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묻는다면
월간은해 2020.05. [그게 좋은거야]
w.파문
<LHJ>
회색빛 이불과 푹신한 베개가 온 몸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머리맡의 높이 만큼은 그레이 블루의 페인트가 보이고, 그 너머로 붉은 벽돌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열여놓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자 그대로 커텐이 살랑 물결을 이뤄 춤을 춘다. 이동해는 가느다랗게 떴던 눈을 다시 감고 따뜻한 쪽으로 제 몸을 옮겼다. 체감상 정오가 훨씬 넘고도 남았겠지만 침실에는 빛 한 폭 들어오지 않았다. 침대의 반을 넘어 몸을 넘긴 이동해와 다르게 혁재는 가장 끄트머리에 걸치 듯 누워 베개를 꼭 그러쥔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본인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매번 놀러왔다가 잠이 드는 누군가가 있을 때면 침대가 좁아터진 것 처럼 굴곤 했다. 자꾸만 등 뒤로 닿는 손장난에 귀찮은 짜증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무의식에 팔을 휙 내저어 이불을 끌어당기자 되려 반대쪽에서 욕설섞인 고집이 들렸다. 결국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가 먼저 천천히 눈꺼풀 속에서 드러난다. 널찍한 침대 대신 사이드 테이블이 코 끝에 닿을 듯했고, 새로 바꾼 우드 계열의 향은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어제 마신 술로 인한 약간의 숙취는 전혀 개운하지 못 했다. 게다가.
"몇 시야.."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늦은 기상의 감상을 찢고 들어왔다. 혁재는 긴 한 숨을 내뱉었다.
"몰라."
"더 자자.."
"니나 더 자라."
대충 상체만 일으키자 감싸고 있던 이불이 어깨까지 딸려 올라왔다. 그 바람에 아직 꿈결 속인 얼굴 위로 두터운 이불이 드리워졌다. 본인이 알아서 거두겠거니 하며 가만히 파묻힌 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얼마 못 가 검지와 엄지로 이불을 들어 숨구멍을 만들어 준다. 반 쯤 깨어있던 것인 지 입가에 미소가 어려있다. 혁재는 버젓이 약을 올리는 표정에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지만 곧 풀어지고야 만다. 손등으로 볼을 툭 건드리고, 파자마를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자마자 지난밤 돌려놓지 않은 세탁물들이 떠올랐다. 혹여 잊은 것은 없을까 집을 한바퀴를 돌아본 뒤, 아직 무거운 눈을 비비며 세탁 버튼을 누르고 돌아섰다.
느즈막한 주말. 집에서 쉬는 것 말고는 나갈 일도 약속도 잡지 않기로 약속한 날. 답지않게 게으름을 피우는 방 안의 사람에게 받은 작은 허락은 요리하기 위한 재료를 사러 가장 가까운 마트에 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한가로이 밖을 내려다보던 혁재는 느긋한 걸음으로 냉장고로 다가갔다. 간밤에 들어와 숙취에 찌든 잠을 괴롭히더니 이런 걸 붙여놨냐. 깔끔한 은회색 냉장고 위로 삐뚤빼뚤 붙여진 포스트잇마다 무언가 가득했다. 하나씩 떼어내며 휘갈겨 쓴 글자들을 읽어나갔다.
왜 벌써 자냐
너한테서 술냄새나
일어나면 밥 뭐먹을지 생각 좀
커피 내려줘
샐러드에 샌드위치?
식빵 있길래
난 아보카도 많이
근데 냉장고에 아보카도가 없네
사와
진짜 자네
ㅇㅣ혁재ㅐㅐ----
다 떼어놓고서야 혁재는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게 닿은 시선의 끝에는 유리컵 앞에 뜬금없이 놓인 볼펜과 포스트잇이 있었다. 집에 이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등장에, 언젠가 이동해가 스스로 화투를 챙겨온 날이 떠올랐다. 그래, 그 정도 정성이면 본인 주머니에서 나왔을 것이 당연했다. 식기들이 있어야 할 곳에 엉뚱하게 놓인 물건 위에 다 쓰여진 종이 뭉텅이들이 하나 더 얹어졌다.
이동해가 거친 자리들은 항상 무언가 온전치 않았다. 지금과 같이.
