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햇살 말고
w. 꿈글
월간 은해 5월호
"거기 꽂는거 아니에요!"
조용하게, 혹은 조금은 다급하게.
너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
그러니까, 그날 간 도서관은 내가 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두번째로 간 것이었다.
입학한지 2년이 지나도 국어시간에 잠깐 방문한 것 빼고는 도서관에 한번도 가본적이 없던 나는, 이번에도 전혀 갈 마음이 없었지만 눈부시게 아리따우신 도서부 선배가 있다는 소문에 혹해버린 친구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끌려가게 되었던것이다.
"그래서, 그 선배가 누군데?"
"기다려봐, 아직 안오신거 같아."
시시콜콜한 대화를 듣자하니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녀석들이 옹기종기 도서관 가운데 큰 책상에 모여있는 사이 저 너머 책꽃이가 주욱 나열되어있는 서가가 보였다. 이 근방 학교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꽤나 큰 규모의 도서관을 자랑하는 우리 학교였다. 물론 아무리 큰 도서관이 있다고 하여도 나처럼 일년에 한두번 가볼까 말까 하는 학생들도 태반이었지만, 어찌되었건 도서관은 우리학교의 자랑이자면 자랑이었다.
학교에서는 1년에도 몇번씩 도서관 행사를 열었고, 보물찾기나 편지쓰기 따위의 이벤트를 하여 과자나 사탕같은 것들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큰 도서관인만큼, 도서부의 역할도 중요했다. 우리학교에서 '도서부'하면 기본적으로 성적은 상위권에 들어있어야 했으며, 뛰어난 글솜씨와 말빨이 있어야한다나. 뭐, 실제 도서부와 말을 섞어보지는 못했지만, 학기초마다 신입생중 새 부원을 뽑겠다고 토론대회를 여는것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갈법도 하였다.
"야, 우리가 도대체 왜 여기 이러고 있어야하냐?"
"짜식, 기다려보라니까? 벌써 소문이 파다하다고, 그 선배."
"너 보고 반해서 졸졸 따라다니지나 마라."
"웃기시네, 그런 도서부 샌님들이 뭐가 좋다고."
지루했다. 이럴시간에 나가서 축구나 하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서가쪽에 시선을 문득 던졌다. 열어놓은 창문에서 커튼이 흩날리며 하얀 봄바람과 햇살이 뒤섞여 들어오며 영화 러브레터에서 나올법한 분위기를 연출해내었다. 이거 참. 오겡끼데스까라도 외쳐야하나. 시큰둥하였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엇에 홀린 것 처럼 서가로 들어갔다.
애초에 책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책꽃이 사이를 주욱 걸으며 책들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역시 문학이라는 것은 나하고 맞지 않아, 제목만 보아도 따분한 책들이 일목요연하게 줄지어 제 표지색을 자랑하듯 꽂혀있었다.
만화라도 볼까 하여 맨 위 칸에 있는 책 한권을 꺼내는 순간,
"아 씨발."
책은 도미노처럼 우르르 쏟아져버리고, 참 뭣같은 상황이 되었다.
이래서 나는 도서관에 오면 안돼, 그냥 예쁜 누나보고 가는건데 하는 막심한 후회를 하며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급하게 다시 책꽃이에 밀어넣는데
"거기 꽂는거 아니에요!"
내 등뒤로 들려오는 목소리.
뭐야, 도서부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헉하고 숨을 삼켜야 했고,
"책 다 떨어진거에요? 어, 뭐야. 너 2학년이야? 야, 이걸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 번호에 맞춰서! 제대로 꽂아야지!"
도서부 예쁜 선배가 이사람인가.
-
도서부 선배는 개뿔. 그 충실한 도서부의 이름은 이동해. 나와 같은 2학년이었다.
학교에서 이곳저곳 휘젓고 놀러다니기를 좋아하는 나와 달리, 그 아이는 교실에서 책만 읽는것인지 도통 복도에도, 점심시간 운동장에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자꾸 그 아이를 한번 더 보고싶었다. 하지만 몇반인지도, 어디있는지도 몰라 답답하지 그지없었는데,
도서관에만 머무는 것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뭐? 야 이새끼 말하는거 들었냐?"
