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으면.
매년 크리스마스가 돌아올 때마다 혁재는 생각했다.
12월 14일
이젠 정말 한겨울이네. 오랜만에 정시에 퇴근을 했음에도 건물 밖 세상은 어두컴컴했다. 혁재는 목에 대충 걸치고 나온 목도리를 고쳐맸다. 양쪽 귀에 이어폰을 찔러넣고 퇴근 때마다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름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회사에서 지하철역까지는 꽤 걸어야하는 거리였다. 문을 열자마자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은 진짜 춥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고개를 목도리에 파묻은 채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시린 바람에 두 눈이 촉촉해졌다. 그렇다고 흐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너라면 이미 두 뺨 가득 눈물이 흐르고 있었겠지만. 혁재는 무심코 또 그를 떠올렸고, 지하철역에 도착해, 교통 카드를 찍고 들어가서, 세 정거장 전에서 오고 있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그 지하철에 오를 때까지 그 생각을 잊으려 애썼다. 그리고 늘 그랬듯 곧 포기해버렸다. 열 정거장을 지나치는 동안에 혁재는 오롯이 그를 생각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혁재는 무방비상태가 되어버렸다. 곳곳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거리고, 캐롤이 들려오기 시작할 때면 더더욱 버틸 수가 없었다. 해맑게 웃으며 크리스마스 잠옷을 샀다고 자랑하던 그의 얼굴이 어제처럼 선명했다. 그래서 혁재는 그의 세상에서 겨울이라는 계절이 사라졌으면 했다. 크리스마스가 없는 세상에 살고 싶었다. 겨울마다 혁재의 마음은 깊은 굴로 들어가 겨울잠을 잤다. 그가 버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겨울이 끝나갈 즈음에 늘 '이제는 괜찮아진 것 같아.' 라고 생각했지만 겨울이 시작될 즈음에 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때마다 혁재는 줄 꼬인 이어폰을 꺼내들어 급히 두 귀에 꽂아넣고 청량한 여름 노래의 볼륨을 높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혁재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유쾌하고 재밌는 이혁재는 사라지고 차갑고 처연한 눈빛만 남았다. 혁재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저 혁재가 겨울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혁재는 오랜 친구였다. 중학교 때 목포에서 전학을 온 그를 선생님은 가장 활발하던 혁재 옆에 앉혔다. 그가 어색한 서울말로 제 이름을 소개할 때 혁재는 그 이름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도 예쁘고, 환히 웃는 그 얼굴도, 귀엽게 삐져나온 덧니도, 찬공기에 살짝 붉어진 두 뺨도. 그냥 모든 것이 예쁘단 생각이 들었다. 동해, 이동해. 동해랑 친해지고 싶다. 예쁜 사람이랑 친구하고 싶다. 순수했던 열여섯의 이혁재는 쿵쿵거리는 제 심장박동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곧 둘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아침잠이 많은 동해를 혁재는 아침마다 데리러 갔다. 둘은 같이 등교했고, 또 같이 하교했다. 가끔은 축구도 하고 농구도 했다. 붙어있는 것이 떨어져있는 것보다 더 당연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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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겨울의 퇴근 시간 지하철은 여름과는 다른 의미로 고통스럽다. 끈적한 공기의 불쾌함은 없지만, 두꺼운 옷 사이에 꽉 끼인 채로 텁텁한 히터 공기를 마시는 것 역시 유쾌한 일은 아니다. 혁재는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인파에 밀려나지 않으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이제 곧 내려야하는데 여기서 더 문과 멀어지면 쉽지 않아질 것이 분명했다. 연말이 더 가까워져서 그런걸까. 조금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또 동해가 생각났다. 12월만 되면 항상 조금 들떠 보이던 동해. 곧 문이 열렸고, 내리려는 사람들과 내리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문 앞이 붐볐다. 혁재 역시 인파를 뚫고 겨우 열차 밖에 발을 딛었다. 그 순간 혁재의 이어폰 줄이 열차 안으로 들어가던 누군가의 가방 고리에 걸렸고, 다시 잡아뺄 새도 없이 닫힌 문 사이로 사라졌다. 혁재는 허탈한 눈빛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뚜껑을 잃어버린 두 귀로 찬바람이 곧바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결국 혁재는 아주 오랜만에 음악이 없는 채로 집을 향했다. 이어폰 하나 없다고 집에 가지 못하는 꼴도 우스워 그냥 한 번 나서보기로 했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마자, 가게에서 틀어놓은 시끄러운 캐롤 음악이 거리를 울렸다. 혁재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생각보다 두 귀를 막아야 할 만큼 싫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걸을 수 있을만큼 평화롭지도 못했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에 혁재는 거의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혁재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를 채우던 경쾌한 리듬의 캐롤이 귓가에 울렸다.