그 작은 장난들이 생각나 기어코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터졌다. 집주인이 먹지도 않는 식재료가 집에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무작정 남의 집에 와놓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이 왜 없냐며 물음표를 띄울 때마다 혁재는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런 뒤에는 본인이 사준 냉장고니 자기에게도 지분이 있다며 말도 되지않는 논리를 펼쳐댔다. 혁재는 그럴 때마다 그럼 니가 사서 채워넣어- 라며 일갈했고 그 말을 뱉으면 적어도 일주일 뒤에 냉장고는 이동해의 취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갑자기 변해있다거나, 냉장고에 자리가 없다며 막무가내로 가져올 때, 식재료 배송을 이 집으로 보내놓고 잘못 보냈다는 등 이유는 다양했다. 심지어 얼마 전 봉투에 달랑 들고 온 사과 세 알은 아직도 냉장고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요한 집을 둘러보던 귀에 기지개를 피며 앓는 소리가 들렸다. 혁재는 방을 향해 고개를 쭉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그만자고 일어나!"
"일으켜줘!"
"저건 하여간 진짜."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에도 손은 착실히 드리퍼와 원두, 두 명 몫의 컵을 꺼냈다.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지 않는 혁재는 티백을 먼저 담았다. 물을 끓여 놓으면 나머지는 이동해가 알아서 할 터였다. 이동해는 물이 끓는 소리에는 귀신같이 깨고 나왔다. 애초에 잠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었겠지만. 그나저나 이게 익숙해지면 진짜 큰일인데. 혁재는 티포트의 버튼을 눌러놓고 멈칫했다. 습관은 무서운 법이다.
진짜 샌드위치 먹나? 혁재는 냉장고를 열어 재료들을 훑어내렸다. 이동해의 의견을 무시하고 뭐고 전에 아무렇지 않은 수순이다. 숙취 때문에 딱히 먹고싶은 것도 없고 샌드위치야 어렵지 않으니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식빵은 냉동실 저 구석 어딘가 넣어뒀을텐데 그건 또 어떻게 보고. 진짜 먹을 거냐 확인하려해도, 그새 씻으러 들어갔는지 물소리가 들렸다. 어쩜 저렇게 우리집만 오면 지 하고싶은 거를 다 하냐. 받아주는 내가 문제지 그래. 혁재는 스스로를 탓하며, 미리 메뉴를 정한 어제의 이동해를 순순히 따랐다. 냉장고에 있던 재료들을 꺼내던 그는 잠시 서서 허리를 폈다. 콧노래까지 부르는 누군가가 먹을 딸기가 없는 탓이다. 딸기잼은 있는데.
"동해- 동해."
<LDH>
간지럽다는 느낌은 없으나 태어날 때 부터 상대의 한 쪽씩 쥐고 있던 느낌. 닮은 구석도 습관도 성격도 입맛도 취향도 죄다 틀려놓고선, 누군가 '사실 너네는 둘이 하나야.' 라고 한다면 '우와 그렇구나' 하곤 먹던 커피나 다시 마시며 납득 해버릴 것들.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일들. 뜬금없이 찾아가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새벽이 훌쩍 넘어가 있었고 그러다 당연하게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었다. 그건 기묘한 기분이다.
언젠가 취한 척 '내가 너 좋아하는 것 같냐?' 라고 물었던 동해의 질문에 이혁재는 이해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더랬다. 지금 옛날 드라마 대사 따라하는 거냐며, 범죄자들? 세속자들? 부잣집 애들 나오는 거 있잖아. 그 의문을 시작으로 결국 제목 찾기에 나섰고 그 다음은 배우들 이야기로, 또 어느 작가의 이야기로 번져가며 결국 주제를 잊은 채 흘러가 버렸다. 마치 연애 감정은 짐작하지도 않다는 듯이.
족히 몇 년은 넘은 아득한 기억이지만 그 때 드라마 제목을 정정해주었던 것 말고는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게 좋은가봐."
"..일어나자마자 뭔 헛소리야."
"자기야 우리 평생 이렇게 살자."
"끔찍한 소리하네. 야 바닥에 물 떨어지니까 머리부터 말려."
이혁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숙취에 찌든 속을 달래기 위해 찬 물을 들이켰다. 동해는 그 때의 질문을 뒤로 이혁재의 집을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반은 스케줄을 함께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반은 아직 식지 않은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음-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계속 그런 말을 되뇌이면서. 찌푸린 얼굴을 하고 현관문을 열어줘도 결국은 침대 옆자리까지 내어주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말도 되지 않는 부탁과 짜증은 이혁재 한정이었다. 동갑? 오래된 친구?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철없이 굴거나,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을 모두 보여주기에 가장 편안한 것에 동갑이란 요소가 크게 작용했을지 모르니까. 마냥 받아주기만 하면 부담스럽거나 재미도 없겠지만, 이혁재는 적당히 함께 놀고 밀어내다가도 기꺼이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동해는 넓은 등 뒤에서 서성거렸다. 한 쪽 구석에는 어제 저녁 자신이 써놓은 포스트잇 뭉치와 펜이 모여있었다. 이혁재는 후라이팬을 달구고 미리 꺼내둔 계란과 베이컨을 가지런히 놓았다. 사실 무언가 요리하는 것은 그나마 동해가 조금 나았으나, 누군가 왔을 때 간단한 끼니 정도는 곧잘했다.
