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순응
월간은해 11월호 No Love
w. 푸르누레
나의 숨, 호흡, 이혁재.
이혁재가 나를 피한다고 느낀 지 어언 몇 달째이다. 혁재는 난데없이 숙소로 거처를 옮겼고, 내 시간이 네 시간이던 그런 시절도 자연스레 끝이 났다. 외로웠다는 녀석은 내 부름을 바쁘다며 매번 거절한다. 이혁재, 정말 외로웠어?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만, 비밀을 쉽게 털어놓지 않는 네 방식을 존중해. 그런데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없는 내 일상이 정말 외로워지기 시작했으니까.
예능에서도, 라이브에서도 널 못 본다고 서운한 티를 냈는데 그래도 연락은 오지 않는다. 지난 20년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멀어졌을까. 리턴즈 첫 화 촬영 때는 정말 어색했어. 널 보는 게 긴장되는 순간이 오리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네가 오길 기다리는 십여 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초조하게 느껴졌어. 막상 넌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 아무렇지도 않게 날 대하고. 변한 건 나야?
네 생일파티를 진행한다는 걸 알게 되고 너무 신났다. 오랜만에 널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신이 안 날 리가. 실장님께 내가 깜짝 등장하겠다고 우겼고 그 뒤는 뭐 순조로웠다. 날 보던 눈빛에 기쁨이 담겼다는 걸 알아. 예전과 같은 눈빛에 안정감이 밀려왔다. 역시 우리 친구 맞지? 그러나 거짓말처럼 또 멀어진다. 인스타에 네 예전 사진을 올리며 보고 싶다 썼다. 이혁재는 자기 내용에는 귀신같이 반응하는 놈이니까. 이건 과했나 싶어 문구를 수정하고, 끝내 게시글을 지워버렸다. 그래도 끝까지 연락을 안 하네. 서운해. 나 좀 봐줘, 혁재야.
비욘드 라이브가 잡히고 몇 날 며칠 붙어있으니 그간의 거리감도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싶었다. 성황리에 콘서트를 마치고 모두가 감격에 찼다. 우리는 슈퍼주니어다! 이 유대감이 너와도 이어진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혁재는? 아직 안 왔어?”
“은혁이? 걔 금주했다고 회식 안 온댔어.”
쿵.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둘 사이의 적막이 난 오늘로써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도돌이표였던 거야. 네가 이런 자리를 언제부터 빠졌다고? 금주는 왜 하는데? 네가 안 오는 사실을 왜 난 모르는데? 이 자리에서 가장 축하받아야 할 인물은 연출가, 너잖아.
맥주 몇 모금에 취기가 확 올라왔다. 동시에 감정도 북받쳐 올랐다. 서럽다. 너와 멀어진 이 현실이 너무 서럽다. 왈칵하며 울음을 토해내는 동해였다. 순식간에 동해에게 이목이 쏠렸다.
“동해야, 왜 울고 그래?”
“형, 이혁재 이제 나랑 친구 아닌가 봐.”
“동해 많이 취했나 보다. 그냥 적당히 보내자.”
“아아! 나 안 취했어! 걔가 이제 연락도 먼저 안 하고, 잘 만나주지도 않고…”
“으휴. 너네만큼 가까운 사이가 어딨냐? 둘이 따로 만난 거 유튜브에도 올렸더만.”
“이번 콘서트 준비하기 전만 해도… 지난 세 달 동안 겨우 열 번밖에 못 봤어.”
“그만치 보면 됐지. 뭘 그렇게 자주 보려고 해? 원래 친구는 그래!”
“그야… 이혁재니까.”
다음날 동해는 한층 맑아진 정신으로 지난밤의 대화를 복기했다. 그리고 혁재에 대해, 혁재와의 관계에 대해 골몰히 생각했다.
혁재와는 매일 만나는 게 당연한 건데. 우린 항상 그래왔는데.
돌이켜보면 너란 사람이 당연한 존재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미 내겐 네가 당연해졌는데 이제 와서 널 잃으면, 그러면, 나는 어떡해?
당연한 걸 되찾는 거야.
어지러운 마음이 정리되고 정신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디앤이 앨범 낼 때 됐죠?”
…
갑작스레 계획된 4집 앨범. 연말에 있을 단체 앨범 전에 활동을 마무리해야 하니 일정이 다소 빠듯하다. 이렇게 해서 널 볼 수만 있다면.