"니가, 도서관에 가겠다고?"
"왜, 이제 좀 문학소년이 되서 분위기좀 잡아볼라 그런다."
너가 그렇게 꽁꽁 숨어있겠다면, 내가 가는 수밖에.
도서관에 들어가자 도서관 특유의 책냄새와 조용한 분위기가 나를 맞이했다. 도서부로 보이는 학생들이 분주하게 카트위에 놓은 책을 서가로 나르며 정리하거나 새로운 책에 라벨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동해는 어디있지, 어슬렁 어슬렁 책꽂이 사이를 누볐지만 어디간건지 보이지가 않았다.
오늘 안온건가.
약간은 실망한 마음으로 뒤를 도는 순간,
"아, 조심해!"
책을 한가득 안고있는 이동해와 정면으로 부딪혀버렸다.
"아..책 다 떨어졌잖아..너 뭐야!"
"아, 미안"
바닥에 보기좋게 널브러진 책들을 허둥지둥 줍은 이동해가 내 상상속의 도서부 이미지와는 다르게 조금은 귀여워보였다. 나도 허리를 숙여 책을 주워 이동해에게 건넸다.
"자."
"앞좀 보고다녀! 어, 잠깐만, 너 저번에 걔지! 그 만화책!"
"....그럴껄?"
용케 기억하네. 하필이면 그런 모습을. 당황하여 멍청하게 그럴껄이라고 어벙한 단어를 내뱉고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아까 다친데는 없어?"
"다친데는 없는데 너때문에 책 순서 다 섞였으니까 나 책 꽃는거나 도와주고가."
책을 다시 한아름 안고 총총 걸어간다. 귀여워.
"도서관 좋아하나봐? 자주와?"
"으응..좀.."
"아 정말? 그럼 책읽는것도 좋아하겠네?"
"응."
"대박, 책읽는거 좋아하는 애 처음봐! 보통 막 애들은 책 안좋아하고 축구하러 나가고 그러잖아."
그거 내 이야기인데. 약간은 찔렸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너 가장 좋아하는 책은 뭐야?"
"나? 나는..헝거게임?"
"헝거게임? 나도 헝거게임 좋아하는데! 헝거게임 작가 너무 대단하지 않니? 독재정치의 문제점과 인간의 잔혹함을 그렇게 기발한 서바이벌 게임형식으로 그려냈다는 게 되게 참신했어."
"나도..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역시 도서부인가. 차마 슬램덩크라고 대답할 수는 없어서 언젠가 학교에서 보여준 영화중 아무거나 떠오르는 걸 대답했는데, 잘 넘긴건가 싶었다.
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는 하였지만, 정작 본인이 다 정리하고, 나는 옆에서 그저 이동해가 하는 말에 응, 응하고 대답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덧 책은 몇권 남지 않았고, 이상하게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개인적으로...개인적으로.."
책꽃이 가장 위에칸에 책을 꽃으려 노력하는 도중이어서인지 동해가 말을 잠시 멈추었다. 까치발을 하고서는 낑낑대는 모습이 또 귀여웠다.
"자."
"이씨, 나도 닿거든? 아무튼 그래서 오만과 편견에서..."
지금 보니 동해가 나보다 조금 작았다. 책을 대신 꽂아주었더니 또 자존심이 상한건지 약한 짜증을 내었다. 동해의 모든것이 부드러웠다. 그것은 마치 내가 저번에 보았던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봄바람과 햇살을 뒤섞어 놓은것과 느낌이 비슷했다.
"다 끝났다! 이제 가도돼. 오늘 도와줘서 고마웠어. 다음에도 도서관 자주 와!"
"잠깐만..!"
"응?"
"혹시, 나 도와줄 수 있어? 글 쓰는거? 너 도서부니까 글 잘 쓸거 같아서, 아니 꼭 그런 이유는 아니고.."
