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해에겐 작은 꿈이 있었다.
까만 볼캡에 까만 마스크 쓰고 연습생 시절 자주 가던 분식집 몰래 찾아가기. 아니면 공항에서 마스크를 턱까지 내린 다음 느긋한 표정으로 팬들에게 손 흔들어 주기. 어느 아이돌들에겐 불편한 일상이겠지만 중소 망돌 이동해에겐 택도 없는 꿈이었다. 분식집은 언제나 프리패스. 마스크는커녕 모자도 없이 맨얼굴로 거리를 활보해도 그 아무도 몰랐다. 가끔 가다 '저기..' 하고 말을 걸어와 사진 찍어줄 생각에 긴장 타고 있으면, '대학생이세요? 저희 설문 조사..' 혹여 그보다 나은 경우엔, '이상형이신데 번호 좀...' 이게 이동해의 현실이었다. 데뷔 2년 차 그 누구도 모르는 망돌 오브 망돌. 아이돌 포화 시대의 희생양. 이동해에게 마스크는 미세먼지 빨간불인 날 빼곤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9달 전만 해도 그랬다. 아, 진짜 나도 꽁꽁 싸매고 디스패치 피해서 밤거리 산책해보고 싶다. 오전에 연습하고 오후에 알바 뛰는 인생 존나 지겹다. 다른 연예인 사인받아줄 수 있냐는 연락도 신물 난다. 존버 하면 된다며. 도대체 언제까지.
그랬던 이동해네 그룹이 고작 아홉 달 후에 빵 떠서 차트 역주행하고 신곡 1위 하고 온갖 예능에서 섭외 들어오고.. 오늘은 새벽 스케줄 끝내고 초청받은 해외 공연까지 가느라 공항에 왔으니 정말, 인생은 한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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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히 늘어난 스케줄에 이동해는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꿈만 같아 기분이 붕붕 뜨다가도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제대로 눈도 못 뜬 채 벤에서 내리려는데, 매니저가 한소리 했다.
- 야, 너 그 몰골로 나갈 거야?
아 맞다. 나 이제 공항패션도 찍히는 아이돌이지. 졸음에 정신이 몽롱한 게 더더욱 믿기지가 않는다. 모자랑 마스크로 꽁꽁 가리고, 입 찢어지게 하품을 한 뒤 문을 열었다. 다른 차에서도 멤버들이 하나씩 내린다. 유일한 동갑내기 멤버 이혁재, 어제 새벽에 라면 3 봉지를 먹더니 많이 부었는지 평소보다 캡 모자를 꾹 눌러썼다. 눈 밖에 안 보이는데 그 좁은 틈 사이로 또 잘도 눈이 마주친다. 이혁재가 씩 웃으며 이동해에게 다가왔다. 이동해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참 간사한 게, 그렇게 쓰고 싶었던 마스크가 요즘은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다. 이혁재 얼굴을 거의 잡아먹다시피 한 마스크, 저 필터 쪼가리 뒤에 가려진 진짜 표정이 보이질 않아 짜증이 솟았다. 저 새끼 원래 저렇게 연기를 잘했었나. 눈 밖에 안 보이는데 꿀이 줄줄 떨어진다. 마스크 젖겠다고. 아무리 비즈니스라지만 이렇게까지 메소드일 필요가 있어? 이혁재가 먼저 스킨십하는 게 싫어서 괜히 먼저 달려가서 치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이혁재는 놀란 기색 없이 몸을 이동해에게 기대며 장난을 건다. 외투 위로 다부진 등이 꾹, 심장께를 눌렀다. 이동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 이혁재 어깨에 턱을 걸쳤다.
- 좋은 아침, 이동해.
- 어, 너도 좋은 아침.
그래, 이만큼 합이 맞으니까 먹혀들었지 우리 계획이. 이건 다 계획된 퍼포먼스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이상한 상상하지 말자, 착각하지 말자, 오해하지 말자. 그렇게 되뇌면서도 이동해는, 후드티까지 뒤집어써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시뻘게진 귀를 완벽히 감출 수 있어서. 그러니까 이제 진짜 마스크가 필요하기는 했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다른 이유로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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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일 한치 앞길 모른다고,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그들의 역주행이 시작됐다. 무슨 지방 행사였나? 이혁재가 무대 계단 내려가는 이동해 손을 잡아주는 장면이 찍혔는데, SNS에서 그 짤이 대박을 터트린 거다. 얘네 진짜다. 내가 다 설렌다. 케이남돌에 찐이 숨어있었다.. 한 번 물결을 타고나니 어디서 찾은 건지 둘이 붙어있는 사진들이 꽤나 많이 쏟아졌다. 실제로 멤버들 중 제일 친하니까 많을 수밖에 없었다. 호모덤이라나? 순화해서 말하자면 그들의 케미를 추종하는 자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사실 이동해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게 그렇게 주목받을 일인 줄도 몰랐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혁재는 원래 그런 놈인데?