혁재는 열아홉의 크리스마스에 자신이 동해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다. 시작보다 한참 늦은 깨달음이었다. 둘은 같은 고등학교를 갔고, 여전히 늘 붙어다니는 사이였다. 혁재는 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동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내가 늘 동해의 곁에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행복했으니까.
열아홉의 크리스마스에 둘은 처음으로 같이 술을 마셨다. 부모님의 여행으로 빈 동해의 집에서 치킨을 시켜놓고 영화를 보면서. 집에 있던 맥주를 꺼내 몇 모금 마시고는 금세 얼굴이 붉게 물든 동해가 혁재는 못 참도록 귀여웠다. 곧 현관문 앞 크리스마스 트리를 끌어안고 춤 출 만큼 취해버린 동해가 못 참도록 사랑스러웠다. 나도 술에 취해서 그런걸까? 싶기엔 영화가 슬프다며 붉어진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저 눈물 방울이 못 참도록 야했다. 볼에 묻은 눈물 자욱에 키스하고 싶어. 널 내 품에 가득 안고싶어. 혁재는 처음으로 자신이 더이상 동해의 가장 친한 친구만으로 만족할 수 없단 걸 깨달았다. 그렇지만 가장 친한 친구마저 잃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혁재는 이 날을 늘 크리스마스의 선물이자 저주라고 생각했다.
혁재는 침대에 누운 채로 오늘 길거리에서 들은 캐롤들을 떠올렸다. 경쾌한 리듬의 캐롤. 동해가 참 좋아했던 음악. 동해는 12월이 되면 캐롤만 들었다. 음악만 들어도 너무 설레지 않냐며 웃곤 했다. 마치 산타 할아버지 선물을 기대하는 꼬마마냥 해맑게. 그때마다 '넌 울보라서 절대 선물 못 받는데 크리스마스가 뭐가 그렇게 좋아?' 하며 장난을 걸던 혁재였지만, 그 역시 크리스마스가 좋았다. 동해가 행복해하니까.
혁재는 정말 오랜만에 스스로 캐롤을 틀었다. 7년 만이었다. 오늘은 왠지 울지 않고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용기가 났다. 울지 않고 널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자신감이 아주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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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오늘은 일이 무척이나 고된 날이었다. 연말이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점심을 대충 자리에서 떼워가며 일했지만 평소보다 한참이나 늦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뻑뻑해진 눈동자에 칼바람이 닿아 시큰거렸다. 새로산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여름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만 전보다 조금 볼륨을 줄였다. 귓가에 울리는 청량한 목소리 사이로, 겨울의 소리가 잔잔히 스며들어왔다. 길가의 음악소리, 구세군 종소리,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 가족과 통화하는 목소리... 지하철역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2번 출구 앞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바닥에 깔린 신문지 위에서 빛나는 작은 화분? 그리고 그 앞을 얼쩡거리고 있는 꼬마들. 미니 트리였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가짜 나무 위에 꼬마 전구가 몇 개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작년이라면 혁재는 못본 척 그곳을 빠르게 지나쳤겠지만, 오늘은 괜히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작고 초라한, 그러나 나름대로 제 불빛을 열심히 뽐내고 있는 그 미니 트리를.
거리 중심가에 커다랗게 설치해놓은 크리스마스 트리. 스무살의 혁재는 그 아래에 서서 동해를 기다렸다. 원래 늘 늦는 아이였으니 오늘도 그러려니 했다. 어쩌면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차가 더 밀리는지도 몰랐다.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트리를 바라보면서, 그보다 더 예쁜 동해를 생각했다. 또다시 크리스마스를 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되내었다. 난 늘 네 곁에 있고 싶어. 더이상 욕심 안 부릴게. 힘들게 하지 않을게. 사랑한단 말을 꾹꾹 눌러 담아 절대 흐르지 않도록 닫았다. 절대 열릴 일 없을거라 생각했던 그 마음은 전화 한 통에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응급실이었다.
