우의 수가 끝도 없이 많아지고 그 중 비어있던 연결고리들이 맞춰진대요. 그런 쪽으로 아주 탁월해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마치 중요한 사람처럼 대우해주면서 가지고 노는. 사람을 정말 잘 다뤄요. 앉아서 들어주기만 하는데도 먹잇감들이 줄줄이 서로를 가리키니까 얼마나 웃겼겠어요. 네, 그런 사람인 줄 아무도 몰랐으니까 다른 이들은 그저 치기 어린 놈이 멋모르고 설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알았어요. 차라리 죽일 듯 패고 구덩이에 직접 던져지는 게 낫다는 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 척 하지만 정신차리고 보면 머리통을 굴에 들이미는 중이죠. 손해를 보면 그걸 투자라고 믿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아마 경험이 많았을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그 나이에 그런 심리를.. 어? 지금 울어요?
c. 슌쯔(順子)
당신, 표정이 말이 아니네. 내가 말했잖아 이제 기억 속 그 사람이 아닐 거라고. 그냥 인간들도 살면서 얼마나 많이 변하는 줄 알아? 물론 내가 다 알지는 못 하지만 본인이 아닌 이상 타인은 밖으로 보이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어. 그 둘은 특히 더. 그래도 다행인 게 거짓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야. 모든 사람이 본 게 본인들이니 전부 믿어도 좋아. 단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밖에 없는 게 그들 운명이지.
타투만 봐도 알잖아. 나비랑 칼이 각각 누굴 뜻하는 거 밖에 더 있겠어? 평생을 그렇게 살기로 작정한 인간이야. 우리? 우리는 그 사람을 은혁이라고 불러. 아니면 알다시피 그와 똑같이 또이츠라고 부르지.
은혁은 D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안 했어. 이 일을 하려면 또이츠가 필요하고 D는 사실.. 불필요하지. 이런 식으로 될 줄 몰랐지만.
06. 늑대, 나비, 칼
맞아 좀 복잡해. 조직에서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슌쯔 정도 되는 사람과 LA에서 같이 온 사람들 몇 명이었는데.. 새어나간거지. 그래? 거기서 결혼하려던 게 진짜였구만. 그 때도 은혁은 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심각하진 않았다고 하더라고. 글쎄.. 난 D와 얘기를 많이 나누진 않았어. 은혁이 혼자 일을 나가면 D를 보호하는 게 우리 일이지만 그가 트라우마 같은 게 있어서 거리를 좀 두거든. 어, 본인도 알고 있더라고. 그래서 종종 물어봐. 또이츠가 뭘 했는지, 은혁은 괜찮은지, 그가 다치진 않았는지 또 자기가 통제력을 잃으면 또이츠는 어디를 갈 예정인지. 그걸 최대한 자세히 말해주는 게 좋아. 얼버무리거나 모르겠다고 얘기하면 불안해하거든. 현실이 아닌 거 같다면서 은혁을 자꾸 데려오라고 하니까. 음.. 진료 기록도 찾았다며, 알잖아. 정말 그 나이부터 그랬다면 상대적으로 D가 온전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빌어먹게도 이젠 다 소용없지만..
괜찮아. 거의 다 정리 했어. 이 바닥은 돈만 채워주면 괜찮아지잖아?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다 잠잠해질 거야. 그치, 그의 트리거를 당긴 건 그 놈들이니 그렇게 무너진 것도 할 말 없을 걸. 아끼던 반 쪽을 그딴 식으로 잃었으면 눈이 돌아가는 것도 당연해.
아.. 이후엔 우리도 은혁을 못 봤어. 그는 우리가 단골이었던 술집에서 급하게 연락을 받고 나갔고, 나는 실수한 신입 하나를 따고 바로 따라갔는데도 만나질 못 했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체가 없으니 어디든 살아 있겠지. 크게 다치지만 않은 상태면 좋겠네. 글쎄.. 그 때는 D가 끌려갔다는 얘기만 듣고 바로 뛰쳐나가서 생사는 전혀 몰랐던 상태니까.
아 저기 미안한데, 그만하자고.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군.
그나저나 상자에 그건 뭐야? 오, 맞아! 진짜 좋아해. 거길 갔다 왔구나 대단한데 당신. 어어, D랑 종종 그 카페 얘기를 하면서 먹고 싶다고 했지. 우리가 다녀온다 해도 괜찮다고 거절했는데, 혹시 모르니 당신이 잘 가지고 있어. 아마 거기까지 보내기 미안해서 둘 다 거절했던 게 분명하니까. 그가 언젠가 돌아올 지 어떻게 알아? 하하 진짜 엄청 달아 보이네 이거. 혓바닥이 아리겠어. 이건 커피네. 아냐 아냐 또이츠도 좋아했어. 신기해, 한 몸에 그 둘이 입맛도 다르고 성격도 상극인데 커피랑 사람 취향 하나는 똑같았으니까.
가려고? 이런, 아쉽네. 여길 정리하면서 그 둘- 아니 셋의 흔적을 이렇게까지 찾아준 건 당신이 처음이거든. 그래 정말 고생 많았어. 당신한테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이 쪽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 같은데.. 찾던 형들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해서말야. 혹시 당신만 괜찮다면 종종 연락해줘. 내가 그에게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아서 꼭 도와주고 싶거든. 많이 괴로워하고 있을텐데 정말 찾고 싶어. 그래, 남은 사람이라도 찾아야하지 않겠어? 나는 조만간 조직을 다 정리하고 카페나 하나 차릴 생각이야. 그거 이용해서 그를 꿰어보자고. 하하 그래, 빨리 끝내고 연락할게. 당신도 몸 건강히 잘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아 잠깐만. 이건 그들 방에서 찾은 사진인데 당신이 가져가. 친한 동생이 찍어준 사진이라고 했는데.. 그래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나 참, 손을 이따위로 잡고 있어서 진짜 신혼 사진인 줄 알았지 뭐야. 이런 걸 찍어준 당신도 참 웃기네.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D의 이름말야 한국 이름. 은혁은 그가 가진 이름 중에서 그 이름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전혀 모르거든. 한국에 가면 누가 되어도 꼭 그 이름으로 부른다고.. 그렇지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지. 나는 잘 모르지만 뭔가 그 셋이 똑같이 공유하는 게 있는 것 같더라고. 미친 소리 같겠지만 옆에서 그들을 보면 알아. 그 눈에는 완벽한 그들의 세상이 분명 따로 있거든.
그러니까.. 안다면 알려 줄 수 있어? 이제는 상관없지만 그냥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 혹시 그를 만난다면 D나 또이츠가 아닌, 그 이름으로 같이 얘기하고 싶으니까.
하하 그래도 한국어 발음은 나쁘지 않으니 걱정 마. 그래 그러니까.. 맙소사 너무 아름다운 이름이잖아.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이름 중 가장 부드러운 이름이야. 한국 이름은 좀 낯선데 굉장히 잘 어울리는 느낌이야.
잠깐만 다시 한 번만. 어떻게 부른다고?
이 동해. 아, 동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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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uble dissociatif de l'identite: 해리성 정체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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