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여름, 떠오르는 그 날
w.은해나라
수학여행을 다녀 온 뒤 부터였나? 지금 이 순간을 추억하기 위해서는 그걸 떠올릴 수 있을만한 낭만이 있어야한다는 말을, 노래가사마냥 흥얼거리던 동해가 대뜸 내게 제안을 했다.
"혁아, 우리도 자전거타고 등교할까?"
"뭐? 싫어! 정류장에서 교문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든데, 집에서부터.... 으.. 암튼 난 싫어."
"왜에~ 운동도 되고! 추억도 쌓이고! 1석 2조! 응?"
언제나 그렇듯 결국에는 동해의 뜻대로 행하겠지만, 혁재는 매번 한 번에 오케이하는 법이 없었다. 한가지에 빠지면 그것에만 몰두해 저를 잊어버리는 동해가 얄미웠던 탓도 있었지만, 거절할 때 마다 지금처럼 제 목에 팔을 두르고 엉겨붙는다거나, 말을 들어줄 때 까지 옆구리를 찌르는 행동을 나름 즐겼다.
"그럼 니가 맨날 나 태워주던가-"
"그럴까?"
"어? 야, 됐어. 남자끼리 무슨.."
"난 괜찮은데. 아무튼 같이 자전거 등교하는거다? 일본에서 본 애들처럼! 얼마나 멋있어!"
수학여행에서 본 일본 학생들의 모습이 꽤나 낭만적이었는지, 유명하다는 일본드라마까지 챙겨 본 동해는 아름답게 미화되어있는 배경에 매료되어있었다. 그후로 자전거에 꽂혀버렸는지 한 번 쯤은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하지 않겠냐며 입이 닳도록 말하고 다녔다. 솔직히 귀찮기도하고,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터라 딱히 하고싶지는 않았지만, 동해의 말대로 추억거리는 많을수록 좋다는거에는 동감한다. 우스갯소리로 툭 던진 농담에 곧바로 수긍하지만 않았더라면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을텐데. 한 손으로 얼굴을 밀며 떨어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혁재의 모션에도 동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혁재의 손을 부여잡으며 눈을 반짝였다. 반드시 함께 등하교를 하고말거라는 의지가 눈에 한가득 담겨있었다.
"아, 알았어! 그만 좀 봐, 멍청아!"
"진짜지? 약속했어! 내일부터야! 내일보자!"
점점 더 가까워지는 얼굴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고개를 돌리는 혁재의 뒷목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고생끝에 낙이온다고, 끊임없이 들이밀었던 자신의 계획이 받아드려진것에 대해 기쁨을 만끽하던 동해는 혁재의 등을 팡, 하고 내리치며 웃었다.
혁재는 버스정류장부터 교문까지, 아니, 집에서 학교까지 오르막길이 몇 번이나 있는지 떠올려보더니 땅이 꺼져라 숨을 뱉었다. 멸치나 젓가락이라고 놀림받는 저에게 가파른 그 길들이 과연 괜찮을까 싶었지만, 아무렴 어때. 동해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네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뭐가됐든 좋지않을까 싶다.
"야, 동해. 자전거는?"
다음날. 동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려오다 혁재의 부름에 머쓱하게 웃어보어보였다. 노래를 부르던 자전거는 어디로가고, 왜 빈손으로 나왔는지. 아니, 애초에 자전거도 없이 졸라댔던건지. 약속을 지키기위해 어젯밤 누나와 대판 싸우던 일이 생각났다. 아씨, 난 죽었다. 용돈으로 모아 겨우 산 새 자전거를, 목숨걸고 훔쳐왔는데, 자전거가 없어?
"미안! 어제 사려고했는데... 엄마가 다음달에 사주신대..."
"아니 그럼 미리 말을하던가..! 이미 끌고나왔는데..."
"헤헤, 태워달라며~ 일부러 말 안했지. 너 편하게 태워주려고!"
동해의 말에 열받았지만, 애교섞인 모션에 또 다시 금방 마음이 풀려버렸다. 애초에, 제가 농담삼아 한 말을 기억하고있다가 해주려고 마음먹었다는 생각에서부터 이미 져버렸다. 그런 멘트는 대체 어디서 배워오는거람.
"아니, 야! 이동해!"