"글? 혹시 이번에 열리는 백일장 준비하는거야? 좋아! 나도 그거 나가는데! 도와줄께! 점심시간마다 도서관 내려와!"
"고마워."
백일장? 그건 뭐야. 그거 막 글쓰고 그러는거 아니야? 우웩, 싫은데.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어쨌거나, 앞으로 점심시간마다 볼 수 있다니, 마음속 한구석에서 흰 보풀이 몽실몽실 일어나는듯 간질거려 계단을 오르며 나도 보르게 웃음을 흘려야했다.
-
"자, 뭐부터 시작해볼까? 백일장 처음이야?"
결국 나는 오늘은 축구를 하러 나가자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도서관에 내려오고야 말았다. 친구들은 그렇게 싫다더니 결국 그 예쁜 도서부 선배한테 뿅 가버린거냐고 하루동일 놀려대었지만, 나도 나를 믿을수가 없었다.
"사실 나 백일장은 안나가. 그냥, 글쓰는거 한번 배워보고 싶었어."
"아, 그래? 좋아! 그러면 일단 마인드맵부터 시작하자. 글을 쓰려면 이렇게 많은 소재를 생각해 두어야 하거든."
"어렵네."
"뭐야, 아직 시작도 안했어. 음, 뭐로 할까? 그래, '도서관'으로 하자. 도서관에 관한거 아무거나 적어봐. 지금부터 5분동안 최대한 많이 적는거다?"
그러더니 공책을 꺼내어 가운데게 '도서관'이라고 쓰고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동해한테서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자신도 열심이 무언가 써내려가는 동해를 쳐다보다보니 어느덧 3분이 지나버렸고, 나는 아무거나 써넣어야했다.
"다썼어?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너꺼 줘봐! 아, 너도 내꺼 봐도 돼."
"너,"
"응?"
"생각보다 악필이구나?"
그랬다. 동해는 악필이었다. 의외의 빈틈에 나는 소리죽여 쿡쿡 웃었고, 뭘 웃냐며 타박을 주던 동해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우리의 첫 글짓기 수업이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 내려갔고, 우리는 꽤 친해지게 되었다. 알고보니 동해는 나와 집에가는 방향도 같아서 항상 같이 등교하고, 하교했고,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을때도 집 옆의 도서관에도 같이 갔다. 내 친구들은 너 정말 도서관 예쁜 누나랑 사귀냐고 진지하게 물어보았으며, 아니라고 대답을 해도 믿지 않았다. 한번은 동해에게 이 이야기를 했었는데,
"예쁜 누나? 설마 예지 선배?"
"몰라, 아무튼 애들이 그런 선배 있다고 나한테 자꾸 그 선배랑 만나냐고 물어봐."
"뭐야. 하하하, 그 선배 남자친구도 있어. 잠깐만, 너도 혹시 그 선배 보려고 도서관 자주 오던거 아니지?"
"무슨소리야!!! 아니야!!!"
"뭐야, 왜 이렇게 심한 부정이야. 설마 진짜야?"
"아니라고!"
"하긴 예지누나가 예쁘긴 하지. 좋겠다, 그선배는. 너같은 애의 사랑도 받고."
피식 웃으며 딸기라떼를 한모큼 쪼옥,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동해가 너무 예뻐보였다.
"나같은 애가 뭔데?"
"음, 그냥 착하고, 뭔가 밝고, 아 가끔보면 귀엽고! 근데 이건 진짜 가끔."
"가끔? 진짜 가끔이야? 항상 아니고?"
"뭐래, 우웩!"
"방금 우웩이라 그랬냐!"
유치한 장난도, 대화도 다 너무 달콤한 나날들이었다.
-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꾸물한가 싶더니, 기어코 집에 갈때 즈음 비가 내렸다. 다행히 우산 가져가라는 누나의 말을 듣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동해 우산 있으려나. 없겠지? 앗, 그러면 오늘이 그 유명한 비오는 날의 우산 데이트인가. 엉뚱한 상상을 하며 동해네 반 앞에 가서 기다렸다.