리턴즈PD가 컴백송캠프를 준비했다. 둘이 여행도 자주 갔었는데. 정말 오랜만이네, 새삼. 요리 까막눈 둘이서 음식도 해 먹고 나란히 앉아 한가로이 대화를 나눈다.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다. 이대로 이렇게 평생 함께하고 싶어. 서운한 건 없었냐 슬쩍 떠본다. 나 피하지 마. 혁재야. 솔직히 얘기해줘. 내가 고칠게… 예상외의 대답이 나왔다. 예능? 예능을 더 나갔으면 좋겠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둘이 같이 자는 게 얼마 만인지. 요새는 호텔에 묵을 일도 없고 어느 순간부턴 내 집으로 찾아오질 않으니. 넓은 텐트 안, 단둘이 누워 있다. 그 사실이 괜스레 벅차고 두근거린다. 오늘 하루를 되새긴다. 다정한 눈빛, 포근한 말투, 내가 괜찮으면 자기도 괜찮다는 너. 너의 모든 데서 사랑이 안 담겨 있는 곳이 없어서— 나 이혁재 좋아하나 봐. 그동안 널 좋아한다는 걸 왜 몰랐을까. 왜 이제서야 깨달았을까.
매일같이 작업실에 틀어박혀 곡 작업을 진행했다. 가이드 녹음을 방패 삼아 자주 불러냈다. 어느 가수가 가이드녹음까지 직접 할까. 어이없는 핑계지만 그래도 넌 착실히 나온다. 내 작업을 전적으로 믿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게 고맙고, 또 설렌다. 근데 저번에 바쁘다고 안 만나 줬으면서. 일없는 거 맞잖아. 고맙다는 말 취소! 역시 미워. 나쁜 놈.
…
진지하게 모니터링을 하던 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 얼굴이 화면만 하게 클로즈업되는 장면이었다. 화면 속 나를 바라보는 너의 얼굴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 혹시나, 너도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눅진해진 몸을 일으켜 대기실로 향했다. 메이크업을 지우고, 현장을 정리하느라 모두가 분주하다. 단둘이 있고 싶은데 바글바글한 스태프들 때문에 기회가 별로 없다.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잠깐의 틈이 생겼다. 조심스레 그에게 말을 붙인다.
“혁재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너 좋아하는 것 같아.”
혁재의 어깨가 순간 경직되었다. 그러나 이내 여유를 갖추고 대답한다.
“응, 동해 나도 너 좋아해.”
“너랑 같이 있는 게 즐겁고 그래서 매일 보고 싶고, 앞으로도 함께였으면 좋겠어. 우리 사귀자.”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20년간 본 적 없는 낯선 표정을.
“우리가 참 오래 봤지. 연습생 때부터 항상 붙어있었고, 데뷔하고는 은해커플이다뭐다 해서 스킨십도 많이 하고.”
“잠깐만…!”
“너 그거 사랑 아니야.”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슬픈 눈망울에 아픔이 차오른다.
“좋아한다고 모두 연애를 하진 않아. 단순히 보고 싶다는 이유로 사귈 순 없잖아. 잘 생각해봐 동해. 미안, 울리고 싶진 않았는데.”
동해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제 활동긴데 이혁재랑 나, 어떡하지?
…
이젠 나도 널 모르겠다.
마주칠 땐 참 다정한데 선은 칼같이 긋는다.
“그… 내가 너 좋다고 해서 어색하거나 불편하면 촬영 때 좀 따로 있어도 되니까…”
“아냐, 뭘. 사람이 착각할 때도 있는 거지. 우리 친구잖아.”
“……”
“그냥 하던 대로 할게. 동해.”
하던 대로- 이혁재는 아주 하던 대로 굴었다. 4집 미니 앨범 활동을 계속하며, 동시에 스페셜 앨범 작업을 진행하며 우리는 ‘공적으로’ 자주 만났고 그때마다 혁재는 아주 다정했다. 그리고 나의 사적인 영역에는 절대 발을 들이지 않는 그에게 절망했다. 그가 주는 행복에 속절없이 취하다가도 촬영이 끝나면 허전한 빈자리를 나 홀로 받아내는 것이다. 눈빛, 표정, 말투, 행동. 그의 다정함에 숨이 막힌다. 달콤함이 순간임을 알기에. 사귀지도 않는 사람한테 이러는 거, 반칙이잖아.
조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게 뭐야?”
“보면 몰라? 팔찌야.”
“너 나 아직도…”
“친구끼리 이 정도 할 수 있잖아? 우리 원래도 그랬고.”
그동안 옷이며, 액세서리며 우리가 맞춰 온 것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마음을 자각한 이후 첫 번째 커플 아이템이다. 흔들리는 동공을 보고도 혁재는 능청스레 팔찌를 찼다.
“고맙다, 야.”
…
No Love
타이틀곡 제목일 뿐이다.