"꽉 잡아!"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물쩍 넘어갈 뻔했다. 생색을 본인 자전거도 아닌 저가 갖고나온 자전거로 내고있다는 게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하려는데, 손목을 잡아 이끄는 힘에 말문이 막혔다. 저보다 작은 손으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동해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앉은 뒷 자리는 퍽 불편했다. 쇳덩어리로 되어있는것이 푹신할리 없었지만, 그럼에도 군소리없이 얌전히 앉은 이유는, 생각보다 넓은 등판과 교복 천 위로 느껴지는 단단한 복근때문이었다.
".. 섹시한데...."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던 게 무심결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시끄러운 매미소리와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소음덕분에 낮게 중얼거린 말이 들릴리없었지만, 혁재는 부끄러운지 머리를 숙여 동해의 등에 머리를 묻었다. 나가 죽어라 이혁재.
-
"우울해...."
"으이그, 그러게 혼날거 뻔히 알면서. 학교 언덕이 좀 높냐! 내리막길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걸 냅다 타고가! 사고나면 어쩌려고.."
"그치만...!"
"아~~ 이동핵! 나 누나한테 뭐라고 말하냐고오!"
결론만 말하자면, 하교길 가파른 내리막길을 아무생각없이 그대로 내려가려는 동해 덕에 자전거를 빼앗겼다. 그것도 한달이나. 방학식 날 주겠다는 학주의 말에 욕을 한사발 부어내는 누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불쌍하게 절 바라보는 동해의 시선을 무시한채 변명거리만 생각하던 혁재는, 풀죽어있는 동해가 신경쓰였는지 한숨을 내쉬며 한 가지를 제안했다.
"다음달에 자전거 사는거 맞아?"
"응.."
"방학식 날 돌려주신다니까, 자전거 받으면 여행이나 갈까?"
"어! 좋아! 너무 좋아!
여행 또한 동해가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였다. 여유로운 삶,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움, 여러가지를 느끼고 얻을 수 있다는 장점들로 가득한 여행. 저가 좋아하는 것들로 제안을 내세우는데, 거절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동해는 방학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혁재 또한 달력에 날짜를 표시해가며 그 날을 기다렸다. 동해와는 같은 동네라 지겹도록 봐왔지만, 둘이서만 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라 긴장도되고, 설레기도 했다. 이 모든게 누나의 허락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테지. 자전거를 학교측에 빼앗긴걸로도 모자라 일주일동안 빌려달라는 부탁에 누나는, 다치지말고 다녀와. 라며 쿨하게 허락해줬다. 절대로 허락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따지고보면 이게 다 이동해 덕이겠지. 그러고보면 유난히 동해에게 약한 누나였다. 용서를 구하기위해 함께 집을 방문했던 그 날, 상냥하게 웃으며 용서를 해주는 누나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말만한다면 언제든지 사용하라는 말도 덧붙였는데. 낯선 모습에 소름이 돋았더랬지. 너무 쉬운 허락에 하루종일 누나를 따라다니며 뭐 잘못먹었냐고 장난치다 하이킥도 수차례 얻어맞았지만, 짜증보다는 오히려 웃음이 나던 그런 하루였다.
-
"혁재야! 여기 봐! 너무 예쁘다.."
새로운 곳을 가고싶다는 말에 한적한 시골동네를 찾아달렸다. 그와중에 눈에 띈 작은 호수. 청량한 푸른색이 햇살에 의해 반짝였다. 신이난 채 뛰어가는 동해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두면 좋을거라 생각했다. 분명 지금 제 모습을 본다면, 그토록 바라던 청춘의 낭만이라 말하지 않을까? 흐뭇하게 동해를 바라보는 혁재는 소위 연인을 바라보는 듯한 분위기를 띄고있었다.
난간을 잡고 올라선 동해를 따라 혁재 또한 옆 난간에 팔을 올리고 풍경을 눈에 담았다. 무더운 여름었지만 우거진 나무들로 둘러쌓인 장소여서 그런지 참 서늘했다. 선선한 바람과 잔잔한 물결소리, 매미와 오리들의 울음소리가 여름을 알렸다.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을 느꼈다. 동해의 말대로, 잊을 수 없는 그런 하루가, 그런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이혁재"
동해가 저를 부르기 전 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다고. 하지만 그의 부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과 동시에 불안함이 엄습했다. 이름 석자로 불리는 날은 많지 않았다. 혁재야, 혁아, 멍청아 등으로 부르는 게 다반사였는데. 지금처럼 이름 석자를 부르며 찾을때는 어김없이 좋지않은 소식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두던 동해였다.