동해가 탄 버스를 급발진한 차가 들이받았다고 했다. 하필 동해가 앉아있던 자리와 정면으로 부딪혀서, 바로 응급실로 이송되었지만 수술 시도도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혁재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동해 원래 장난치는 거 좋아하니까. 내가 저번에 화 좀 냈다고 일부러 장난치는거지 너. 재미 없으니까 빨리 이동해 바꿔주세요.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려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응급실에서 피가 잔뜩 묻은 새하얀 손을 보는 순간까지도 혁재는 믿을 수가 없었다. 꽁꽁 숨겨놓은 마음이 터지고 찢어져 몸의 모든 구멍으로 새어나왔다. 쏟아져 흐르다 못해 곧 잠식당할 것만 같았다. 혁재는 동해의 작은 손을 붙잡고 아이처럼 울었다. 동해야, 동해야 미안해. 동해야, 사랑해. 정말 사랑해, 나 떠나지마 내가 잘못했어. 제발... 장례식장에서 환히 웃고 있는 동해 사진을 바라볼 때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소설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어. 동해 어머니가 건내주신 작은 선물봉투를 받을 때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동해가 너 주려던 거야. 가져가렴. 울지 않으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서 피맛이 났다. 죄송하다는 말이 턱끝에 걸려 숨이 막혔다. 온세상이 축복으로 물드는 날에 혁재는 지옥 저편으로 떨어져 버렸다.
침대에 누우려던 혁재는 옆 테이블에 놓인 미니트리를 바라보았다. 혁재 자신도 무슨 생각으로 이 트리를 사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충동구매' 라는 말이 가장 어울려보였다. 7년동안 크리스마스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왔는데 오늘은 왜인지 그냥 집에 가져오고 싶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작은 불빛들이 촌스럽게 반짝거렸다. 그 옆에 음표 모양의 작은 버튼이 하나 더 있었다. 도색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금색의 별이 가장 위에 걸려있었다. 동해도 크리스마스 트리 꾸미는 걸 참 좋아했었다. 11월부터 동해네 집 현관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있었다. 저것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고, 반짝이고, 아름다웠던 트리. 혁재는 가만히 누워 한참을 생각했다. 만약 스물일곱의 네 곁에 내가 있었다면 내가 그보다 더 멋진 트리를 선물해줬을텐데. 그럼 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스물일곱이 된 동해를 상상하고 또 상상해도 잘 그려지지가 않아서, 혁재는 오늘도 스물의 동해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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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회사는 전체적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내일은 크리스마스니까. 각자 누구와 어떤 크리스마스를 보낼건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형식상 혁재에게 돌아온 질문에 그저 가족들이랑 보낸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가, 거리도 지하철도 평소보다 훨씬 더 붐볐다. 거리의 가로수들이 잔뜩 전구를 달고 반짝거렸다. 다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건지 무거운 옷차림과는 달리 발걸음이 가벼워보였다. 혁재는 겨우 인파를 해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불꺼진 집안에 들어서니 테이블 위 작은 트리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내가 저걸 키고 나갔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혁재는 목도리만 겨우 벗어 의자에 던져둔 채로 침대에 걸터앉아 트리를 바라봤다. 어제 눌러보지 않은 음표 모양의 버튼을 누르니 삑삑거리는 싸구려 멜로디의 캐롤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곧 저절로 가사가 떠올랐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가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혁재는 가만히 그 삑삑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멈추면 다시 누르고, 또 다시 누르고.
눈물이 많던 동해를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를 참 좋아하던 동해를 생각했다. 캐롤을 흥얼거리던, 트리를 꾸밀 펜던트를 고르던, 겨울을 참 사랑했던 동해를 생각했다. 혁재가 참 사랑했던 동해를 생각했다. 혁재는 몇 년만에 아이처럼 펑펑 눈물을 흘렸다. 까끌한 트리를 끌어안은 채 울고 또 울었다. 동해야, 보고 싶어. 나는 아직도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네가 없는 크리스마스를 버틸 수 없어서 늘 모른 채 했는데, 눈 감고 귀 막고 혼자 보냈는데, 어떻게 해도 널 잊을 수가 없어.
스무살의 겨울, 혁재는 무척이나 지쳐있었다. 동해와 혁재는 여전히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혁재의 마음은 이미 친구란 이름으로 담기에는 너무나 커져있었다. 마음을 깨달은지 1년 만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퍼져버렸다. 혁재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마라톤을 하는 사람마냥 삐걱거렸다. 자꾸만 넘어지고 비틀거리는데, 도무지 결승선은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멈추는 법도 몰랐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기에 멈출 수도 없었다. 각자 다른 대학에 들어가면서 전처럼 매일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혁재는 동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어떻게든 그를 불러내려고 핑곗거리를 생각해냈다. 게임, 영화, 과제... 메세지를 쓰고 또 쓰다가도 불현듯 화가 났다. 나는 이렇게 네가 보고싶고 네가 그리운데 넌 날 생각이나 할까. 대학의 다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동해가 서운했다. 나는 이제 네 곁에 가장 가까운 사람도 아니게 되어버리면, 그러면 난 어떡해.