이혁재와 이동해는 십년지기 친구였다. 같은 동네 같은 중고등학교 출신의 찐절친. 열네 살 때부터 매사에 조심성 없고 덜렁거리는 이동해를 챙기는 건 늘 이혁재 몫이었다. 열여덟에 뜬금없이 아이돌 하겠다고 덜컥 듣보 소속사에 들어간 이동해를 따라 이혁재도 오디션을 봤다. 둘 다 연습생이 된 후로는 2년 동안 숙소 방도 같이 썼다.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 몸상태별 잠버릇부터 중2병 시절 흑역사까지 전부 아는 사이. 그만큼 챙기고 챙김 받는 게 아무렇지 않은 사이.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그러니까 실장님 입에서 나온, 좆소회사 기획팀의 눈물겨운 생존 전략은 이동해에게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실장님 미치셨어요?
이혁재랑 사귀는.. 사귀는 척을 하라고 했다. 사실 처음 들은 날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에 정확한 워딩은 생각이 안 나는데,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지금 너네 케미가 인터넷에서 인기가 좋으니까 둘이 그런 모습을 많이 연출 좀 해봐.' 그런 걸 전문용어로 비게퍼라 한다던가. 물론 이 바닥에 그런 음지 문화가 있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 최전선에 뛰어들어 피리 부는 소년을 자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진짜 미친 건가? 턱이 발등까지 떨어진 채 어버버하고 있는 이동해와 달리 이혁재는 차분해 보였다. 이혁재 빡친건가. 아무리 하늘 같은 회사 명령이라도 이건 좀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이혁재가 무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이동해랑 지금보다 더 붙어 다니면 되는 거죠? 스킨십도 하고.'
'아니 잠깐만 이혁재..'
'요즘엔 이런 게 먹힌다잖아. 언제까지 지방 행사 뛰면서 새벽알바 할건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존나 맞는 말이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래, 내 주제에.. 할 수 있는 건 범죄 빼고 다 해봐야지. 근데 이건 범죄 아닌가 사기 치는 건데? 아니 어쨌든, 이혁재가 하겠다는데 나도 해야지 뭐. 이동해는 늘 이혁재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 실력이면 여기보다 훨씬 좋은 회사 갈 수도 있었는데, 괜히 나 때문에 코 꿰어가지고.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 들어왔던 것도 어쩌다 들었다. 근데도 안 가고 이 거지 같은 회사에 남은 건 분명 이혁재 그 멍청한 의리 때문에. 이런 놈이 성공하겠다고 뭐든 하겠다는데 이동해가 어찌 거절하겠는가. 네... 하겠습니다, 합죠. 비게펀지 뭔지 별거겠냐. 평소보다 좀 더 붙어 다니면 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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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워낙 친했고 스킨십도 많은 편이었으니. 게다가 이혁재가 정 어려우면 그냥 내가 들이댈 테니까 넌 그냥 평소처럼 하라고 해서, 이동해는 별로 나서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더 자주 귓속말을 한다거나, 괜히 한 번 더 쳐다본다거나. 끌어안거나 기대는 건 늘 해오던 거라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우리 원래 이런 관계였는데. 이혁재는 원래 그랬는데. 계단 내려갈 때 손 잡아주고, 맛있는 거 있음 입에 넣어주고, 햇빛 쨍하면 앞에 서서 가려주고. 나는 맨날 이혁재한테 기대고, 뒤에서 끌어안고, 잘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근데 남들 눈에는 연인처럼 보인단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시도 때도 없이 귀에 열이 확 올랐다. 이혁재 눈빛도 좀, 다르게 느껴지고. 쟤가 원래 날 저렇게 사랑스러운 눈으로 봤었나? 연기인가? 아닌가 다른 멤버도 다 저런 눈으로 보나?