"하하, 야. 배고프다! 빨리 가자"
두려운 마음에 시선을 회피하며 몸을 돌렸다. 세워둔 자전거 핸들을 잡고 받침대를 거두는 혁재의 행동에도 거들떠보지 않던 동해가 저의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 너 좋아하는거 같아"
"뭐?"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동해를 바라봤다. 난간에 기대고있던 동해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고, 베실 웃었다. 좋아해, 혁아.
놀리는건가? 장난치는건가? 혼란스러웠다. 이런걸로 농담하는 애는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낌새도 없었는데 갑작스런 고백이라니. 긴장한 탓에 바짝 마른 입술, 일어난 각질을 잘근 씹어대는 혁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동해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술 뜯지 말라니까? 그 버릇 좀 고쳐!"
동해는 등에 메고있던 배낭을 앞으로 옮겨 메고, 가방 속을 뒤적거리며 다가왔다. 물건을 아무곳에나 던져두는 동해답게 찾던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뒤적거리던 동해가 방긋 웃으며 작은 립밤을 꺼내보였다. 배낭 속 작은 공간에 들어있던 복숭아 향 립밤. 혁재는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이랍시고 제게 선물했던 그 립밤이 어째서 동해의 가방에 있는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걸 따져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퐁, 하고 뚜껑을 열자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 혁재는 저의 턱을 가볍게 잡아 올리며 엉성하지만 정성스럽게 바르는 동해의 모습이 꽤나 진지해서, 방금 전 그 고백이 진심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잘 간직할게-"
연속적으로 들어오는 동해의 알 수 없는 태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함께한 세월동안 동해의 말에, 행동에 수 없이 설레었지만 기대한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난 후, 갖은 의미를 부여하는 혁재였다. 제 입술을 훑고 지나간 립밤을 가져가는 의미가, 잘 간직하겠다는 말이, 마치 간접키스를 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밥먹으러가자며 출발하는 동해의 뒤를 따라 페달을 밟았다. 동해의 손길이 닿은 부분이 화끈거렸다. 촉촉하고 달콤해진 입술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었다. 지금 이 상태라면 몇년동안 고치지 못했던 습관을, 단 며칠만에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몽글몽글한 기분에 몸이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참, 우리집 곧 이사해"
"뭐라고?"
"이사한다고! 늦어도 올해 안으로는 갈거야!"
핑크빛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동해를 따라 맞춰가던 속도가 점차 늦춰지더니 이윽고 자리에 멈춰선 혁재가 멍하니 동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지만 그저 혼란스러울 뿐 이었다. 고백하던 그가 이제는 떠난다고 말하는게, 이건 대체 무슨 경우인건지. 알 수 없는것들 투성이었다.
"괜찮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바닥만 주시하는 혁재의 어깨에 동해가 손을 올렸다.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말이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 났다고할까. 무언가에 턱, 하고 막힌듯 갑갑했다. 동시에 저릿하게 아려오는 통증이 혁재의 미간을 구겼다.
"야, 이동해"
"응?"
"이거 내거야."
혁재는 거칠게 동해의 주머니에서 립밤을 뺏어내 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에이, 왜그래. 동해는 잠시 당황했지만 귀엽게 웃으며 혁재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동해의 뜬금없는 말과 행동들, 엉뚱하고 귀여워서 언제까지고 맞춰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웃으며 넘어가기엔, 마음이 너무 쓰라렸다. 저의 기분을 풀어주기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동해의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목이 메였다. 그저 옆에 있으며 함께하는 걸 바랐는데, 많은 욕심을 낸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된걸까. 눈물을 참기위해 이를 악 물고, 떨리는 손으로 동해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 않았으면 했다. 지금처럼 웃고 떠들고, 졸업도하고 대학도 군대도.. 할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쭉 곁에서, 너와 함께 모든걸 하고싶었다.
"가지마"
동해는 눈물을 참기위해 억누른 혁재의 숨소리가 낯설었다. 눈치력이 없던터라 0해라고도 불리던 동해가 혁재의 심정을 눈치채기에는 다소 무리였지만 오랜 친구로서, 평소 화났을때 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혁재의 굳게 잠긴 목소리에서 떨림을 느껴졌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동해는 입술이 촉촉해짐을 느꼈다. 부드럽고 말랑한 촉감, 달콤한 복숭아 향이 동해의 입술에 새겨졌다. 따뜻했던 촉감이 서서히 옅어지면서 슬며시 눈을 뜨는 혁재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옷깃을 잡고 입을 맞추던 혁재의 행동에 다소 놀란 동해였다.