"밥 다 먹으면 집으로 가라고 할거지."
응? 동해는 이혁재의 등에 붙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대로 목을 뒤로 빼는 덤덤한 얼굴을 마주했다. 동해는 습관대로 입술을 안으로 꾹말고 웃었다. 등 뒤에서 계속 서성거린 탓에 옷과 목 뒤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짐에도 이혁재는 말없이 계란을 깼다. 잘 달궈진 후라이팬 위로 노란 동그라미 두 개, 붉은 베이컨이 네 줄, 약한 기름 소리가 퍼지고, 옛날과 달리 소금은 뿌리지 않고, 뒤에서 뻗어온 손이 오렌지 한 쪽을 낼름 집어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야 물 떨어진다고."
"대답."
"니가 오늘 하루종일 집에서 놀자며?"
"진짜로 안 나가?"
"그럼 뭐 어쩌자는거야."
이혁재는 알맞게 익은 반숙을 접시에 옮겨 담고 눈을 흐렸다. 역시나. 동해는 일말의 따뜻함을 느끼고 그대로 목에 팔을 둘렀다. 너는 단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지. 이혁재는 휘청인 상체를 바로잡고 동해의 젖은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겼다. 조금만 빨랐어도 살짝 데일 뻔 했기에, 그의 기준에선 일종의 복수였다. 인정사정 없는 힘에 아플 법 한데도 참을 수 없이, 이유 없이 부딪히고 싶은 상황에 둘 다 웃음이 터졌다.
"놔라, 놔라."
"멍청아 뭐하는데 진짜!"
그저 둘 만의 세상인 것처럼. 방해받지 않는 시간과 유일한 미소. 굳이 복잡하게 일을 만들어 관계를 정하려하지 않아도 곁에서 평생 이렇게 노는거지. 동해는 제 머리카락을 꽉 쥔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진작 완성이 되어 토스팅된 식빵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혁재도 팔과 군데군데 흩뿌려진 물방울을 슥 거둬내고 샐러드를 대충 빈 접시에 옮겨 담았다. 무가당 요거트, 뮤즐리, 반숙 계란, 토스트, 딸기잼, 샐러드와 토마토, 과일. 정갈하게 예쁜 색들이 하나씩 차려졌다.
"지가 먹자고 해놓고 내가 다 하네, 내가."
"어제 내가 사온 거 옮기면서 왜 니가 생색이야? 심지어 샌드위치도 아니고 토스트네."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가리키며 동해가 목에 힘을 주었다.
"내 말 틀려?"
"하..."
뿌듯한 미소를 짓는 동해를 보곤, 이혁재는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 팔자야."
지겹게 반복되는 말싸움이었지만 하루종일에 매일도 이어졌다. 멈추게 할 사람도 없으니 평소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았다. 너는 정말 평생 같이하고 싶은 사람이야. 동해는 그 말을 꾹 삼키고 웃었다.
"너는 진짜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누구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이혁재는 동해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찬장을 열어 작은 접시를 꺼냈다. 동해의 이기는 당연한 것이었다. 누군가 물어봐도 어떻게든 자신의 탓으로 돌려내는 이런 것들이. 굳이 관계의 정의가 없어도 뚜렷하게 미래를 그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들이. 작은 접시를 내려놓고난 빈 손이 젖은 머리를 다시 한 번 꽉 잡아당기고 놓았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어딜 앉아?"
"..난 이게 좋은 거 같아."
"뭐가. 머리 잡아당기는 거? 너 변태냐."
아무렇지 않게 말해도 온통 나를 채우는. 이런 순간의 너와 나 같은 거.
"너도 좋은 사람이지 뭐."
"오냐, 나도 알아."
동해는 자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지 않은 커피를 한 모금, 맛있냐? 묻는 얼굴에 고개를 끄덕. 스케줄도 아니고, 아침부터 무슨 커피를 마셔. 핀잔에도 동해는 내내 즐겁게 웃었다.
이해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도 토스트에는 달콤한 딸기잼을 얹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규현 <그게 좋은거야>의 가사를 조금씩 넣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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