그래서 동해에게 처음 화를 냈다. 별 것도 아닌 핑계를 가지고 화를 냈다. 나는 몇 주만에 널 만나게 돼서 두 시간 전부터 무슨 옷을 입을까 고르고, 머리를 올리고 내리고, 거울을 수십번 들여다보고 나왔는데. 30분이나 늦었으면서 동기 과제를 도와주느라 어쩔 수 없었다며 해맑게 웃는 네게 화를 냈다. 하찮은 심술이었다. 사실 동해가 늦는 건 늘 있는 일이었는데. 혁재는 늘 동해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는데. 왜 그 한 번을 참지 못하고 너에게 화를 냈을까. 왜 사랑으로 쌓인 감정을 친구란 이름으로 포장해 너에게 쏟아부었을까. 넌 아무 잘못이 없는데. 혁재는 할 수만 있다면 그날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바보같은 동해는 하루를 온종일 끙끙 앓다가 결국 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진짜 미안해.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나 앞으로 절대 안 늦을게. 서운하게 안 할게. 진짜 미안. 너 크리스마스에 약속 없으면 나랑 놀자. 아 우리 맨날 같이 놀았잖아. 응? 너 약속 없지?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어? 아, 진짜 안 늦는다고! 어, 웃었다. 이혁재 웃었지! 화 풀린거지? 아, 다행이다.
그래서 동해가 죽었다. 내 사랑이 동해를 죽였다. 혁재는 늘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화를 내지 않았으면 넌 그 시간에 그 버스를 타지 않았을텐데. 괜히 서두른다고 20분이나 일찍 출발해서 그 버스를 타는 일 절대 없었을텐데. 아니, 그날 날 만나지 않았으면 그 근처에 갈 일도 없었을텐데. 혁재는 돌이킬 수 없는 수천개의 만약을 떠올렸다. 동해가 죽지 않을 수 있었던 방법은 끝없이 떠오르는데, 왜. 왜 단 하나의 최악이 현실이 되었을까. 왜, 도대체 왜. 나는 왜 널. 내 사랑은 왜 널.
혁재는 아주 오랜만에 동해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예쁜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환히 웃으며 혁재를 부르고 있었다. 나 오늘은 진짜 안 늦었지! 하면서 눈을 찡끗거리는 동해에 혁재는 왈칵 울음을 터졌다. 야, 너 울어? 왜 울어. 울지마, 바보야. 너 울면 선물 못 받아. 울면 안 돼! 어쩔줄 몰라하며 이런저런 말을 내뱉는 동해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끌어안고 서있었다. 동해가 천천히 혁재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혁재야,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네 크리스마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만 울고... 웃었으면 좋겠어. 이제 그럴 때도 됐잖아. 혁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동해를 더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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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건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는 트리였다. 사실 눈이 너무 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을 지경이었지만. 혁재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장 서랍의 가장 마지막 칸을 열었다. 손바닥만한 작은 선물 상자. 거의 5년이 넘도록 한 번도 열지 않은 상자였다. 혁재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세월이 무색하도록 박스는 부드럽게 열렸다. 은색의 별모양 펜던트. 그리고 잘 쓰지도 못하는 글씨를 꾹꾹 눌러쓴 작은 쪽지. 동해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혁재야! 요즘 우리 진짜 별로 못 만나네ㅠㅠ 그래도 내 평생친구는 너 밖에 없는 거 알지? 이거 우리집 트리 꾸미려고 살 때 너꺼도 같이 샀어! 집에 걸어놔 ㅎㅎ 그리고 앞으로 절대절대 안 늦을게 그러니까 나랑 계속 친구해줘야해!! 내가 많이 사랑한다 알지?? 새해에도 늘 함께 하자! 메리 크리스마스!
혁재는 펜던트를 꺼내 들고 미니 트리로 향했다. 금색 도색이 벗겨진 싸구려 별장식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동해가 준 펜던트를 걸었다. 팬던트 하나 바꿨을 뿐인데 트리의 빛색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혁재는 가만히 앉아 그 트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나갈 준비를 했다. 동해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미안해, 사랑해. 그 말 말고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동해야, 널 떠나보내고도 끝낼 수가 없는 내 사랑을 용서해주라. 떠나간 널 마주하기 두려워서 늘 피하기만 한 나를 용서해주라. 나 이제 그냥 살아볼게. 잊으려 하지도 않고, 피하려 하지도 않을게. 매일매일 네 추억과 부딪히고, 그러면서 조금씩 무뎌지고, 찔리더라도 어떻게든 둥글게 문질러볼게. 영원히 스물로 남아있는 네가 내 삶에 스며들도록 둘게. 내 청춘을 온통 다 가져간 나의 동해야.
혁재가 나간 빈 집에 은색별을 가진 작은 트리만이 반짝거렸다. 한 낮의 태양빛에 묻혀 희미해 보이지만 분명히 아름답고 잔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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