어쨌든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세상일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꽉 막힌 하수구처럼 한 치 앞 안 보이던 이동해네 그룹이 갑자기 굴러 떨어진 두루마리 휴지처럼 술술 풀렸다. 이혁재 이동해가 점점 더 음지에서 유명해지고, 그들이 유튜브에서 무대 영상을 찾아보다가 어느 직캠 하나가 알고리즘을 탔다. 곡도 분명히 좋고, 안무 노래 컨셉 다 괜찮은데 왜 망했을까 운이 지지리도 없는 탓이라며 활동 끝나고 삼일 내내 눈물을 흘렸던 곡이었다. 이동해 근자감이 아니라 사실이었나 보다. 영상이 미친 속도로 히트를 치더니 급기야 음원 사이트에서 역주행을 시작했다. 이 기세를 몰아 회사 자본을 털고 털어서 회심의 신곡 발표, 역주행 곡도 살짝 편곡해서 서브로 같이 활동, 결과는 대성공.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팔로워 숫자에 정신이 혼미했다. 갑자기 카톡이 불이 났다. 연락 끊겼던 사돈에 팔촌에 유치원 동창까지 안부를 물어대서 아예 알람을 꺼버렸다. 이 모든 게 이혁재와 이동해가 모럴을 버리고 선택한 결과라니. 뿌듯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에 매일 밤 잠을 설쳤다. 어쨌거나, 이제 진짜 꽃길이라고. 부모님 조금만 기다려요... 한강뷰야 내가 간다..
하여튼 이동해는 정말 소원대로 마스크 쓰고 공항에 왔다. 갑자기 너무 바빠져서 분식집은 아직 못 가봤다. 이토록 하루하루 꿈만 같은 나날인데, 이동해가 마냥 행복할 수 없는 것 역시 그 선택 때문에. 이혁재가 이동해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점점 더 신경 쓰여서.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눈빛이 아니었다. 숙소에 우리끼리만 있을 때에도 똑같다고. SNS에 팬들이 올리는 글과 사진을 보자니 더더욱... 쟤 설마 나 진짜 좋아하나? 그래서 맨날 나 챙겨줬나? 회사도 따라 남고? 비게퍼도 그래서 한다고 한 거고? 팬들이 망붕이라 부르는 짓을 본인이 하는 꼴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데도 멈출 수 없이 상상의 덩굴이 쑥쑥 자랐다. 그러다가도 어떻게 불알친구 이혁재를 그렇게 판단하냐며 이불을 빵빵 찼다.
이동해가 제일 미치겠는 건, '이혁재가 진짜 나 좋아하나?'의 연쇄 반응이 '극혐'이 아닌 '두근'이라는 거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이동해는 거품 물 뻔했다. 언제부턴가 이혁재가 다가오면 얼굴이 후끈거렸다. 별것도 아닌 스킨십에 몸이 바짝 긴장했다. 갑작스러운 계기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이혁재랑 이 가짜 연애 놀음을 시작하고 나서, 언제부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고 느껴져서.
티 내지 않으려고 사석에선 무조건 모자나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멤버들이 연예인병 걸렸다고 놀려대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반대로 이혁재가 마스크를 쓰는 건 좀 빡쳤다. 얼굴 다 가리고 그러면, 진짜로 가면 쓰고 하는 '가짜 연기'처럼 느껴져서. 내가 존나 과몰입해서 이혁재가 나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것 같.. 아 진짜 처 돌았나 보다. 연기에 소질 있나 봐. 고작 몇 달 연인인 척했다고 진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뭐야 몰입력 개쩌네 그것도 10년 지기 친구한테. 가뜩이나 바빠서 잠잘 시간도 없는데, 누워서 그 생각만 하면 몰려오던 졸음이 싹 달아났다. 이 와중에 예능마다 둘을 은근히 엮는 건 당연하고, 사석에서도 더 붙어오는 이혁재와, 처음엔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제는 지들이 더 신나서 몰아가는 멤버들. 진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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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몇 번 타봤다만, 이렇게 좋은 좌석은 처음 앉아봤다. 이동해는 괜히 팔걸이도 한 번 만져보고, 창문 밖도 쳐다보고, 보이는 버튼도 한 번씩 다 눌러보고... 그러다가 갑자기 이혁재와 이동해 사이의 가림막이 지잉 내려갔다. 휴대폰을 보고 있던 이혁재가 쓱 고개를 돌려 이동해와 눈을 맞췄다. 왜? 필요한 거 있어?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다정하고 지랄.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럴 필요 없잖아. 아니 원래 이런 놈이긴 했지만..