"나도 너 좋아해. 가지마.. 졸업..! 같이하기로 했잖아.. 아니, 그, 가면 적응하,기도 어렵고! 어, 어..."
멍하게 입술을 매만지던 동해는, 혁재의 답으로 인해 얼굴이 붉어졌다. 입맞춤의 의미를 그제야 알았는지, 동해는 풀썩 주저앉으며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티가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혁재도 마찬가지였다. 홧김에 저지른 행동과 말에, 말도 더듬거리면서 횡설수설, 딸꾹질까지 해대며 화제를 돌리는데,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무슨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크흠, 하하.. 이마를 긁적이며 애꿎은 자전거만 만지작 거리는 혁재와 손가락만 꼼지락 대던 동해는 서로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할지 눈치만 보고있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동해의 앞 머리가 살랑거렸다. 눈을 찔러대는 앞 머리를 뒤로 젖히다 마주한 혁재의 시선에 동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혁아, 걱정하지마 나 이사 안가.."
"아.. 그랬..어? 아니.. 잠깐만, 아깐 간다며!"
"가긴 가는데.. 근데 난 안가...!"
한국말을 끝까지 들어야한다는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어쩐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뱉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였다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싶었다.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맞아, 나도. 나도 그 뜻이었어! 황급히 자전거에 몸을 실어 무작정 페달에 발을 올리는 혁재를, 동해가 막아섰다. 자전거 핸들을 잡고, 눈을 맞추며 다가오는데,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숨을 참았다.
"혁아, 좋아해. 너는?"
그 물음에 달싹거리던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떻게 말을하면 좋을까, 너에게 대한 내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
혁아, 응? 혁재야아, 동해의 반복되는 물음에 혁재는 눈을 질끈 감고 동해의 이마에 콩, 하고 저의 머리를 맞대며 입을 열었다.
"...사랑해. 좋아하는 표현보다, 사랑한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아. 사랑해, 이동해."
-
찌르르 울려대는 귀뚜라미 소리와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평상에 누워 올려다 본 밤 하늘은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
"동해야."
"응, 혁아"
"하나만 물어봐도 돼?"
혁재의 물음에 동해는 몸을 돌려 턱을 괴었다. 혁재를 지그시 바라보던 동해가 이내 활짝 웃으며, 새삼스레 뭐가 그리 궁금하냐고, 저에대해 궁금한 것이라면 뭐든 답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부모님과 떨어져지내도.. 괜찮아? 외롭지않아?"
외로움을 많이 타던 동해를, 그 누구보다 잘 알던 혁재였다. 더불어, 부모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던 동해였기에 홀로 남는다는 결정이 의문스러웠다.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동해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이혁재가 여기 있잖아! 생각해봤는데, 네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지루하더라고. 너랑 헤어져야한다고 생각하니까 바보같이 눈물도 나더라. 이상하겠지만.. 그래서 알았어. 내가, 너를, 좋아하고있구나."
동해의 대답에 벌떡 일어나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뒷 머리를 헝클었다. 으아아, 부끄럽고 민망해서,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느라 고개를 푹 숙였다. 장난어린 말투로 시작해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진심을 다해 전하는 고백. 없던 마음도 생길것만 같았다. 수줍으면서도 확실에 찬 눈빛에, 또 한 번 심장이 요동친다.
너는 알까. 내가 달달한 음료를, 간식을 좋아하던 이유가, 너의 그 달콤함 때문이란 걸.
"그리고 나 혼자사는 거 아냐-"
"어? 으앗,"
그럼 누구랑 살아? 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저의 목에 팔을 두르곤 와락, 껴안는 동해였다. 이런것도 백허그라면 백허그가 될 수 있을까. 평소와 다름없는 스킨쉽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심장이 미쳤나보다.
목을 감싸안고 어깨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던 동해가 말을 이었다. 동해의 숨결이, 목소리의 진동이, 어깨를 타고 전해졌다.
"외로움을 많이 타던 동해는 혁재네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해피엔딩! 동화 속 이야기처럼 마무리하던 동해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곤 베실 웃어보였다. 상황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던 혁재가 눈을 꿈뻑거리며 가만히있자,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어?"
축 처진 동해의 모습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는 혁재였다. 그러니까, 우리집에서? 혁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까지 얹혀 살게되었다는 말에 혁재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일인거지.
"동해야. 이거, 꿈이야? 꿈아니지? 아니라고해주라."
"멍청아! 꿈이겠어?"