지난 활동에도 ‘B.A.D’만 띡 써놓은 그였지만 이번 ‘No Love’은 괜히 나한테 하는 말인 것만 같다. 사랑이 아니라던 그 음성이 다시금 떠올라 가슴에 박힌다. 사랑은 무겁다. 사랑은 아프다. 사랑은 어렵다. 네겐 아무 의미 없을 단어 하나하나 쥐어뜯어 괴로워하고 심정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모습이 우습다. 이게 어떻게 사랑이 아니겠어.
BAD Liar
나 역시 앨범명을 썼을 뿐이야.
…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혁재와의 거리감에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하지만 내 생일에 선물도 안 챙길 줄은 몰랐다. 우리는 이제 친구만도 못한 사이가 된 건가? 내가 고백하기 이전에도 커플 선물이랍시고 잘만 줬으면서. 심장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널 잃어버릴까 무섭다. 우울과 번뇌로 보름을 꼬박 보냈다. 그다음은 분노가 일었다. 이젠 선물도 안 줘? 선물은 줄 수 있잖아!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 다짜고짜 숙소에 쳐들어갔다. 태평하게 저를 맞이하는 이혁재를 잡아끌고 집으로 데려왔다. 언젠가 한 번은 사달이 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순순히 따라오는 것이 화난 심정에 기름을 부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를 벽에 밀어붙였다.
“커플 선물 줘!”
“돈 모으고 있어. 기다려봐.”
“돈 필요 없어! 나랑 사귀는 걸로 하자.”
혁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다는 걸 안다. 그래도 네가 지난 20년간 우리가 지켜온 우정까지 저버리는 것보단 훨씬 납득되는 일일 것이다.
“너는… 뭐가 그렇게 쉬워?”
“야! 사랑이 별거냐? 그냥 생각나고 계속 챙겨주고 싶고-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격려해주고 안아주고. 그런 게 다 사랑이야.”
“사랑, 별거지. 너 나랑 섹스는 할 수 있겠어?”
목이 턱 막힌다. 날 떼어내려고 강수를 두는 모양인데, 호락호락 당해줄 순 없지.
“꼭 섹…스를 하지 않더라도 연애는 할 수 있잖아! 너도 연애 안 한 지 꽤 됐고. 넌 나한테 다 해주는데 이건 왜 못 해줘!”
“하아… 이동해.”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 날 압도한다. 부드러운, 따뜻한 이혁재가 아닌 강렬하고 위협적인 이혁재. 말없이 쳐다보는 그가 두려우면서도 야릇하다. 왠지 기시감이 든다.
“그래? 난 너랑 섹스하고 싶은데 어떡하냐.”
아. 알았다.
이 기시감의 원인.
오래된 간극의 이유.
“혁재야, 금주하는 거 나 때문이야?”
“정확히는 ‘네 앞에서’지.”
혁재는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더는 숨길 것도 없으니.
둘 다 진탕 취한 날이었다. 어느 때처럼 동해가 혁재 집으로 찾아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양손에 와인을 들고 있었다. 술도 못하는 녀석이 왜 그런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날따라 이동해는 술이 고팠고, 그날따라 이혁재는 취한 동해를 뒷전으로 음주를 즐겼다. 취한 동해를 케어하는 것은 늘 혁재의 몫이었고 그동안은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었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 혁재와 동해가 함께 취하는 역사가 발생했다. 저를 보며 예쁘게 웃어 보이는 동해에게 키스를 한 건 충동이었다. 몇 년간 참아온 욕망을 술에 빌어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버렸다. 갑작스러운 키스에도 동해는 팔을 목에 두르며 달뜬 몸을 부볐다. 이성은 뒤로, 본능에 충실한 밤이었다.
“왜 그동안 말 안 했어?”
“말하면 뭐. 네가 나랑 연애해? 섹스라도 한 번 더 하게?”
“나랑 섹스한 거 싫었어?”
“어?”
“나랑 섹스한 거 싫었냐고.”
“싫었으면, 내가 널 왜 피했겠어.”
“그럼 됐네.”
동해는 혁재의 옷깃을 잡고 천천히 이끌었다. 맞닿는 숨결이 아찔하다. 고개를 살포시 들어 두꺼운 입술을 비집고 들어간다. 기쁨과 안도가 뒤섞인 눈물이 얼굴을 타고 내렸다. 진한 입맞춤을 끝낸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직면한 애정 어린 눈빛을, 뜨거운 심장 소리를, 그대를, 오롯이 담았다.
“사랑을 놓쳐온 지난 20년이 아깝지 않도록 사랑해줘.”
혁재가 동해의 손등에 키스했다.
“분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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