실수라며 급히 다시 버튼을 눌렀다. 좌석도, 숙소도 무조건 이혁재랑 짝. 평소에도 당연한 일이긴 했는데 새삼 좀 그렇다. 10년째 원 플러스 원의 삶이라니. 이혁재 없는 인생?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이동해 인생에 당연한 존재가 이혁재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퍼뜩, 살면서 동성이기에 모르고 지나친 사랑이 어쩌구.. 하는 인터넷에서 본 구절이 왜 떠오르는지. 허튼 생각 말고 잠이나 자야지. 비니를 소라게마냥 눈까지 덮어썼다.
내일 서게 될 무대도 상상해보고, 머릿속으로 공연 시뮬레이션도 돌리고, 호텔 룸서비스 맛있다던데 뭘 먹을까 뭐가 유명하댔지? 해산물은 아니겠지 이혁재 안 먹는.. 아, 도무지 잠이 안 온다. 결국 또 이혁재로 귀결되는 한결같은 사고 회로에 성질이 났다. 에어컨은 또 왜 이리 센 건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귀찮아도 담요 덮어야겠다 싶어 눈을 뜨려는데, 갑자기 손등에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 꼭 이러고 자다가 감기 걸리지.
이혁재, 또 이혁재다. 이동해 추운 건 어떻게 또 귀신같이 알아채고 담요를 꺼내다 덮어주는 이혁재. 깰까 봐 조심하면서도, 찬바람 들어올 틈 없이 목부터 무릎까지 꼼꼼하게도 덮어준다. 깨어있는 게 들킬까 봐 이동해는 거의 숨을 멈췄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심장소리 이혁재한테 들키면 어쩌지. 중고딩 때도 엎드려 자고 있으면 이혁재가 자주 담요를 덮어주곤 했다. 그냥 천성이 다정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왜 이혁재가 딴 친구에게 담요 덮어주던 장면은 하나도 떠오르지가 않을까. 그냥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아니면 기억에서 지운 건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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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동해는 거의 한숨도 못 잤다. 그리 긴 비행은 아니었다만, 그동안의 피로가 차곡차곡 누적되어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룸서비스고 뭐고 일단 좀 대자로 눕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호텔 키를 받아 들고 비적비적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야, 어디 아파?
- 아니 그냥 피곤해서.
축 처진 이동해를 보고 이혁재가 또 따라나섰다. 너 때문이잖아, 새끼야. 죄 없는 이혁재 멱살을 붙잡아 흔들고 싶은 맘을 꾹 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빨리 올라가서 쉬려고. 그럼 나도 같이 가, 어차피 같은 방이잖아. 어.. 그래. 결국 또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딩동, 문이 열리고 캐리어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이혁재가 먼저 잡아챈다. 너 키 가지고 있으니까 문이나 열어. 그리곤 캐리어 두 개를 질질 끌고 앞서간다. 이동해는 그 뒷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저 새끼가 유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그렇게 대책 없이 다정하래, 십 년째 한결같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동해는 그대로 침대에 꼬꾸라졌다. 모자고 마스크고 벗을 힘도 없고 벗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혁재한테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어서. 이혁재는 들어오자마자 가방 풀어서 짐 정리를 한다. 존나 부지런한 놈. 고개를 저었다.
- 동해, 먼저 안 씻어?
- 어... 귀찮아.
- 그럼 옷이라도 갈아입어. 안 불편해?
- 으응...
- 너 답답한 거 싫어하잖아.
이혁재가 아동해 침대에 걸터앉아 이동해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이 따갑게 느껴져서 이동해는 몸을 쓱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헙, 입술을 물었다.
- 우리 그거 이제 그만하면 안 되냐.
- 어? 뭐?
- 아.. 그.. 사귀는 척하는 거.
한동안 말이 없다. 무슨 생각으로 이딴 말을 꺼낸 거야. 이동해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잊어버려,라고 해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진다. 될 대로 돼라. 사실 너무 지친 맘에 그런 심정이 섞여있기도 했다.
- 부담스러워? 싫어?
- 아니 그게 아니라...
- 아니면, 뭔데?