단 둘이 사는 건 아니지만, 어쨋든 동해와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눈을 뜨고 감을 때 까지 함께 할 수 있다니. 기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건 동해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비밀로 해달라는 혁재 부모님의 부탁을 지키고 싶었지만, 혁재의 반응이 궁금해 입이 근질거렸다. 싫어할까? 귀찮아할까? 좋아해주면 좋겠다. 여러가지 상상을 해봤지만, 오늘과 같은 반응은 없었는데.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좋은 반응이라 생각했다.
"근데 예상 외야. 천하의 이혁재가 날 좋아한다니! 언제부터 좋아했어? 어디가 좋았는데?"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양 손을 모으고 대답을 기다리는 동해의 모습이,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같아 사랑스러웠다. 어느하나를 콕 집어 말해주길 바라는듯,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 행동 하나하나에서 묻어나오는 애교가 혁재를 웃게만들었다.
"몰라 바보야-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동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머리칼을 부비적 대는것에 그치지 않았다. 동해 역시 저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서 였을까. 혁재는 동해의 양 볼을 귀엽다는 듯이 꼬집고는 입술에 촉, 하고 입을 맞췄다.
"뭐, 뭐야!"
"하하, 립밤을 너무 많이 발라서~"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던 동해는 립밤을 흔들어보이는 혁재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루종일 긴장하고 얼타던 모습은 어디가고, 예전처럼 장난끼넘치는 모습에 덩달아 긴장감이 풀렸다.
"야! 그거 내거야!"
"뭐래, 니가 전에 선물로 준거잖아-"
"니께 내거고 내껀 내꺼지!"
"입술에 바를거면 요고 빌려줄게!"
동해의 일방적인 말에도 그저 귀엽다는 듯 웃던 혁재가 우, 하고 내민 입술을 톡톡 치며 능청스레 말했다. 저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하는 동해를 보니, 괜스레 더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흐으, 이혁재 완전 미쳤어.."
"그치, 이동해한테 완전 미쳤지"
"아, 완전 말렸어. 진짜!"
오글거린다며 하지말라고 저의 가슴을 퍽퍽 내리치는 동해였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웃음의 의미는 분명 저와 같은 이유일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동해야. 저기 봐봐-"
혁재의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가만히 있어도 아름다운 장소에, 반딧불이가 하나, 둘, 생각보다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혁재와 동해를 둘러싸고있는 반딧불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입에 모기 들어가겠어. 까르르 웃으며 저를 놀려대는 혁재의 말에 동해가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제 옆에 앉으라며 옆 자리를 탁탁 치는 혁재에게 입을 삐죽 내민 채 자리에 앉았다. 동해가 옆에 앉자, 방긋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혁아"
"동해야"
무언가 통한 듯,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놀라서 잠시 멈칫, 눈을 동그랗게 뜨는것도, 이내 웃음을 터트리는 것도, 닮은 점이 많은 두 사람이었다.
"응, 동해야"
"너와 함께있는 순간들이 하나같이 다 유쾌하고, 즐겁고, 예쁘더라. 내게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고마워 혁아."
"나도 고마워. 좋아해줘서 고마워 동해야. 사랑해"
혁재의 말에, 볼을 쓰담는 따뜻한 손길에, 눈물이 고였다. 행복해서 운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이는거겠지. 혁아, 네 말대로 좋아하는 표현보다, 사랑한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아. 사랑한다. 내 마음이 너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사랑해 혁재야.
+
"누나도 이동해 우리집에서 지내는 거 알았어?"
"동해가 얘기해줬어? 이사오기 하루전까지는 비밀이라니까.."
"뭐야! 나한테는 왜 비밀인데!"
"뭐긴뭐야. 예비 며느리랑 같이 산다고하면 너가 퍽이나 공부하겠다. 어?"
"예, 예비 뭐? 며느리? 걔가 왜 며느리야!"
"그럼 니가 며느리냐? 시끄럽고, 성적 떨어지기만 해! 잘하라고 자전거 빌려준거니까. 알았어?"
방으로 들가버리는 누나를 물끄러미 보던 혁재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긴, 따지고보면 내가 사위고 동해가 며느리인건 맞지? 무슨생각을 더 했는지, 흐뭇함을 넘어서 야릇한 표정을 짓고있던 혁재는 묘한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방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경멸한다는 듯한 느낌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던 누나가 손 동작으로 지켜보고있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혁재는 상상으로만 해왔던 음흉한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한 마음에 후다닥 저의 방으로 뛰어들어가며 소리쳤다.
"동해랑 키스도 안해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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