하지만 10분, 15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 무슨일이 생긴건가 뒷문을 열려고 하는순간 들려오는 말소리.
"야, 샌님.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시려고."
"..건들지마."
"건들지마? 얘들아, 우리 똑똑한 동해가 건들지 말라네?"
"그러면 당연히 건들지 말아야지! 또 선생님께 이르면 어쩌려고."
"그러네, 동해. 저번에 우리가 민석이와 놀아주고 있는데 선생님한테 고자질했지?"
"그게 어떻게 놀아주는거야! 때리고, 발로 차는게 놀아주는거야?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할수가 있어!"
"어어, 지금 소리지른거야? 야, 왜 상황파악 못할까?"
마지막 아이의 말을 끝으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동해의 신음소리가 들렸고, 나는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야, 너네 뭐야."
"넌 뭐야."
엎어진 책상, 바닥에 넘어진 동해, 눈물이 한가득 담긴 눈동자. 속에서 뭔가 끓어올랐다.
"이동해. 가자."
"어딜가. 우리랑 놀기로 했잖아, 동해야?"
"닥쳐, 씨발."
순식간에 이성의 줄이 끊어졌고, 충동적으로 대장뻘 되어 보이는 아이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걸 시작으로 나는 그 패거리와 대판 싸웠고, 결국 교무실에 남아계시던 선생님이 뛰어오시게 했으며, 유치하게 반성문 10장과 1시간 집에 늦게가는 결과를 불러왔다.
"괜찮아? 아프겠다. 미안."
집에 가는 길 내내 아무말도 없던 동해가 나에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어왔다.
"아프지는 않은데, 왜 거기서 당하고만 있어. 나라도 불렀어야지."
"왜 나섰어, 다치지마 혁재야."
전혀 다른말이나 하며 다시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담아내는 아이. 눈물을 닦아주려고 우산을 잡고있는 다른쪽 손을 뻗었고, 동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한손에 포옥 들어오는 얼굴이 참 부드러웠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 볼을 내쪽으로 끌어당겼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우리 둘의 입술이 겹쳐졌다.
빗소리만 들려오는 이른 5월의 봄날의 우리의 첫키스는, 비릿한 비냄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녹아내릴듯, 서로를 놓칠듯 말듯 참으로 달콤했다.
-
참 많이 달라진듯 달라지지 않았다.
손이 스칠때마다 약간씩 움찔거리는 동해의 어깨도,
눈을 마주쳐오면 노려보는 듯 같이 쳐다보다가 이내 귀끝까지 빨개져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도,
그리고 바로 어제, 집에 들어가기 전에 나에게 살짝 안겨오던것도,
"혁재야."
"응?"
"우리, 무슨 사이야?"
수줍에 질문을 하고서도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저만치 멀리 도망가버리는것도.
-
동해를 먼저 보내고 얼마전 새로생긴 큰 대형문구점 앞을 지나갔다.
'로즈데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세요!'
아, 이거다.
-
"이동해."
"응?"
"잠깐 내려와봐."
"왜애, 나 바빠."
"잠깐이면 돼."
가장 예뻐보이는 장미를 사 무작정 동해네 집 앞으로 뛰어왔다. 로즈데이라고는 하지만 무얼 선물로 주어야 하는지, 보통 연인들은 어떻게 이 기념일을 챙기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애당초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급했다. 어서 동해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불렀어."
"너가 저번에 물어봤잖아."
"뭘?"
"우리. 무슨 사이냐고."
"아."
잠시의 정적이 흘렀고, 춥지 않은 바람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좋아해."
"...."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해. 동해야. 나랑 사귀자."
급하게 준비한 장미꽃 한송이. 참 내가 생각해도 멋없는 멘트. 이럴거면 글짓기 수업을 왜 받았나 싶을 정도의 바보같은 말. 그래도 너에게 내 마음이 가장 거품없이, 빨리, 그대로 닿을 수 있다면.
"...그래."
담백한 동해의 대답과 함께, 다시 우리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Happy Roseday, My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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