동해, 나 좀 봐.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깐다. 이혁재 진지 빨면 상대하기 어려운데. 이동해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도무지 어떤 쪽으로 대화가 흘러갈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 복구시켜야 하지. 머리를 미친 듯이 굴리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혁재와 마주 보고 앉았다. 새카만 눈동자에 얼굴이 비치는 것 같다. 전부 내 착각이었으면 어쩌지. 앞으로도 계속, 착각하고 지내야 하면 어쩌지. 감정 소모는 최악이다. 가뜩이나 감정노동자인데, 매 순간 표정관리하는 것도 죽을 맛이라고. 모르겠다, 일단 지르고 본다...
- 이혁재.
- 어.
- 너 진짜 나 좋아하냐?
짧은 정적. 그리고 곧바로 이동해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 진짜 어이없지. 니가, 어? 연기를 얼마나 잘하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니까? 그래서 솔직히 가끔 좀 부담스러운데 뭐, 너도 그런 생각 하지? 이걸로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해본 소리야, 근데 진짜 웃기지 않냐.. 이혁재는 얼굴에 웃음기도 없는데 이동해는 혼자 자기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르는 채로 깔깔대고 웃는다. 물론 좆됐음을 충분히 느끼고 있는 웃음이었다. 아, 시발 어쩌지. 어색해지는 거 아냐? 이혁재가 화내면 어떡해? 슬슬 눈치를 보고 있는데.
- 진짜라면?
- 어?
- 진짜 좋아하는 거면 어쩔 건데.
이혁재가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이동해는 정신이 혼미했다. 뭐라는 거야. 또 장난치는 거야? 이혁재가 원래 장난기가 많기는 해도 이런 걸로 장난칠 놈은 아닌데. 그것도 지금 이 방에 우리 둘 뿐일 때. 처음 비게퍼 하란 말을 들었을 때처럼 정신이 멍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자연스럽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 그러나 뒤이은 이혁재의 말이 그보다 가히 충격적이라, 이동해는 그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이동해.
-...
- 너 마스크로 가리면 얼굴 새빨개진 거 다 가려질 줄 알아?
-...
- 너도 나 좋아하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멍충아.
- 아니, 무슨 말...
- 내가 널 몇 년을 좋아했는데, 네 눈빛 달라진 걸 눈치 못 챌 줄 알았냐고.
- 몇 년을... 좋아했는데?
- 너보다 열 배는 더.
마스크 좀 벗어봐. 뽀뽀도 못하잖아, 지금이 타이밍인데. 나머지는 차차 말해줄 테니까.
이혁재 곁에서 10년 동안 들었던 말 중 가장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미친, 저런 말을 할 줄도 아는 놈이었다니. 당황해 어버버 거리고 있는 사이 이혁재가 알아서 마스크를 쓱 끌어내렸다.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센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실은 무척 긴장한 게 분명했다. 근데 또 아닌 척 씩 웃는다. 그리곤 한동안 바깥공기를 못 마셔 바싹 마른 이동해 입술에 꾹, 도장을 찍었다 떨어졌다. 이동해가 멀어진 이혁재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동해 얼굴만큼 홍당무가 다 됐다. 이마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랍게도, 귀엽다. 란 생각이 들었다.
이동해는 말없이 제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행이다, 심장 튀어나오진 않았네. 확실히 불알친구가 입술을 부볐는데 기분이 더럽긴 커녕 황홀한 걸 보니, 나도 이혁재 좋아하는 거 맞나 봐. 내 감정을 나보다 더 빨리 알아채다니 이혁재 진짜 찐이다. 이딴 우스운 생각을 하며 이혁재 목을 꽉 끌어안고 안겼다. 이혁재가 그대로 뒤로 쓰러지며 침대에 누웠다. 어색하긴 한데,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았다. 늘 그랬듯이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몸이 스르륵 녹아내리며 침대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그간의 피로가 몰려들며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이동해가 본능적으로 귀에 걸쳐있던 마스크를 벗어 바닥으로 던졌다. 오늘 마스크는 제 용도를 다 한 게 분명했다. 더 이상 날 숨겨야 할 사람은 없으니까.
이제 까만 볼캡에 까만 마스크 끼고 이혁재랑 둘이서 디스패치 피해 야밤에 분식집 가면 꿈은 다 이뤘네. 실없는 상상을 하며, 이동해는 정말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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